자 유 당 (自由黨)


 

1. <출처:두산 대백과>

1951년 12월에 창당되어 약 10년간 존속하였던 한국의 보수정당(保守政黨).

소재지 : 한국 서울

주요활동 : 이승만의 집권연장

1951년 8월 15일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신당조직 의사표명'을 계기로 당시 이승만의 지지기반이었던 원내의 공화민정회(共和民政會) 소속의원들과 원외의 국민회(國民會)·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대한노동조합총연맹(大韓勞動組合總聯盟)·농민조합연맹(農民組合聯盟)·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 등 5개 사회단체 대표자들은 공동으로 신당을 발족시키기로 합의하고 신당발기준비협의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제기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려 결국 자유당은 창당 때부터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이라는 두 개의 정당으로 출발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자유당은 원외자유당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들은 국회의원들의 납치와 연금 등 일대 정치적 파란을 일으키고,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통과시켜 대통령직선제개헌을 관철시킨 부산정치파동을 유발함으로써 자유당의 실정(失政)과 비리(非理)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자유당의 주도권은 이범석(李範奭)이 이끄는 족청계(族靑系:조선민족청년단 계통)가 잡고 있었는데, 이에 대통령 이승만은 위협을 느끼고 거세(去勢)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개정헌법에 따른 그 해 8월 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는 관권개입으로 부통령후보로 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이범석이 낙선되고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이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그 후 자유당은 이범석의 거세를 위하여 당수제(黨首制)를 총재제(總裁制)로 바꾸어 이범석의 부당수직을 박탈하였다. 이어 1953년 9월 12일 이승만의 노골적인 '족청계 축출과 당의 정화 및 재건' 지시에 따라 족청계는 이범석을 비롯하여 전원이 축출되었고, 이는 새로이 임명된 총무부장 이기붕(李起鵬)이 실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5·20총선에서 99석을 확보하여 제1당이 된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대통령 3선제한 철폐'를 위한 개헌을 노리고 개헌정족수인 의원 정수(議員定數)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려고 무소속의원의 포섭에 나서 의석 총수 137석을 확보하였다. 이때부터 자유당의 전횡은 더욱 심해져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과 같은 정치적 비리를 저지르며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꾀하다가 마침내 1960년 3·15부정선거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자유당은 붕괴되었다.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2. <출처:브리태니커 대백과>

정부수립 초기 정당무용론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내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약화되자 정국타개를 위한 자유당의 창당을 서둘렀다. 즉 야당인 민주국민당(한국민주당의 후신) 주도의 국회에서 직선제로의 개헌이 통과될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원외에서 광범위한 관제(官製) 민의운동을 일으켜 국회에 압력을 가하는 방법을 채택, 원외 자유당을 지지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창당과업은 당시 주(駐)중국 대사로 있던 이범석에게 맡겨졌으며, 창당준비 당시의 자유당은 원내의 공화민정회 외에도 원외의 국민회·대한청년단·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부인회·농민조합총연맹 등 핵심적 사회단체를 망라했다. 1951년 11월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한 대통령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찬반양론의 대립 속에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 하나의 이름으로 2개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형태로 자유당은 창당되었다. 이승만을 당수로, 이범석을 부당수로 하여 직선제 개헌안 지지를 표명한 원외 자유당 세력은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과 5개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이후 자유당의 주류가 되었다. 1952년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통해 원내 자유당은 합동파(삼우장파)와 잔류파로 분리되는 등의 이합집산과정을 통해 결국 원외 자유당에 통합되어 단일 자유당이 출현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원외 기반을 구축하고 개헌안을 통과시킨 이승만은 대통령선거의 승리를 확신하고 당내 제2인자인 이범석의 족청계를 외면하고 정부통령선거 전에 함태영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이러한 족청계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는 이범석의 부통령후보 탈락과 함께 당내 결속에 동요를 가져왔고, 자유당의 지도체계는 이기붕을 2인자로 하는 체제로 개편됨과 동시에 이승만에 의한 권위주의적 정당체계로 변모했다. 같은 해 5월 20일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은 114석을 확보하고, 친여적인 무소속의원들을 포섭함으로써 개헌정족수를 상회(上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국회는 자유당의 전횡(專橫)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을 폐지하고 국무위원불신임권을 삭제한 사사오입개헌파동 등을 일으키며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기도하다가 1960년 3·15부정선거로 폭발된 4·19혁명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출신의 인사들은 5·16군사정변 이후 혁명 주도세력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주공화국에 대거 입당하여 정계에 재진출하기도 했다.


 "자유당"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http://members.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8j2430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