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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이승만과 기독교

운영자 2005.04.15 07:59 조회 수 : 1703 추천: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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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기독교

이승만과 기독교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교수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 민족의 유명한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기독교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김규식, 안창호, 김구, 여운형, 이동휘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우리 민족의 장래가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이승만도 그러한 인물의 하나였다. 오히려 그는 위의 인물들보다 기독교와 더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90년의 긴 생애를 사는 동안 기독교와의 관계를 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년에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국가차원에서 기독교를 도우려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1895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기독교를 알게 되었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 것은 거의 6년이란 긴 세월(1899~1904)을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다. 죄목은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반역죄였다.

20대의 청년 죄수가 절망 상태에서 마지막 희망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으려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감옥에 있는 동안 이상재를 비롯한 40명의 동료 죄수를 개종시킴으로써 그의 전도 방법이 외국 선교사들의 관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04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시기에 미국에서 조지 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를 거치며 박사학위를 끝낸 것도 미국교회의 도움이 컸다. 학업을 마친 다음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한국에 돌아와서는 YMCA 청년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미국 망명 기간(1912~1945)에도 이승만은 항상 기독교와 관련을 가지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하와이에 교회와 교회학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도와 줄 미국인 기독교인들을 조직하고 그들을 통해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처럼 기독교적 생활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평생 술, 담배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매일 아침 아내 프란체스카와 가정 예배를 보았다.

그의 기독교적 체질은 그가 통치자로서 등장하게 되었을 때도 나타나곤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1948년 5월말에 제헌국회가 처음 열렸을 때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은 독립국가의 국회를 가지게 된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회의 순서에도 없는 이윤영 목사의 기도를 부탁함으로써 국회의원들과 방청객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선포식에서도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할 것을 “하나님과 동포 앞에” 맹세하였다.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공직자로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기독교에 유리한 정책을 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통치하던 1960년까지 기독교는 정부로부터 적지 않은 혜택을 입었다. 군인들에게 기독교를 알리기 위한 군목제도, 그리고 감옥의 죄수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형목제도가 도입되었다. 그가 임명한 135명의 장관급 고위직 가운데 거의 절반인 47.7%를 기독교인으로 채웠다.

대통령 시절에도 이승만이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려던 젊은 시절의 꿈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를 배려하려 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사실 그가 독재자로 비난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의 친기독교적인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독재에 대한 논쟁은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세력들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반공정책을 둘러 싸고 일어나게 되는데 그가 그처럼 반공주의를 강하게 내세우게 된 데는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인과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이 없었다면 남한은 오래 전에 공산화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이승만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는 너무나 무관심한 것일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적대적인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미래한국  2005-04-14 오전 11: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