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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메시야를 영접하는 인격(요1:35-51)

운영자 2007.03.03 17:37 조회 수 : 1371 추천:155

 

메시야를 영접하는 인격

-요1:35-51-


 하나님께서 야곱의 씨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를 통하여 예언할 때에 메시야가 올 것을 빠짐 없이 가르쳤으므로 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큰 소망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보다도 이스라엘 나라에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큰 자랑이 되었던 것이다. 만왕의 왕 메시야가 자기 나라에 오면 그들은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가 되고 세계 열방을 다 통일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민족을 상대하지 않고 자기네만이 메시야를 영접할 민족이라는 것을 믿는 동시에 극도로 교만한 위치에서 남을 무시하는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예루살렘 거리에 많은 사람이 거룩한 예복을 입고 왕래하지만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메시야를 영접하는 자는 갈릴리 벳세다 동네의 어부들이 메시야를 영접했던 것이다. 어찌하여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의 전도를 받지 않고 이방 갈릴리에 있는 불학무식한 어부들이 받았던가 하는 것을 이제 알아야 할 일이다.


 1. 마음이 겸손한 자들이다 (35-42)

 언제나 겸손한 자는 영안이 밝고 교만한 자는 어두운 것이다.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고 할 때에 교만한 인간들은 오히려 이단시하고 대적했지만, 기도의 사람으로 메시야를 고대하던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를 볼 때에 영적으로 알려지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 안드레 이 사람들은 비록 무식하고 빈곤한 생활을 하지만 메시야를 고대하고 기도하던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한 일이라고 본다. 주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므로 그들을 만날 때에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던 것이다.

 언제나 신령한 세계를 체험하려면 부유한 생활보다도 빈곤한 생활에서, 호화로운 자리보다도 비천한 자리에서, 화려한 도시보다도 조용한 곳에서, 많은 무리보다도 작은 무리라도 합심하는 곳에서, 영계 운동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메시야를 고대하는 신앙 양심에서 산명수려(山明水麗)한 갈릴리 해변을 찾아 작은 동네의, 작은 집에, 적은 무리가 모여서,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메시야를 고대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들을 만날 때에 직접 따라 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던 신앙가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런 믿음이 없고 합당치 못한 사람을 모르고 택한 것이 아니고 알고 택할 때에 가룟 유다 외에는 다 승리의 왕권을 받게 되었다. 가룟 유다를 택한 것도 말씀이 응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메시야를 영접할 자격은 성신을 충만히 받지는 못했으나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날 그날에 하나님과 그의 양심과에 접촉되는 생활에서 메시야를 영접했던 것이다.


 2. 성서적인 사람이다 (43-45)

 언제나 성경을 많이 읽고 사모하는 생활이 없이 도저히 영계 생활은 보존할 수가 없다. 그들은 성경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성경에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정도의 지식을 가지되, 동정녀 몸에 탄생한다는 것(사7:14), 베들레헴에 난다는 것(미5:2), 갈릴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사9:1-2), 이와 같은 성경을 절실히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메시야의 역사는 예루살렘에서가 아니고 갈릴리 해변에서부터 날 것을 특히 깨닫고 지금 우리가 재림의 주가 올 때는 동방에서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듯이, 메시야가 올 때에 갈릴리 해변에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철저히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볼 때에 자기네가 기다리던 메시야인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벳세다 동네의 어촌은 메시야를 고대하는 신앙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시야를 고대하는 신앙 양심에서 두텁게 사귀어졌던 친구들이다. 이 친구야말로 고락을 같이 겪는 영원한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많은 친구가 있지만 이와 같은 친구는 역사적으로 한 페이지가 되는 친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때에 동방에서 나오는 선구자의 한 단체가 나오는 것도, 사도와 같이 막역한 친구의 한 무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신앙적인 양심에서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친구가 메시야를 맞이하던 갈릴리 벳세다 동네의 친구와 같은 인연이 있게 될 것이다.


 3.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46-51)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는 메시야를 영접할 참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참 이스라엘을 찾기 위하여 벳세다 동네의 어부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모든 바리새교인들은 간사한 무리들이므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권리를 다투며 싸우는 무리였던 것이다. 이들도 메시야를 고대했던 것은 학과적으로 배우고 교리적으로 남을 가르치고 베들레헴에 난다는 것을 마2:4-6에 말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신앙은 교리만이 아니요, 양심이라고 보게 된다. 아무리 이들이 학과적으로 가르치는 무리들이나 한 교권과 명예의 감투를 쓰고 세상 안락에 마음이 어두워진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예루살렘을 찾아올 때에 그들은 오히려 헤롯과 같이 왕으로 나신 메시야를 죽이는 무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앙 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무리가 아니고 전부 간사한 거짓 선지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책망했던 것이다. 예수님도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까지 했던 것이다(요8:44).

 아무리 이스라엘이라 하여도 간사한 정욕이 있는 사람은 죽은 영이니 자동적으로 마귀의 자식이 된다. 신앙은 간사함이 없는 양심에서라야 이스라엘이라는 영적 사람이 될 것이다. 나다나엘은 비록 어촌에 사는 사람이지만, 날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았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은밀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양심의 사람이라야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이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 중에서 메시야를 영접한 사도들이요, 또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동방 땅 끝의 종들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갈릴리 벳세다 사람은 은혜시대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선구자가 되었고, 동방 땅 끝에 해변의 종들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진리 운동의 선구자라는 것을 성경은 가르쳤다. 그러므로 갈릴리 바다 옆의 어부들은 부활성도의 선구자요, 동방 땅 끝에 있는 종들은 변화성도의 선구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영접할 자의 자격과 재림의 주를 영접할 자의 자격을 논의한다면 다음과 같다. 동방 땅 끝에 종들이 일어남으로써 원수를 회삼물같이 짓밟고 나간다고 했고, 사41:8-25을 보면 분명히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라고 했고, 사9:1-2을 보면 갈릴리 바다 해변에서 일어나는 역사는 이방의 빛이 된다고 말했으니 이방의 빛이 되는 역사가 은혜시대 역사라면 이방 세력을 짓밟고 나가는 역사는 진노의 날에 남은 변화성도의 역사라고 본다. 그러므로 언제나 시대가 바뀔 때에 종은 선구적인 자격을 가져야 된다.


 결  론

 율법시대가 끝이 나고 은혜시대가 이루어질 때에 메시야를 영접한 사도의 인격은 율법시대의 영계에 선구자로서 은혜시대를 이루는 일에 처음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가장 복되고도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갈릴리 벳세다 동네의 어부가 된 일과 사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세계 만방에 기독교가 대 승리를 보게 된 일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재림의 주를 맞이할 변화성도의 인격이 이루어진 자로 새 시대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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