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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안식으로 들어갈 자의 두려워 할 일(히3:12-4:2)

운영자 2007.04.05 08:36 조회 수 : 1728 추천:231

 

안식으로 들어갈 자의 두려워 할 일

-히3:12-4:2-


 서  론

 안식을 향하여 가는 길은 싸우는 길이요, 환란과 역경을 통과하는 길이니 안식에 들어가기까지는 두려워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소망 없는 공포를 말한 것은 아니다. 소망이 확실한 사람으로서 두려워할 일을 말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군대가 원수에게 죽을까봐 무서워 떤다는 것은 실패의 근본이다. 그러나 승리를 이루지 못할까봐 떠는 마음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갈 때 나는 죽고라도 승리를 이루는 것을 목적한다면 이러한 군대는 강병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일 국의 영토를 위하여 싸우는 군대로서 목적을 위하여는 이루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요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확신하는 소망이 있다면 여기에 이르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일이 없이는 안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 들어간 줄 알고 잠자는 것도 잘못이요 목적을 향하여 가다가 원수가 무서워 후퇴한다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두려워할 것보다도 하나님이 두려워서 죽어도 나간다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식으로 인도하시는데 이 하나님을 순종치 않을 수 없다는데서 떠는 심정일 것이다.

 이제 두려워하는 자의 할 일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형제 중에 악심을 품고 떨어지는 자가 있을까봐 염려하라는 것이다 (12)

 우리가 만일 내가 죽을까봐 떤다는 것은 합당치 않지만 어떤 형제가 잘못될까봐 떠는 심정이 있다면 사랑의 양심에서 움직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종이 형제가 잘못되는 일을 보고도 안심하고 있다면 이것은 합당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양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항상 애타는 심정을 가졌다는 것을 늘 말한 것이다(히12:15).


 2. 유혹을 받아 강퍅해질까봐 조심해야 한다 (13)

 우리는 항상 유혹이 없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고 유혹이 있으나 피차 권면하여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한다는데 항상 형제 가운데 유혹이 있을까봐 조심하고 떠는 심정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가는 길이었으나 강퍅해지는 무리가 있으므로 수많은 대중이 재앙을 받고 화를 받은 일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14)

 아무리 확실한 소망이 있고 확실한 안식의 도리를 안다해도 끝까지 굳게 잡는 것이 없다면 하와가 말씀의 칼을 잡지 못하므로 떨어지듯이 굳게 잡는 자라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세 진리가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굳게 잡는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확실한 말씀을 주는 동시에 빼앗는 마귀도 대립을 시키는 것이다. 만일 확실한 것을 주고 빼앗는 대적을 두지 않는다면 누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15-1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하늘에서 나리는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셨으나 하나님을 격노케하는 원망이 있고 순종치 않을 때 전부 광야에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것은 말일에 안식에 들어가는 무리에게 준 교훈이다.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도 짐짓 말씀을 가감한다면 재앙을 받는다는 것이 계시록의 원 대지가 되는 것이다. 왜냐 할 때 하나님은 어느 민족보다도 야곱을 더 사랑해서 인도하는데도 불구하고 짐짓 순종치 않을 때 격노치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나오는 이스라엘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거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영적 이스라엘이 예언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다는 것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14:9-10에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는 자는 영원히 멸망이라는 것은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5. 안식에 미치지 못할까봐 떨어야 한다 (4:1-2)

 우리는 주님 다시 오셔서 들림 받을 때까지 가는 길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치고 들어가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40년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무리 중 여호수아 갈렙만 안식에 들어가고 육십만 대중이 다 쓰러진 것은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10:22-23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온다고 한 것은 온 세계 중 끝까지 행할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길을 떠나는 일도 해야할 일이나 목적지에 도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를 중요시 아니할 수 없다. 만일 이날까지 기독교가 내려오다가 말세 예언을 믿지 않고 망한다면 이스라엘 대중 60만명중 두 사람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도 시대적인 말씀을 믿는 것이니 말씀을 듣고도 화합지 아니하면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슬픔 중에 슬픔은 안식의 길을 가다가 끝을 맺지 못하고 쓰러지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사1:4).


 결  론

 우리는 소망있는 인간이라면 두려울 것도 없다. 아무래도 죽을 바에는 해본다는 발악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들을 황충이라는 것이다. 소망이 있고 두려워하는 일도 있고, 소망없이 공포중에 떨다가 죽는 일도 있고, 소망없이 발악하는 단결도 있고, 소망이 확실해서 용기를 내는 단결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려움이란 소망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떨어질까봐 두려워하며 화합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불길이 붙는 데서 한 생명도 잃을까봐 떠는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