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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룹바벨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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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하겠다. 다시는 죄짓지 않겠다 다짐을 하면 마귀는 곧 와서 놀린다. "내가 네 속에 선악과를 심어놨는데, 네가 될 것 같니?" ... 마귀는 와서 내 행위를 붙들고 강력히 참소한다. 여기에 잡히면 우린 곧 쓰러진다. 예배도 못 간다. 예배를 가더라도 설교중인 목사님과 눈 마주치기도 힘들게 된다.

 

그러나.... 믿음의 속사람이 일어서기 시작하면 달라진다.

 

"마귀새끼야, 네가 선악과를 심어놨다고, 네가 날 네 맘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 같니? 아나 여깄다! 예수님이 나를 선택하셨고, 피로 사 놓으셨고, 네가 심어놓은 정욕의 기질도 이미 다 뽑아 버리셨다. 뽑기로 작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뽑아 버리셨다. 이 더러운 마귀 새끼야! 뽑아 버리셨다는 그 믿음이 본질이기에 우린 오늘도 9.24 제단에 나와 새벽과 저녁마다 말씀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더러운 마귀야 더 이상 속이지 말고 꺼져 버려라!"

 

어릴적 힘센 놈한테 붙들려 매맞고 농락당하다가...  30 메타 전방에서 아빠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면 그 아이는 곧장 태도가 바뀐다. 자기보다 힘센 녀석에게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넌 이제 죽었다. 때리려면 때려봐, 임마!" 하면서 큰 소리를 치게 된다. 즉, 영적이건 육적이건 싸움은 아버지가 내 근처에 계시느냐, 멀리 계시느냐의 문제이다. 나 자신만 놓고 본다면 무슨 승산이 있겠는가?

 

우리는 새 일이 있기 때문에, 배짱있는 믿음이 와 있다. 원죄를 붙들고 늘어지는 악의 뿌리까지 불살라 버리는 새 일의 말씀이 있기에, 70년만에 바벨론이 망했다는 진리가 있기에 큰 소리를 칠 수가 있다. 미약한 야곱들은 예수님이 이겨놓으신 사실을 믿는 믿음 위에서 싸우는 것이지, 스스로는 마귀를 때려부술 자격도 힘도 없다. 아무리 시간을 줘도 그 자격을 못 갖춘다. 힘도 못 기른다. 우리는 마귀와 싸울 아무런 건덕지가 없다. 내 자신을 보면 낙망 뿐이다. 부실하다.

그러나 연대를 신뢰할 때 우리에겐 마귀조차 우습게 보이는 큰 믿음이 오게 된다.

 

120년이 선포되는 그날(창 6:3), 아직 세상은 120년이나 더 존재할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노아 가족 8식구만 생존해 있는 것이다. 창 6:3절이 임한 그날부터 말이다. 나머지는 이미 죽은 물귀신들이 가죽을 입고 걸어다니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는 눈이 본질을 보는 눈이다. 그러나 마귀는 이런 눈 가진 자를 제일로 미워한다. 120년이 시작된 그날이 120년이 끝나는 그날이다. 즉, 노아의 믿음이 본질이었음은 120년 뒤에 물에 퉁퉁 부어 널부러진 시체들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120년이 선포되던 그날로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자들이, 홍수를 이기고 산 자에게 다가와서 너는 무얼 짓고 있느냐고 비아냥거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도 현재처럼, 미래도 현재처럼 본질의 눈으로 꿰뚫을 수 있어야 한다. 노아를 비방한 그들을 보라! 앞으로 홍수에 죽을 것들이 와서 비아냥거린 것이 아니다. 이미 홍수에 죽은 자들이 와서 비아냥거린 것이다. 그들이 방주 짓는 노아를 비아냥거린 것은 노아처럼 믿음으로 본질을 살지 않고, 육안으로 현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현상(바라는 것들)은 본질(믿음)의 부산물이 아닌가!

 

빌라도도 그랬다. 그는 예수님께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큰 소리쳤다(요 19:10). 천만에....... 빌라도에겐 예수를 놓을 권세도 죽일 권세도 없었다. 그는 본질(절대자의 권세)은 못 보고 현상(세상 권세)만 보고 있었다. 그는 권세를 가지긴 커녕 예수님이 짜 놓은 각본 내에서 움직이는 엑스트라 배우에 불과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본질)의 진실이 넘쳐났다. 너무도 진실하여 거짓된 세상이 절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본질말이다.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현상을 사는 사람들에겐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꼴뵈기 싫고 짜증나는 법이다. 왜냐? 그 하시는 말마다 신빙성이 없고 비겁해 보이기 때문이다. 빌라도 명령 한 마디에 죽기도, 살기도 할 놈이 마치 의를 위하여 스스로 죽는 듯 잘난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진짜 신이면 그따위 말은 집어 치우고 좀 시원스럽게 보여주라는 것이다. 남자답게, 지도자답게, 당장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켜 보라는 것이다. 당장 임금에 즉위해서 권세를 행하라는 것이다. 로마를 쫓아내라는 것이다.

 

눅 19:11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말세 복음을 받은 우리들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과거의 친구나, 중고교, 대학 동기, 직장 동료들을 만나 천년왕국과 주님의 재림을 얘기해 보라! 친구이니까 들어주기는 하되 보이는 반응들이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네가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은 참으로 보기 좋다. 사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건 자기 하는 일에 행복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우려되는 것은 네가 그러는게, 네가 몸담은 그 교회와 그 가르침이 정말로 진리이기 때문이니, 아니면 네가 사회에서 낙오되고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교회로 도피하는 것이니?.... "

 

이런 식이다. 그러면서 달콤하게 속삭인다. 예전의 네 모습이 좋았다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지금 넌 분명 뭔가를 놓치고 있다고...  예전의 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한 마디로 말해, "보여주라"는 것이다. 멋진 직장에 취직해서 뛰어난 연봉을 받으면서도 충분히 종교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능력이 없으니 종교에 심취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어 못하면서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척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 각층의 유력자들과 교제하고 사귀어 나가면서도 주의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주의 일이 더욱 부흥될 것인데, 왜 그 길을 택하지 못하고 쭈그렁방탱이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열심히 사는 듯 행동하는 것은 비겁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현실 부적응>과 <사회 낙오>를 감추려고 종교를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낙오된 모습을 은폐하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얘기만 늘어 놓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상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하는 말들이다. 저 말들을 할 때 매우 위해주면서 한다. 얼마나 걱정을 해 주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가?

 

그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숨이 막혀 온다. 매우 힘들다. 그들이 가진 그 자리의 기세를 미약한 야곱들은 이길 수 없다. 신뢰하던 가족들도 이렇게 말한다.

 

"제발 밖의 사람들 만날 때는 그 성경 얘기좀 하지 마라! 오랜만에 만났으면 그들 마음도 맞춰주고, 그들 얘기도 들어주고, 앞으로 좋은 관계 유지해나갈 생각을 해야지, 왜 맨날 성경만 말하고, 천년왕국, 무신론 공산주의 그런 것들을 말해 오해받고 꺼림받느냐.... 제발 부탁이니 현실감좀 있게 살면 안되겠느냐?" ....

 

이것이 말세 종들의 부모, 아내, 남편, 자녀들이 하는 말이다. 왜 자꾸 '천국'도 아닌 '천년왕국'을 얘기하며, 케케묵은 '공산주의' 같은 걸 말하냐고.... 왜 스스로 이미지를 깎아 먹느냐고..., 제발 이미지 관리좀 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본질 관리> 하지 말고 <현상 관리>좀 하라는 것이다.

 

안 그래도 힘든데, 함께 사는 사람들마저 도와주지 않는다. 가족만은 내 편인 줄 알았는데, 가족들은 사실 남들 앞에서 나를 창피해 했던 것이다. 남들과 만나 입만 열면 또 성경 얘기 할까 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그 입좀 닫아 달라고 눈빛으로 애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심겨져 있는 천년왕국의 믿음의 씨앗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현상을 사는 자들은 믿음으로 본질을 추구하는 자들을 우습게 여기고 격하한다.

 

공생애 3년을 앞두고 사십일을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께 마귀는 어김없이 찾아왔지 않는가! 본질을 이루시려고 싸우고 계신 분 앞에 현상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마 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현상은 언제나 본질보다 달콤하고 그럴 듯하다. 그래서 유혹이다. 본질보다 앞선 현상은 무조건 유혹이다. 학생이 본분대로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좋은 성적이 나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공부의 부산물인 성적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갈 땐, 그 학생이건 그 부모건 모두 유혹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현상에 유혹되지 말고 본질만을 바라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 4:4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현상)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본질)으로 살 것이라"

 

1등 종 바울도 기록한 말씀(본질)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당부했다(고전 4:6).

 

우리는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여 주시는(슥 3:9) 그 날을 소망하며 세상을 살되, 육안으로 보이는 것(현상)이 우선이 아니라 하늘의 것(본질)이 실체요 우선임을 아는 영안의 눈을 가져야 한다.

 

사 11:3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오직 말씀만을 좇아가야 한다. 이러한 자들을 불러모아 마귀와 그 열매된 이 바벨론 세상을 쳐부수라고 예수님은 1974년 9월 24일에 학개서에 예언된 "만국의 보배가 임하실 제단"을 세우셨다(학 2:7). 1975년도를 70년의 회복점으로 정하시고, 이날부터 영적 유다를 진리(본질)로 해방시켜, 마귀와 그가 들어쓰는 바벨정권과 바벨교권에 대하여 승리하였다는 승리의 은빛 십자가를 세워 주셨다.

 

이사야 8:4절의 성취로 유다의 원수 두 나라(북한, 중국)를 패망시키셨고, 히스기야 14년에 이루어진 이사야 37:36절로 러시아 군대를 패망시키셨다. 그러므로써 영적 유다(한국)를 둘러싼 무신론 공산국가들을 모두 쓸어 버리셨다. 2천년 전 처녀잉태와 1975년도의 풍년 징조는 쓸어 버렸음을 믿으라고 주신 보증수표이다. 현상적으로 임하기 전, 본질적으로 보라고 1975년도부터 풍년이 임하는 것이니, 풍년을 기점으로 그보다 앞선 1974년 9.24와 1975년 5.15에 감사할 줄 아는 자들이, 장차 임할 초막절의 가시적 승리를 보고 기뻐하는 자들보다 영계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 4:7절에는 두 부류의 영계가 나온다.

 

1) 머릿돌을 내놓는 '스룹바벨'과

2) 큰 산이 머릿돌 권세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 "은총, 은총" 하며 나오는 대중이다.

 

'스룹바벨' 단체는 본질을 이룬 단체요, "은총, 은총" 하며 나오는 자들은 본질에 딸려오는 부산물(가시적 승리)을 보고 환호하는 단체이다. 가시적 승리에 환호할 줄 아는 것도 복되지만, 가시적 승리가 임하기 수십년 전부터 그 승리를 앞당겨 전도하는 무리는 더욱 복된 것이다.

 

당신은 보아야 박수치는 대중의 편인가? 보지 않고도 박수치며 감사하며 다시 예언하는 선구자의 편인가?

 

선구자의 길을 가려거든 오늘부터 1975.5.15 승리기호를 가슴에 새기고, 본질만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나약한 육신에서 빚어지는 원죄의 열매들을 붙잡고 참소하는 마귀를 이길 수 있다. 그 마귀가 싫어하는 다시 예언 사업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사명자는 새벽마다 스룹바벨 제단에 내려주시는 하늘 만나를 먹어야 한다. 저녁마다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사명에 따라 전도해야 한다. 그렇게 내 몸과 시간으로 제단을 섬길 때 우리에겐 강력한 마귀 참소가 따라붙어 우리의 영계는 상승될 것이다. 우리는 1974년에 세워주신 9.24 제단에 감사하며 이미 이겨 놓은 마귀와 날마다 싸우자! 피흘리기까지 싸우자! 싸우다 넘어지면 이겨 놓으신 그분이 와서 일으켜 주실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에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질 때,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쳐서 다리를 위골시키셨다(창 32:22~25). 그러면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고쳐주셨다(창 32:28). 이 새 이름을 받은 그날 새벽, '현상'(팥죽)만 추구하다 한을 품고 '야곱'을 죽이겠다고 독기를 품었던 '에서'의 마음은 다 풀려진 것이다. '야곱'은 비록 미약했으나 '본질'(축복의 언약)을 갈망했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승리한 것이다.

 

우리 9.24 제단도 1974년 9월 24일, 온 세계 영적 이스라엘 중에 유일하게 피택받아 역사적인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이름을 받았으니(사 8:1~4), 바로 그날 붉은 팥죽과 같은 물질(현상)만 추구하던 무신론 유물사관 북방 세력은 영적 유다 한국 앞에 다 녹아 풀어헤쳐진 것이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오면 참으로 기쁘다! 참으로 발걸음이 가볍다. 참으로 할렐루야가 터져나온다. 아무리 마귀가 미워하여 넘어뜨려도 주님은 이 믿음 가진 자들을 철저히 보호하며 일으켜 주실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

 

시 17:11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마귀의 종들)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 뜨리려 하나이다"

 

시 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118:13 "네(마귀의 종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시 145:14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짓눌린 자=거꾸러진 자=the people bowed down)를 일으키시는도다"

시 146:8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
(=짓눌린 자=거꾸러진 자=the people bowed down)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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