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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세기 공산주의 대학살 연대기(年代記)④

운영자 2005.10.04 07:55 조회 수 : 1905 추천:273

 
[특집] 20세기 공산주의 대학살 연대기(年代記)④
written by. 김필재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 대학살(The Killing Field)

 "우리는 그동안의 투쟁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모든 것을 단절하고 전통은 사라질 것이다. 화폐와 경제체제가 사라져 국가가 인민들의 모든 것을 돌보는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캄보디아 건설을 위해 수도에 있던 3백만의 인민을 농촌으로 분산시켰다. 이제 농촌은 혁명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며 인민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될 여러 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1984년 폴 포트, Grant Evans & Kelvin Rowley 共著, `Red Brotherhood at War`)
▲폴 포트

 1975~1978년까지 캄보디아에서는 공산혁명 결과 200만 명 넘는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 기간동안 캄보디아는 혁명지도부와 그 하수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일만 하는 동물이나 다름없었다. 역사학자들이 1975년 4월 17일 프놈펜 점령 직후 캄보디아의 2천년이 넘는 역사는 끝났다고 밝혔듯이 공산 혁명은 캄보디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공산주의의 대학살로 얼룩진 캄보디아의 비극적 현대사는 크게 5단계로 나누어진다. 1단계(1953~60년대 말)는 1953년 독립한 뒤부터 시아누크(Norodom Sihanouk*82세)국왕이 중립 정책을 펴면서 미국과 갈등을 빚은 시기다. 2단계(1970~75년)는 프놈펜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시아누크 국왕이 물러나고 론 놀(Lon Nol)장군의 친미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메르루주 군과 내전을 벌인 시기다.
 폴 포트 등 대학살 주동자 대부분 프랑스 유학 출신
 3단계(1975~78년)는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이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군에 함란된 후부터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폴 포트 정권이 몰락하기까지의 살벌했던 기간이다. 4단계(1979~91년)는 10만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뒤 헹 삼린, 훈 센의 친 베트남 정부군과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던 시기이다.
 5단계(1991~현재)는 파리평화협정 쳬결뒤 U. N 평화유지군 1만 6000명이 포함된 유엔 캄보디아 임시행정청(UNTAC)의 선거 감독 아래 프놈펜에 연립정부가 들어선 후 잇단 정치 불안 속에 1997년 훈 센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다.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동자인 폴 포트(본명 ‘살로트 안사르’*1925∼1998), 키우 삼판, 이엥 사리를 비롯한 크메르루주의 지도자들은 식민지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택동 주의에 기울어 있던 이들은 시아누크 국왕체제에 불만을 품고 1960년대 후반부터 캄보디아-베트남 접경지대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러다 친미 성향의 론 놀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이에 대해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친공반미(親共反美) 성향의 시아누크 국왕
 캄보디아가 이처럼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공산화 된 데에는 시아누크 국왕의 ‘친공반미’(親共反美)적 성향도 한몫을 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크메르루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나는 불교신자지만 부패하고 친미 허수아비인 론 놀 치하의 불교국 캄보디아 보다는 정직하고 애국적인 붉은 캄보디아를 택하겠다.”(1973년 7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
 미국은 1970~75년 기간동안 캄보디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18억 5000만 달러어치의 군사경제 원조를 퍼부었다. 그러나 론 놀 정권의 부패한 장군들은 미국의 원조를 캄보디아의 발전에 쓰지 않았다. 부패와 내전으로 경제는 더욱 나빠졌다. 1973년 한 해의 인플레 275%에 이르렀을 정도다. 그럴수록 론 놀 정권은 美 원조에 매달렸다. 당시 캄보디아는 국고 수입의 95%를 미국의 원조로 충당했다.
 폴 포트, 스스로를 열렬한 모택동 주의자로 소개
▲폴 포트(크메르루즈)는 1975년 정권 탈취 후 3년8개월 동안 무려 200만이 넘는 무고한 캄보디아 주민들을 학살했다. 사진은 ‘뚜올 슬렝’ 감옥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골이다.

 한편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동자로 자신을 ‘모택동 주의자’라고 여겼던 폴 포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프랑스계 학교에서 교육받고 정부 장학생으로 1948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는 1950년 여름 방학에 유고슬라비아에서 노력 봉사활동을 하면서 공산주의자인 조시프 브로즈(Josip Broz, 티토의 본명)에 매료 된 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1952년 캄보디아로 귀국한 폴 포트는 지하공산당 운동을 벌이다 ‘붉은 크메르’라는 뜻의 ‘크메르루주’라는 공산게릴라군을 조직, 1967년 시아누크 정부에 대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하편 론 놀 장군은 도피할 때 가지고 간 거액의 달러뭉치로 하와이에 저택을 장만했다. 1년도 못돼 캄보디아 서북부 몇 개 주(州)를 장악한 폴포트는 1975년 4월 17일 수도인 프놈펜에 입성, 혁명정권의 최고 지도자로 3년 7개월 동안 ‘피의 통치’를 했다.
 당시 폴 포트는 두 부류의 적을 설정했다. 먼저 내부의 적은 폴 포트 정권에 저항했던 사람들로 크메르루주 군은 이들을 적발하는 대로 처형했다. 외부의 적은 크메르루주식의 공산주의*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미국과 같은 자유진영의 국가였다.
 크메르루주, 농민이 안경 썼다는 이유로 학살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공산주의, 민족*민중주의를 축으로 자본주의나 외세에 연 계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는 폐지되었고 수도 프놈펜의 시민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화폐제도는 폐지됐고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파되고 집단 농장이 곳곳에 세워졌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 대상이었다.
 과거 6*25 전쟁당시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손을 보고 손바닥에 못이 배기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부르주아로 몰아 본인과 가족까지 학살했다. 크메르루주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 구덩이에 생매장시키고 우물에 처넣기도 했다. 심지어 일자무식의 농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으며 국제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 2천명이 학살되기도 했다.
 크메르루주 군은 캄보디아의 중산층은 모조리 처형했던 것이다. 크메르루주 군의 손으로 넘어간 캄보디아는 모든 형태의 종교가 조직적으로 말살되었다. 불교 사찰들과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가톨릭교회들은 파괴되거나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바뀌었다. 특히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 기간에 순교했다.
 당시 캄보디아 내의 기독교인 수는 약 1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90%의 기독교도들이 폴 포트의 추종자들에게 처형당했으며 종교적인 관습과 가르침이 금지됐다. 프놈펜의 가톨릭 성당과 바탐방의 캄보디아 복음교회가 폐쇄됐으며, 수천 명의 난민들이 태국국경으로 탈출했다.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이 ‘앙카르’(Angkar)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앙카르’는 캄보디아 말로 ‘상부조직’이란 뜻으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 권위를 의미했다.
 1만 5천명의 캄보디아 젊은이들이 대학살의 주역
 한편 이와 같은 광란의 주동자들은 1만 5천명의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홍위병처럼 15세 이하의 소년들이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과 붉은 혁명 사상으로 무장되어 크메르루주 군의 잔인한 살인광풍에 앞장섰던 것이다. 크메르루주 치하의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곳이 프놈펜 시내에 자리 잡은 ‘투올 슬렝’(Tuol Sleng) 감옥이다.
 이 감옥은 원래 여자 고등학교 건물이었는데 감옥으로 개조하여 심문실, 고문실, 유치실로 만들어 혁명정권의 악명 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되었다. 크메르루주 군이 남기고 떠난 서류뭉치와 흑백 필름으로 미뤄볼 때 모두 1만 6000명이 이 감옥을 거쳐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자술서에 3명이 동조자 이름을 써야 했다. 이런 식으로 잡혀온 사람들은 다시 다른 3명을 끌어들여야 했다.
▲캄보디아에는 현재 1000만개 이상의 지뢰가 각지에 매설되어 있다. 사진은 지뢰를 밟아 불구가 된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실제로 크메르루주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1978년 5월 27일 하루 동안에만 582명이 처형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 감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지 10여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투올 슬렝의 자가 발전기 기술자, 폴 포트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 그리고 폴 포트의 흉상을 만들었던 조각가등이다. 현재 투올 슬렝감옥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시체를 발굴한 구덩이와 위령탑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 위령탑 안에는 발굴된 시체들의 두개골이 안치되어 있다.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 150~200 만명 학살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이어진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 됐는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캄보디아에서는 1962년 인구조사를 실시한 이래 내전이 계속된 1980년대 내내 인구조사작업을 하지 못했다. 1979년 단숨에 태국으로 달려가 캄보디아 국경의 난민촌에 자리를 잡은 키어넌은 난민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인터뷰 자료들을 모았고 그 자료들을 근거로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 무려 150~20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했다는 논문과 기고문을 남겼다.(Ben Kiernan, ‘Genocide and Democracy in Cambodia’, 1993)
 이외에도 미국과 네덜란드 자금으로 세워진 ‘캄보디아기록센터’의 크레이그 애치슨도 희생자 규모가 200만이 넘는다고 주장했다.(Craig Etcheson, ‘The Rise and Demise of Democratic Kampuchea’, 1984)
 한편 일생동안 학살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던 폴 포트는 1979년 캄보디아가 친(親)베트남군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되자 총리에서 사임한 뒤 게릴라전을 재개, 1982년 크메르루주 최고사령관이 되었다가 1985년 공식적으로 지도자 직에서 물러났다. 정부군의 소탕작전과 내분으로 크메르루주가 약화되던 중 1997년 부하들에 의해 체포*자택 연금되었다가 1998년 사망했다.
 현재 살아있는 크메르루주 주요 간부 가운데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現 훈 센총리로부터 정치적 사면을 받아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을 통해 캄보디아가 내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가장 큰 이유는 여전히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konas)
 김필재 (코나스 객원기자)

2005-09-18 오후 3:23:4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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