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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룹바벨선교회

일반 스탈린과 흐루시쵸프

운영자 2010.02.14 14:22 조회 수 : 2274 추천: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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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북한방송 http://www.fnkradio.com

사회주의 변혁 그 현장속으로 자유북한방송은 매일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11750KHz를 통해, 저녁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7585KHz를 통해,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7530KHz를 통해 하루 5시간 방송됩니다.

    -차 례-

[소련편] 1.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

[소련편] 2. 전쟁영웅 스탈린의 실체는 독재자

[소련편] 3. 흐루시초프의 역사적인 등장

[소련편] 4.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남은 사회주의 국가는 몇개일까?

김기혁: 안녕하십니까? 의 김기혁 입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물결치듯 연이어 일어난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많은 우리 북조선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북조선 내에서는 자세히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그러나 중국을 나와서, 그리고 남조선에 들어와서 전해 듣게 된 사회주의 나라의 붕괴 이야기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체제가 와해되서 사라진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야기들을 살펴보고자 마련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북조선 내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사회주의 붕괴의 현장을 살펴보고, 또 그 가운데에서 우리 북조선 인민들이 새겨들을 만한 점도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제 방대하고도 엄청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데 도움을 주실 선생님 한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남조선의 대학원에서 우리 북조선을 전공한 김수연 씨입니다.

[소련편] 1.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

김기혁: 지난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의 김기혁 입니다. 제 옆에는 사회주의 변혁의 현장을 함께 누빌 김수연 씨가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김수연: 네, 안녕하세요? 김수연입니다.

김기혁: 네, 지난주에는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서 사회주의권의 범위와 현황을 크게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었죠. 1917년 소련을 시작으로 한때 16개 정도의 사회주의 국가가 생겨났다가, 그 중 11개가 이미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로 돌아섰다는 이야기. 그리고 현재까지 남은 사회주의 나라는 중국과 윁남, 쿠바, 라오스, 그리고 북조선 이렇게 5개 나라가 남아있지만, 모두 엄격하게 봐서는 사회주의 국가로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나눠봤었습니다.

김수연: 네, 또 우리 북조선 인민 여러분들께 정확한 정보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눠봤었죠.

김기혁: 네, 그럼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김수연: 네,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 대표적인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의 지도자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까 하는데요, 1917년에 있었던 러시아혁명부터 연방이 해체되는 1991년까지 따지면 소련이 유지됐던 시간이 75년 정도가 되거든요. 그럼 혹시 그 동안 몇 번 지도자가 바뀌었는지 아세요?

김기혁: 글쎄요, 소련의 지도자하면 딱 생각나는 게 소련을 건국한 레닌하고 2차세계대전을 승리에로 이끈 전쟁영웅 스탈린 그리고 레닌과 스탈린의 업적을 무자비하게 짋밟아 버린 후르시초프, 소련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고르바초프 정돈데, 몇 명 정도가 되나요?

김수연: 네, 이걸 따져보려면 먼저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있는데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이라는 이름처럼 소련은 동유럽에서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에 있는 15개 나라가 합쳐져 있었던 나라잖아요. 이들 나라가 모이게 되는 소련 연방 최고 회의의 의장이 있었는데요, 그러나 의장의 실권은 많지 않았구요, 실질적인 최고 실권자는 공산당 서기장이었다고 합니다.

김기혁: 아, 그렇군요. 행정책임자가 권력을 가진 게 아니라, 공산당서기장이 권력을 행사 했다는 소리이군요.

김수연: 네, 그래서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 볼 소련의 지도자는 공산당 서기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는데요, 1917년 건국부터 1991년 소연방의 해체 때까지 총 6명이 소련의 서기장을 역임했습니다.

김기혁: 아, 6명이나 되는군요. 그럼 본격적으로 한번 살펴볼까요? 그럼 최초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잘 알려진 레닌인가요?

김수연: 아, 여기서 레닌은 좀 예외적인 사항인데요, 당 서기장이라는 자리가 시작된 것은 1922년 스탈린 때 부터였구요, 레닌은 10월혁명 성공 후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이름을 활동을 했습니다. 레닌은 방금 말씀드렸던 1917년 10월혁명, 즉 러시아혁명의 중심인물이자, 마르크스주의의 사상과 이론을 계승 발전시킨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죠. 레닌은 1917년부터 24년까지 8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켰는데요, 1919년에는 코민테른을 결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만, 1922년에는 뇌출혈이 발작하고, 마지막 1년은 실어증까지 겹쳐서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김기혁: 예 사실 레닌은 맑스의 공산주의이론을 현실화 시킨 인물이죠 그래서 북한에서 김일성주의가 공식화하기 전까지만해도 막스레닌주의가 통치이념이였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북조선 평양에 있는 김일성 광장에는 레닌의 초상화가 김일성 초상화와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김수연: 네, 레닌 다음으로 서기장이 된 인물은 역시 잘 알고 계시는 ‘스탈린’입니다. 스탈린은 레닌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1922년부터 53년까지 장장 3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기장을 역임했는데요, 이 시기는 세 차례의 5개년 계획을 통해 소련의 강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형성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34년 말부터 1938년까지의 대숙청을 통해 독재정권을 확립하고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발언을 막았죠.

김기혁: 북에서는 스탈린이 사람을 선대 수령의 위업을 휼륭히 계승한 공산주의자 그리고 2차세계 대전을 승리에로 이끈 전쟁영웅 또 소련을 사회주의 강국으로 만든 위대한 영도자로 되어 있는데 이런 이야기만 듣다가 나와서 보니까 히틀러에 못지않게 스탈린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독재자로 꼽히고 있더라구요.

김수연: 그죠. 스탈린의 독재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하겠는데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아무튼 스탈린은 1945년에는 대원수가 돼서 그 명성은 레닌을 능가하게 됐구요, 미국과 대항함으로써 냉전의 중심인물이 됐습니다. 그러다가 1953년 역시 뇌출혈로 세상을 마감하게 됩니다.

김기혁: 대원수라고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김일성이 대원수 칭호 를 받기 전에 세계적인 대원수하면 스탈린 한사람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스탈린 대원수라는 노래 까지 지어 불렀습니다.

이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둘다 뇌출혈로 세상을 떴네요. 공산주의 혁명 때문에 매일 머리가 아파서 그랬을까요?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김수연: 그러게요 자 다음으로 넘어갈까요? 스탈린 다음은 53년부터 64년까지 서기장을 맡았던 흐루시초프입니다. 북조선에 계실 때 흐루시초프에 대해서는 어떻게 배우셨어요?

김기혁: 흐루시초프는 북조선에서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권력 승계문제에 일조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권력 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소련의 실례를 들었는데요 레닌과 스탈린을 공격한 흐루시초프를 통해서 혁명위업계승을 잘못하면 혁명이 망친다, 그래서 김일성의 혁명위업을 휼륭히 계승할 사람은 김정일이다, 이렇게 몰아 갔지요.

김수연: 흐루시초프 하면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이 스탈린 비판 덕분에 그동안 소련에 눌려있던 동유럽 국가들이 일어나는 등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김기혁: 흐루시초프 얘기를 하니까요, 뭐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북조선에도 이런 지도자가 하나만 나왔어도 지금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수연: 그랬겠죠? 흐루시초프 시대는 ‘중소논쟁’ ‘헝가리 반소운동’ 등 사회주의 진영의 균열이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좋은 일을 한 셈이죠.

김기혁: 그렇군요, 자 흐루시초프가 세 번째 지도자인가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볼까요?

김수연: 네, 흐루시초프가 실각된 것은 1964년인데요, 그 뒤를 이어 5번째로 브레주네프가 집권하게 됩니다. 브레즈네프는 1964년부터 82년까지 16년동안 소련을 지배하게 되는데요, 북조선에 계실 때 브레즈네프에 대해 들어보신 거 있으세요?

김기혁: 네, 워낙 오랜기간 집권을 했기 때문에 언론에 자주 오르락내리락 했구요, 또 김일성의 저작선집에도 많이 등장했던 인물이죠.

김수연: 그렇군요. 브레즈네프는 국내적 안정을 추구하면서 공세적인 대외정책을 펴게 됩니다. 먼저 대외적인 것을 살펴보면요, 사회주의 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하고 제3세계의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하는 데 주력했구요, 또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는 등 전 세계에 걸쳐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김기혁: 브레즈네프가 한 선언인가요?

김수연: 네, 이 선언의 내용은요, 사회주의 진영의 어느 나라든 그 생존이 위협받았을 때는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대한 위협으로 보고 다른 사회주의 국가는 이에 개입할 권리를 가진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실제로 소련은 이 선언을 활용해서 동유럽의 많은 나라들을 간섭하게 되죠.

김기혁: 밖에서는 그랬고, 아까 국내적으로는 안정을 추구한다고 했는데, 실질적으로는 안살림을 잘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김수연: 네, 브레즈네프 시대는요 이른바 로 평가받고 있기도 한데요, 정제성장률이 둔화되고, 소비재가 부족해지고, 지나친 관료화에 과학기술의 비효율적인 발전 등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시대 동안 쇠퇴해져간 소련은 정치적으로도 더 비관적으로 변해가게 되는 것이죠.

김기혁: 음, 이때부터 소련이 기울기 시작했다고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브르즈네프 시기 소련은 미국과의 대결구도를 우주개발, 해객발을 통해 우위를 점하려고 했고, 무리한 재정을 투입해서 소련겅제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근본요인이 됐다고 들었거든요.

김수연: 왠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무리하게 선군정치를 하고 있는 북조선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기혁: 비슷한것이 아니라 꼭 같다고 생각이 들고요 하지만 북조선이 좀더 심각하다고 봐야 겠죠.

김수연: 그렇죠. 1982년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이어서 안드로포프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이 사람도 2여년 후인 84년에 사망하게 되구요, 또 뒤를 이은 체르넨코도 1여년을 못 채우고 역시 사망하게 됩니다. 두 사람 다 뭔가 변화를 일으키고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죠.

김기혁: 1970년대부터 서서히 기울어간 소련이 1980년대도 제대로 대처를 잘 못하고, 음.. 제가 북에 있었을 때는 뭐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없으니까 그냥 계속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김수연: 네, 계속 정체되고 쇠퇴되는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사회주의권을 뒤흔드는 역사에 일조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입니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에 취임해서 1990년 대통령 취임을 거쳐 소연방이 붕괴되는 1991년까지 소련을 이끌어가게 되는데요, 혹시 북에 계실 때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김기혁: 아뇨, 북조선에서 그런 정치적 용어들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김수연: 페레스트로이카는 개혁을 뜻하는 말이구요, 글라스노스트는 개방을 뜻하는 말인데요, 고르바초프가 이것을 기반으로 한 개혁정책을 펴면서 소련은 급속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사실,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바랬던 것은 아니었는데요, 이로 인해 동유럽에 자유화물결이 일어나면서 소련 내에서도 뜻하지 않은 변혁의 물결이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사실, 소련하면 역사로보나, 크기로 보나, 힘으로보나 미국과 대치하는 사회주의권의 최고의 대표였잖아요. 1992년이면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는데요, 그 거대한 소련이 붕괴된다고 해서 세계가 술렁거렸던 그때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김기혁: 아무 소식도 못 들었던 북조선 내에서도 뭐 이유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소련이 붕괴됐다는 사실에 인민들이 엄청 놀라고, 또 허탈감을 느끼기도 했는데요, 바깥 세상에서는 더 놀라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물론 소련이 갑자기 무너진 것은 맞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 조금씩조금씩 그런 순을 밟아오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김수연: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어떤 일이든 그 원인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소련의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경제난과 민족문제, 소련의 고립이라는 국제적 환경,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한계로 정리되고 있는데요, 간단히 살펴보긴 했지만, 소련도 중반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기혁: 네, 그럼 다음 시간에는 그런 것들을 자세히 알아보게 되는 거죠?

김수연: 네, 아까 살펴봤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주요 사건들이나 특히 의미있는 일들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더 아마도 우리 북조선 인민들도 많이 궁금해 하실 내용이 아닐까 하는데요.

김기혁: 말씀을 듣고 보니, 벌써부터 다음시간이 기다려지는데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고요. 다음 시간에 찾아뵙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김수연: 네, 감사합니다.

[소련편] 2. 전쟁영웅 스탈린의 실체는 독재자

김기혁: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의 김기혁 입니다. 모든 일에는 그 원인이 있듯이, 사회주의의 변혁에도 그에 따른 원인들이 있을 텐데요, 오늘도 청취자 여러분들과 함께 그 현장을 누비면서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역시 제 옆에는 이 시간을 함께 할 김수연 씨가 나와 계십니다.

김수연: 네,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어요? 김수연입니다.

김기혁: 네, 지난 주에는 우리가 소련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살펴봤었잖아요. 오늘부터는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들을 다루기로 했었죠. 자, 그럼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누구죠?

김수연: 네, 오늘부터 몇 회에 걸쳐 소련의 지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 껀데요, 그 첫 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바로 스탈린입니다. 스탈린은 레닌의 뒤를 이어서 1924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53년까지 장장 30여년 동안 소련의 서기장을 지냈던 사람이죠.

김기혁: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었지만, 스탈린 하면 제 기억 속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그리고 대원수로 기억이 나고요, 그리고 대원수로 기억이 되고 사후에 흐르쇼부에게 독재자로 낙인이 된 사람이죠. 자, 그럼 스탈린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김수연: 네, 그럼 기본적으로 우선 출생부터 살펴보죠. 스탈린은 그루지아공화국의 고리라는 한 작은 농가에서 1879년 12월 농노 출신의 구두직공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기혁: 아, 그럼 아주 빈농의 가정이네요.

김수연: 그죠. 성분은 아주 좋은 거죠.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고 하는데요, 아들을 신부로 만들고 싶어한 어머니의 정성으로 스탈린은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지만, 그는 곧 혁명운동에 참여하게 되구요, 이 때문에 신학교에서도 추방당하게 됩니다.

김기혁: 스탈린하고 김일성하고 많이 닮은 점이 있어요. 그러고보니 기독교집안이네요.

김수연: 사실, 레닌도 목사의 아들이었잖아요.

김기혁: 그런데 왜 그렇게 기독교를 부정을 했죠.

김수연: 그러게 말이에요. 그 후 1901년부터는 아예 직업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요, 혹시 스탈린이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닌 건 알고 계세요?

김기혁: 아, 그래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그럼 진짜 이름은 뭐죠?

김수연: 네, 스탈린의 본명은 요시프 주가슈빌리입니다. 스탈린은 라는 뜻을 가진 필명이었는데요, 1912년 당중앙위원이 되고, 중앙위원회인 의 책임자를 지내면서 그 때부터 이 스탈린이라는 이름을사용했다고 합니다.

김기혁: 강철의 사나이라, 참 이름은 멋진데요? 그래도 태양의 빗댄 김일성보단 낫네요.

김수연: 아, 뭐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그 이후 스탈린은 정치적으로 빠르게 성장해서 레닌의 뒤를 이어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게 되죠. 근데, 스탈린을 발굴했던 레닌도 사실은 스탈린이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은 걱정했다고 해요.

김기혁: 아, 그래요? 근데, 왜 그런 겁니까?

김수연: 네, 레닌이 남겼던 유서를 보면요, 그의 재능을 평가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난폭하다던지, 관용이 부족하다던지 하는 성격적 결함을 지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레닌이 누워 있을때는 이미 스탈린이 서기장에 올라있었는데요, 레닌이 의식을 회복했던 마지막 몇 주 동안에는 스탈린에 대해 더 가혹한 판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스탈린은 너무 난폭하다면서, 그를 서기장에서 해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좀 더 충성스럽고, 동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덜 변덕스러운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는 그런 말까지 남겼다고 하네요.

김기혁: 레닌도 스탈린을 경계했다니 이런 얘기는 정말 처음 들어보는 얘긴데요, 사실 레닌의 혁명위업은 스탈린에 의해 훌륭히 계승됐다 이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요, 김정일도 그렇지만, 독재자들을 보면 모두 정신이상적 병증상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나뽈레옹, 히틀러, 스탈린, 김정일 등 모든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다혈질의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죠.

김수연: 네, 그 독재라는 게 사실 쉬운 건 아니잖아요. 아무튼 스탈린 시대 하면 소련이 개발계획도 벌이고, 국제적 지위도 높아지는 등 여러 가지 달성을 이루지만요, 이러한 달성의 뒤에는 천만명에 가까운 농민들이 희생이 있었고, 또 소련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질 수 없는 대숙청의 공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김기혁: 사실, 북에 있을 때도 악랄한 독재자 하면 히틀러를 제일 먼저 떠올리고 했었는데요, 남조선에 와서 스탈린 역시 히틀러를 능가하는 독재자였다는 말을 듣고 정말 놀랐거든요.

김수연: 네, 실제로 스탈린에 대한 독재를 살펴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제일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1930년대에 벌어진 대숙청입니다. 당시 스탈린이 주도하고 있었던 농업의 집단화와 공업화는 농민뿐만 아니라 당내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농업을 집단화하는 과정에서 여기에 협조하지 않는 농민들은 체포되서 강제노동으로 돌려지거나, 아니면 부농으로 낙인찍혀서 처형당했다고 하거든요. 또 농민들은 자신의 가축들을 미리 도살했다고 합니다.

김기혁: 아, 네. 어차피 뺏기는 거니까 주기 전에 먹기라도 하자, 이런 마음이었겠군요.

김수연: 네, 그랬겠죠? 하지만 이런 극심한 반발이 있었어도 스탈린은 계속 설득과 강력한 철권정치를 쓰면서 집단화를 추진해나갔습니다.

김기혁: 지금 북조선 인민이 2천 3백만이라고 하는데, 천만명이면 정말 엄청난 숫자거든요, 음, 혁명에 반항하는 자는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처벌한다. 북조선과 비슷한 실례인데요.

김수연: 이런 스탈린의 철권정치에 대해 반항이 점점 높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드디어 ‘대숙청’으로 불리는 시대가 열리면서 1930년대 말 공포정치는 절정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1956년 2월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1936년에서 38년 사이에 과거 10월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들의 90%를 죽였고, 그 이후에 입당한 사람은 50%, 그리고 군장성급의 60%를 처형했다고 합니다.

김기혁: 진짜 끔찍한데요, 그러니까 이게 혁명에 방해가 된다고 처형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김수연: 네, 스탈린은 혁명에 방해가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지위가 높고 낮고를 떠나서 무자비한 처형을 단행했는데요, 특히 스탈린은 제일 큰 위협인 군대를 제거했습니다. 이로 인해 5천명이 넘는 고급장교들이 처형됐다고 하는데요, 이 숙청으로 5명의 원수 중에서 3명, 15명의 군사령관 중에서 13명, 85명의 군단장 중에서 57명, 195명의 사단장 중에서 110명, 406명의 여단장 중에서 220명이 처형됐다고 합니다. 실제로 스탈린에게 바쳐진 사형자 명단은 책으로 383권이었는데요, 모두 4천 5백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건 이제 군대의 얘기구요, 이 기간 사이에 숙청된 당원의 수는 최소한 160만명이 이르렀다고 하는데요, 서양의 통계에 의하면 약 700만 내지 800만명의 시민이 이 숙청의 직접적인 대상이 됐거나 친척이나 가족이 피해를 보는 영향을 받았다고 하네요.

김기혁: 듣고 보니까 정말 말 그대로 엄청난 대숙청이었네요. 이렇게 한 세대를 쓸어버렸으면, 이후에는 뭐 역사왜곡 같은 게 일어났을 것 같기도 한데요,

김수연: 네, 맞습니다. 당시 소련공산당사에 실려 있던 영웅들이 숙청으로 인해서 다 ‘인민의 적들’과 ‘외국의 간첩들’이 되어 버린 거잖아요. 그래서 스탈린은 그 사람들이 실린 사진들도 고치고, 역사적인 사실들도 바꿔서 1938년에 직접 책을 발간했다고 하는데요,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이 책이 유일하게 공인된 소련공산당사로 읽혀졌다고 합니다.

김기혁: 참 북조선의 역사와 어떻게 꼭 같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북조선에도 김일성에 의해서 종족들이 숙청이 됐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쓴 책, 글, 사진 이런 것들을 출판된 도서들에서 삭제해버릴 것이 당적으로 지시가 내려오구요, 그런 것이 1980년대, 90년대까지 쭉 내려왔습니다.

실례로 이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데요, 1997년에 남조선으로 오셨잖아요, 황 선생님이 북에서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도 지내시고 노동당 비서도 지니셨는데 황 선생님이 남조선으로 망명하신 후에 북조선에서는 황씨 여독을 뽑기 위한 대대적인 깜빠니아를 벌렸었습니다.

김수연: 정말 한번 거짓말을 하면, 끝도 없이 불어나는 것 같아요. 뭐 소련이나 중국 등 독재가 있었던 곳은 다 마찬가지였지만,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또 그걸 덮기 위해서 거짓말을 또 하고. 하도 많이 해서 제 생각에는 이제 자기네들도 언제 어디서부터가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헷갈릴 것 같은데요,

김기혁: 그렇죠. 북조선도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독재, 그리고 권력 승계 이런 것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역사왜곡이 이루어졌는데요, 소련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건 없거든요.

김수연: 비교도 안 될 것 같아요.

김기혁: 그렇죠. 그런 역사 왜곡. 이것은 독재가 종속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인데.

김수연: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지금부터 참 걱정이 됩니다.

김기혁: 그렇죠. 사후에 스탈린보다 더 엄혹한 평가가 내려지겠지만, 지금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참 고통의 연속이죠.

자, 이렇게 우리가 북조선 얘기도 했지만 스탈린도 참 말 그대로 인간백정이었네요, 이렇게 싹 쓸어버렸으니 이제 스탈린에 충성하는 충성분자가 들어왔을테고, 정말 스탈린 1인 독재가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북조선에도 8월 종파사건이라고 대숙청이 있었잖아요. 그 이후에 이제 김일성 1인 독재가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구요.

김수연: 이제 말씀하신대로, 이 바탕 위에서 스탈린은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요하기 시작하면서, 스탈린은 인간이 아닌 신으로 경배되기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설명도 하고 교육도 시켰지만, 방대한 비밀경찰기구와 감옥 및 강제수용소를 꾸려가면서 공포정치와 전제정치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게 됐죠. 그 당시 스탈린에 대한 호칭을 보면요,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 우리 아버지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또 자신의 흉상이나 동상, 초상들을 많이 만들어서 숭배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김기혁: 참, 북조선하고 너무 똑같아요. 사실 북조선이 더 심하지만 너무 똑같고. 또 우리 북조선만 그런게 아니었군 하는 생각도 들고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을 핑계로 한 개인이 자기의 일인 절대 권력을 잡기 위해서 700만이나 되는 인민들을 죽였다니, 그 자체가 정말 반인민적이네요.

뭐, 북조선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구요. 자신의 정권력를 위해서 수십만을 정치범수용소에 가두고 수백만의 인민을 무참히 굶겨죽이고 무려 7억 달러나 들여서 금수산 기념궁전을 꾸미고 자기의 아버지의 시신을 안치했잖아요. 이 모든 것이 독재를 위한 것이죠. 그 독재를 위한 것에는 수백만의 인민의 억울한 죽음이 따르고. 참 슬픈 일이죠.

김수연: 네, 이런 스탈린의 독재와 대학살은 그 다음 등장하는 흐루시초프에 의해 비판되면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 건데요, 최근에 나온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구소련이죠, 러시아의 주요 인권단체들이 스탈린의 숙청작업으로 희생된 130여만명의 명단을 최근에 공개했다고 합니다.

김기혁: 아, 그럼 인민들이 직접 조사해서 발표한 건가요?

김수연: 네, 그런 셈이죠. 이 명부는 과거 숙청을 겪었던 친척들을 조사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요, 이 단체의 대표는 권력이 견제를 받지 않는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정부와 사회, 그리고 세계에 경고하는 의미도 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 CD에는요, 스탈린의 사적인 지시로 목록에 올라 정치범 재판을 받은 4만 4천여명의 이름과 강제노동수용소에 대한 지도 및 통계도 들어있다고 합니다.

김기혁: 그래도 결국은 이렇게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는 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데요, 우리 북조선에도 인민들이 직접 역사를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는 그런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해봅니다.

김수연: 그럼요, 이제 머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인민여러분들이 더 힘내시고, 건강하셔야 겠죠.

김기혁: 아, 무서운 얘기를 하다보니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요, 자, 그럼 다음 주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나요?

김수연: 네, 다음 주는 스탈린의 뒤를 이은 서기장인 흐루시초프인데요, 오늘 한 이야기와 맞물려서 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기혁: 그럼, 한번 기대를 해 보구요,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주에 뵙죠.

김수연: 북조선 인민 여러분,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련편] 3. 흐루시초프의 역사적인 등장

김기혁: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의 김기혁 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제 옆에는 청취자 여러분들과 함께 사회주의 변혁의 현장을 누빌 김수연씨가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수연: 네, 안녕하세요? 김수연 입니다.

김기혁: 네, 자, 우리가 지난주에는 히틀러만큼이나 지독한 독재자 스탈린에 대해서 알아봤었죠. 제2차 세계대전 영웅의 실체가 사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충신들까지 마구 숙청시킨 독재자였다. 개인적으로 참 저에겐 충격적이었어요.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북조선의 청취자분들도 그러셨을 거란 생각이 들구요.

김수연: 참 이럴때면요, 우편이나 전화가 되서 북조선 인민 여러분들께 직접 질문도 받고 의견도 듣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집니다.

김기혁: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북조선의 청취자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그 날을 기약해보면서, 자, 그럼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김수연: 그럴까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소련의 지도자 시간 두 번째로 흐루시초프에 대해서 좀 살펴볼까 합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휴전을 향해 막바지 고비에 이르렀던 1953년 3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마침내 사망하게 되죠. 그 후 소련에서는 권력의 계승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다가 차차 흐루시초프가 제1인자로 부상하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흐루시초프는 1964년 10월에 실각할 때까지 11년 반에 걸쳐 소련을 통치하게 되죠.

김기혁: 저번에도 말씀드렸었지만, 왜 흐루시초프 하면 레닌과 스탈린을 이은 혁명위업계승을 망친 수정주의자, 야심가로 알려지고 있었는데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 이제 북조선의 청취자들도 저처럼 흐루시초프에 대해서 새로이 알았을 텐데, 외부에서의 평가는 어떤지 궁금하거든요?

김수연: 네, 흐루시초프의 등장은 사회주의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에서도 중대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만큼 의미를 두고 있는데요, 스탈린식의 전제정치를 거부한 것 외에도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 사이의 평화공존을 표방하고, ‘사회주의에로의 다양한 길’을 인정한 것을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기혁: 아, 그렇군요. 듣고 보니 참 큰 중요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수연: 그렇죠. 흐루시초프는 1894년 4월 우크라이나의 접경 지역인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친 뒤 목동생활을 했다고 하다가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직후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구요, 1930년대에는 모스크바의 당 조직으로 발탁되어 스탈린에 반대하는 세력의 제거에 앞장섰다고 하네요. 이 공로로 흐루시초프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당 제1서기로 발탁되면서 그의 정치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김기혁: 아, 스탈린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이 말은 북조선에 있을때도 들었던 이야기인데요. 북조선에서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는 충성을 하다가 그가 죽자 자기의 야욕을 드러낸 권력 야심가로 평가하고 있는데 아무튼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정적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선 것만은 사실이네요.

김수연: 그렇죠. 왜, 기억나세요? 스탈린이 좀 변덕스럽다고 했었잖아요. 이 스탈린은 한 때 이 흐루시초프를 숙청하려고도 했다고 하는데요, 다행히 위기를 면하고 스탈린 말기를 잘 버티다가 스탈린 사후에는 경쟁자들을 처리하고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권력의 정상에 근접하게 됩니다.

김기혁: 아, 흐루시초프도 숙청될 뻔 했었군요. 참 이 때 만약 흐루시초프가 숙청됐었다면 또 소련의 역사가, 아니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네요.

김수연: 그랬겠죠? 자, 드디어 195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공산당대회를 이야기할 차례가 됐는데요, 스탈린이 사망한 뒤 처음 열린 이 당 대회는 시 시대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당시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공산주의 운동의 세 지도자 스탈린, 고트발트, 도쿠다 규이치에 대한 묵념’을 제의하게 됩니다.

김기혁: 아, 대원수 스탈린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의 이름과 같이 불렀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격하가 아닌가요? 북조선을 생각해보면, 김일성, 김정일을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여긴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김수연: 그렇죠. 여기서 함께 불린 고트발트는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의 지도자였고, 도쿠다 규이치는 일본 공산당의 지도자였는데요, 스탈린의 이름을 이 사람들과 같이 불렀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인거죠.

대회 마지막 날인 2월 25일에 흐루시초프는 스탈린과 그의 전제 정권에 대해 선정적인 공격을 가하게 되는데요, 스탈린의 잔인성과 비인도성을 공격하면서 스탈린에 대해 강요된 ‘숭배’와 ‘신격화’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 지도를 1인 체제에서 다시 집단지도 체제로 돌이키고, 인민 생활 전반에 다시 레닌식의 민주주의가 깃들 수 있도록 혁명적 사회주의의 법률을 되찾아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기혁: 공산당이 독점하는 사회에서 살아봤던 저로서는 30여년 동안이나 그 사회가 숭배해왔던 사람을 비판한다는 게 정말 큰 쉽지 않은, 큰 일이라는 걸 잘 알거든요. 또한 이제 김수연씨 이야기를 듣고 보니 흐루시초프야 말로 진정한 공산주의자에 가깝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사회주의 사회에서 프로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의 당이 하게 되는데 노동계급의 당은 집체적 지도입니다. 그런 것을 스탈린이 일인 독제 체제로 바꾼거지요.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은 그 나쁜 점만 그대로 따랐고요.

김수연: 어쨌든 엄청난 사건이었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연설은요, 국내외적으로 정말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데요, 당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주장했던 것들, 즉 집단체제로 돌아가야 된다 라든지, 레닌식의 민주주의를 다시 찾아야 한다든지 라는 내용의 약속은 소련 사회 내부에서의 어느 정도의 자유화와 인민 생활의 개선을 의미한 내부개혁을 기약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이후 흐루시초프는 많은 정치범들을 풀어줬구요, 비밀경찰의 영향력을 제한시키는 일을 합니다.

김기혁: 레닌식 민주주의라. 뭐 자유민주주의보다야 제약이 많겠지만, 그래도 무지막지한 스탈린의 1인 독재 철권 정치보다야 훨씬 나았겠네요.

김수연: 그렇죠. 제한된 자유이긴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틈이 생겼던 것이 바로 결국 소련이 사회주의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라는 생각이 들어요. 집단지도체제가 되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게 되면서, 혼자서 권력을 흔들 수 없기 때문에 좀 더 합리적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되잖아요.

김기혁: 사실 지금 북조선도 내부 고위급 간부들 사이에서는 김정일이 세계 역사이래로 유일한 독재정치를 펴고 있고, 최악의 반인민적이고 이기적인 통치를 하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을 꺼에요. 외부 소식도 들을 수 있고, 외국도 왔다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겠어요? 이제 뭐 일반 인민들도 김정일에 대해 마음을 돌리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죠. 그런데 왜 북조선이 바뀌지 않느냐.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오랜 시간동안 너무도 강력한 1인 독재가 행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잘못됐다고 제기할 수가 없는 겁니다.

김수연: 들으면서 생각이 난 건데요, 전 특히 외국에 대사로 나와 있는 북조선 분들을 보면 참 측은한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뭐 김정일 중심으로 교육을 받고, 세뇌를 받았다 하더라도, 외국에 나와 있는 상황에서 북조선의 객관적인 현실이 눈에 들어올 거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조선 내부에서 시키는 대로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을 펴야 한다는 게 참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늘 들거든요. 예를 들어서 공개처형을 안 본 인민들이 없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다. 이런 거짓말도 늘 해야 되구요.

김기혁: 워낙 처형이 극심하게 악랄하니까 사람들이 꼼짝 못하는 거겠죠. 왜 외국에 나오는 북조선 인민들은 다 북조선 내에 인질처럼 자식이라든지 가족들을 두고 나와야 되잖아요.

김수연: 참, 그러고 보면 독재로는 북조선을 따라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기혁: 그렇죠? 자. 그럼 계속해서 이 흐루쇼브의 스탈린 비판으로 인해서 과연 소련에 어떤 변화들이 생겼는지 궁금한데요.

김수연: 네, 이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이 소련의 국내외에 던진 충격은 정말 큰 것이었는데요, 특히 자유화에 대한 큰 기대를 갖게 되죠. 소련 국내에서는 문학에서 이런 바램들이 크게 표현됐다고 하는데요, 당의 통제를 받는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탈퇴하고 ‘모스크바작가동맹’이라는 걸 만들어서 스스로 책을 발간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는 작가들의 수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때문이었는지, 그동안 스탈린주의자였던 소비에트작가동맹의 위원장 파데예프는 자살을 했다고 하네요. 이런 움직임은 다른 예술 분야들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김기혁: 아, 그렇군요. 사실 문학예술은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촉매제이죠. 그런 의미에서 문학예술은 권력자들이 항상 무서워하는 폭탄처럼 터지지는 않지만 더 무서운 핵무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요.

김수연: 네, 반정부적이고 반스탈린적인 분위기가 이처럼 공개적으로 표출되는 가운데 스탈린의 초상들은 제거됐고, 동상들은 파괴되게 됩니다. 그의 저술들은 공공도서관에서 철거됐구요. 또 대학을 비롯한 각급 교육기관에서는 젊은 교육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지하모임들이 형성되었는데요, 모스크바대학교의 한 지하모임의 경우 회원들은 소련과 동유럽 공산당들의 ‘죄악스런 역사’를 진리 추구의 차원에서 밝혀내고, 그것의 이상적 대안이 무엇인가를 모색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1957년에는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을 상대로 공산당의 간부들을 공격하는 전단들을 뿌리기도 했다고 하구요. 물론 북조선에는 이런 활동이 힘들겠죠?

김기혁: 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북조선에서 살 때는 흐루시초프 하면 배신자 야심가, 수정주의자, 백대가리, 뭐 이렇게 욕만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정말로 큰 일을 벌인 사람이네요. 실리가 있는 지도자였다 뭐 이런 생각도 들고요. 스탈린에 대한 격하가 혹시 흐루시초프 정권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지는 않았나요.

김수연: 물론, 그 직후에 ‘1957년 6월의 위기’라고 해서 반 흐루시초프 세력이 생기는 등 위기도 있긴 했지만요, 흐루시초프는 여러 분야에서 실험적인 개혁을 벌이면서 소련을 변화시켜 나가게 됩니다.

김기혁: 아 그렇군요. 한사람의 정치가로 인해 역사가 전진할 수도 퇴보할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흐루시초프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김수연: 이렇게 개괄적인 것만 좀 살펴봤는데도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요, 앞으로 몇 시간에 걸쳐서 이 흐루시초프 시대에 일어났던 변화를 하나하나 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김기혁: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김수연: 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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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변혁 그 현장속으로 자유북한방송은 매일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11750KHz를 통해, 저녁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7585KHz를 통해,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7530KHz를 통해 하루 5시간 방송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소련편]  4.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김기혁: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의 김기혁입니다. 오늘이 벌써 9월 마지막 주인데요, 어떤 마음으로 이 가을을 보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자, 오늘도 제 옆에는 김수연씨가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김수연: 네, 안녕하세요? 김수연 입니다. 아, 진짜 오늘이 9월 마지막 주네요.

김기혁: 그렇죠? 시간이 빠르다는 건 또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지도 벌써 15년이 흘렀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북조선 인민들이 모르고 있는 역사의 진실과 거짓의 간격을 메워드리는 . 자,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김수연: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흐루시초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이 일으킨 파장에 대해서 더 알아볼까 합니다.

김기혁: 지난 시간에 나눴던 것 중에 생각에 남는 게, 이제 ‘문학동맹’에 대한 이야기를 했잖아요. 국가가 지정한 동맹 외에 따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는 작가들이 생겨나서 또 다른 동맹을 만들었다. 제가 북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기 때문에 조선미술가동맹에 속해 있었는데요, 그 때를 이제 돌이켜본다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당에서 승인한 조선미술가 동맹을 놔두고 또 다른 대동강 미술가동맹을 만든다 합시다. 용서 못하죠, 아마도 정치범 수용소나 교수형이 기다리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만.

김수연: 아마 북조선에서는 아마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소련도 심한 독재를 했던 스탈린 시절에는 이런 반항을 한다는 게 불가능했지만, 흐루시초프가 앞장서서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하게 되니까 반항할 수 있는 틈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기혁: 그렇죠, 아마 북조선에서도 만약에 김정일이 아닌 다른 사람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되고 그 사람이 김일성을 깎아 내렸다면 북조선도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김수연: 이 반체제 예술가들은 따로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마련해보기로 하구요. 이제는 국외의 반응으로 넘어볼까요? 뭐, 기혁 씨가 계속 놀라시긴 했지만, 이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에 대한 반응은 소련에서는 비교적 더딘 셈이었구요, 동유럽에서는 매우 격렬하고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아무래도 소련보다는 이 스탈린 중심의 사상이 덜 강했던 탓이겠죠. 특히 동독과 폴란드, 그리고 헝가리에서 자유화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진행됐다고 합니다.

김기혁: 동독이면, 독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일테고, 폴란드라고 하면 뽈스까, 헝가리는 웽그리아를 말하는 거죠?

김수연: 네. 맞습니다. 스탈린이 죽은 뒤에 동유럽에서 처음 도전이 일어난 곳은 바로 동독이었는데요. 당시 동독은 소련식의 사회주의 건설 방법이 동독에 잘 맞지 않아서 애를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반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너무 어려운데 정치지도자들은 공업생산량을 늘리는 경제 계획을 무리하게 밀고 나간 거죠. 그래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쌓여갔다고 하는데요. 일부의 적극적인 인민들은 아예 서독을 비롯한 근처의 다른 나라들로 탈출하기도 해서 짧은 기간에 그 수는 무려 약 10만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김기혁: 동유럽은 작은 나라들이 죽 붙어있으니까 탈출한 곳이 많았나 보군요. 북조선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김수연: 그렇죠. 남조선 쪽으로 가면 휴전선이 있고.

김기혁: 휴전선에 지뢰밭이 있고, 그래서 이쪽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넘어야 되는데 말이죠. 아무튼 10만 명이면 대단한 숫자인데요, 그러고 보니 지금 중국이나 제3국 등에서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의 숫자와 비슷하군요.

김수연: 그렇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동독 공산당은 소련에게 긴급 경제 원조를 요청했구요, 스탈린식의 정책을 보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소련도 스탈린 사후 분열되어 있는 상태라서 동독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고 하는데요, 어쨌든 동독 공산당은 소련과의 협의를 마친 1953년 6월 개혁안을 발표하지만 노동자의 임금인상은 약속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김기혁: 노동자가 임금인상을 요구했던 거군요. 뭐 협의가 됐든 안됐든 임금인상을 제시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데요, 임금인상을 위해서 노동자들이 궐기를 했다, 이건 북조선에서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거든요. 제가 탈북하기 전이죠. 1995년인가 6년인가 북조선 인민 전체가 서약서를 쓴 적 있어요, 국가에서 주는 것만 먹고 입으며 살겠다고,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지만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혹시 북조선처럼 다 정치범수용소에 잡혀간 건 아니죠?

김수연: 정말 자꾸 북조선하고 비교해보니까 북조선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아닙니다. 오히려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이 반정부 운동에 들어갔죠. 더 넓은 경제개혁을 벌여라, 자유로운 선거를 해라, 정치범을 석방해라 하는 내용들을 요구한 것인데요, 이 운동은 곧바로 전국으로 퍼지게 됩니다.

김기혁: 아, 이 때면 1950년대인데, 이때도 동독에서 반정부 운동이 있었군요.

김수연: 그렇죠. 노동자들이 일어나니까 동독의 정치인들은 스스로 이걸 수습할 수 없다는 걸 파악하고 소련에게 군사개입을 요청하게 됩니다. 당시 소련의 입장에서도 유럽 정책의 핵심이 독일이었기 때문에 동독 사태를 막지 못하면 큰일이 나는 거죠. 동독은 소련의 힘을 빌려서 반정부 운동을 진압했구요, 그나마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하겠다는 경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이 위기를 잠재우게 됩니다.

김기혁: 그렇군요. 동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다른 나라에도 좀 영향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워낙 유럽이 많은 나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잖아요.

김수연: 네, 말씀하신대로 동독의 반소적 자유화운동은 진압되었지만요, 그 정신은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로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 이제 흐루시초프가 나타나서 스탈린 비판 연설을 한 것 이구요.

김기혁: 아, 정말 불 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겠네요?

김수연: 그런 셈이죠. 이 불난 곳에 기름이 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은 각 나라의 지하에서 쉬쉬하고 있었던 반스탈린주의적인 반항들을 지상으로 끌어올린 계기가 된 셈인데요, 그 첫 반응은 우선 폴란드에서 나타났습니다.

김기혁: 폴란드하면 뽈스까를 말씀하시는 거죠?

김수연: 네, 흐루시초프의 연설 이후, 4개월 후인 6월에 폴란드의 포즈나니라는 곳에 있는 노동자들이 ‘빵과 자유’를 외치면서 일어났는데요, 여기에 인민들이 호응하면서 일이 커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동시에 서유럽 방송을 전파 방해하던 무선국과 경찰서 등을 습격했는데요, 여기에 당황한 폴란드 당국은 보안 병력을 투입해서 최소 350여명 정도를 사상시키는 이른 바 ‘학살사건’을 일으키게 되구요. 이 사건을 계기로 다른 공업 도시에서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김기혁: 아 듣고 있기만 해도 참 제 마음이 떨릴 정도인데요, 참 제 입장에서는 인민들이 나라를 향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는 그 자체가 참 충격적이거든요. 사실 김일성의 저작선집들을 보면 동구라파에서 일어난 자유화 물결을 공산주의 운동 안에 대두된 수정주의자들의 우경 투항주의라고 맹렬이 비난하고 있죠,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나요?

김수연: 네, 이 사건은 인민들이 성공했냐 아니냐를 떠나서 폴란드에 있어서 소련과 분리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됐는데요, 이 일을 두고 폴란드의 공산당 안에서는 제국주의 세력이 도발한 것이다 라고 보는 사람들과, 아니다, 정책이 잘못된 거다 하는 사람들 이렇게 두 개로 갈라졌다고 해요. 이중 정책이 잘못된 거다 라고 보는 다수의 사람들은 폴란드의 민족적 공산주의자 고무우카라는 사람의 복귀를 요구했다고 하는데요, 이 고무우카는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당시 체포되었다가 공직에서 물러나 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소련은 결국 폴란드 사람들의 뜻을 받아들여서, 고무우카는 당 제1서기로 복귀됐구요. 이로써 사태는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김기혁: 듣고 보니까 동독도 그렇고, 폴란드도 그렇고, 여기서는 스탈린을 비판한 사람들이 다시 올라오는 계기가 됐는데, 북조선에서도 물론 스탈린 비판을 계기로 김일성 집중체계를 비판하게 되죠.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죠. 결과적으로는 스탈린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다 떨어져나가고, 스탈린식의 독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남게 된 거네요. 이때부터 김일성 중심 독재가 더 강해지게 되구요.

김수연: 네, 반대로 된 셈인데요, 그때 스탈린 비판이 받아들여졌던 동유럽쪽은 결국 변혁이 이뤄졌고, 그러지 못했던 북조선은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 또 한 가지 헝가리 이야기가 더 남았는데요.

김기혁: 헝가리하면 왱그리아 맞죠?

김수연: 네, 맞습니다. 앞서 나눴던 이 폴란드의 상황은 이제 헝가리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10월 중순부터 인민들이 일어나 친소 정권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게 되구요. 헝가리 공산당 제1서기 게로는 경찰에 발포를 명령함과 동시에 소련군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김기혁: 아, 웽그리아는 뽈스까보다 더 세게 나갔군요. 사실 웽그리아사태는 북조선 인민들도 잘알고 있죠. 물론 그들의 투쟁을 제국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반당 반혁명 세력의 반정부 음모로 규정했고 그러한 책동은 웽그리아 공산당과 노동계급의 군대에 의해 제때에 진압되었다 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죠,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군요.

김수연: 그렇죠? 인민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헝가리 공산당은 소련과 상의없이 반스탈린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자인 임레 너지라는 사람을 다시 총리로 선출하게 되는데요. 총리가 된 너지는 모두 개혁과 관련된 계획안들을 제시하면서 질서의 회복을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소련군은 철수하게 되죠. 요구사항이 먹히자 더 대담해진 ‘반란세력’들은 독재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보장을 요구하고 나서게 되고, 이에 대해 너지는 이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다당제 정부를 구상하고 비공산당원들을 입각시키게 됩니다. 또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했던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하고, 더 나아가 헝가리의 중립을 선언하게 되는 거죠. 집단농장 제도의 폐지도 약속하구요.

김기혁: 이건 거의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엄청난 개혁인데요, 아마도 헝가리가 빠져나가도록 소련이 가만 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김수연: 그렇죠. 이제 참는 데는 한계가 왔다라고 생각한 소련은 11월 4일에헝가리 전역을 무력으로 침공하기 시작했는데요, 수도 부다페스트에 1000대의 탱크를 진주시켰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해외로 탈출하지 못한 헝가리의 자유투사들 가운데 약 4천명 정도가 처형됐구요, 또 약 1300여명을 감옥에 넣었다고 합니다. 또 유고슬라비아대사관으로 피했었던 너지와 그의 동지들은 결국 소련군에 넘겨져서 1958년 처형됩니다.

김기혁: 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네요. 정말 사회주의 때문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 같습니다.

김수연: 그렇죠. 이 분들 외에도 정말 많은 인명의 희생이 있었을 텐데요, 이런 어려운 과정이 바로 사회주의의 독재를 서서히 막아나갈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북조선에도 이런 자유 투사들이 어딘가에 숨어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기혁: 저는 이 프로진행을 맡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군 하는데요, 정말 조금이라도 여기 동유럽 정도의 최소한의 자유만 있었더라면 북조선에도 동유럽과 같은 자유화가 되지 않았을까? 여기 남한사람들이 왜 굶어 죽으면서 김정일에게 충성 만세를 부르나 북조선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정말로 안타깝거든요, 뭐라 딱히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김정일 수령 독재가 세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무섭고 철저한 독재란 것을 말이죠.

김수연: 네, 사실 지금 현재로서는 북조선에서 보일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은 탈북인 셈이잖아요.

김기혁: 그렇죠. 이 탈출로서 밖에 표현될 수 밖에 없죠. 탈출이 탈출만으로 끝나지 않고 자유화의 물결로 이루어질 때 김일성 동상이나, 김정일 동상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저는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소련에는 흐루쇼브나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을 주고, 중국에는 등소평 같은 그런 인물을 주면서, 우리 북조선에는 왜 그런 인물을 왜 안주냐 하나님이 주실 꺼 라고 믿구요, 기대를 해 보고 있습니다.

김수연: 하루빨리 북조선의 흐루시초프, 북조선의 고르바초프 같은 사람들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혁: 네, 그 날을 기대해보면서 오늘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수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