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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말의 위장 동독 공산당에 놀아난 서독교회의 비극

운영자 2004.05.01 14:55 조회 수 : 3725 추천: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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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공산당에 놀아난 서독교회의 비극

서독교회 반동세력 배제, 진보세력 강화 시도

1950년대 ‘교회공작’ 슈타지 간부모임의 주요 테마


후베르투스 크나베의 저서 ‘슈타지문서의 비밀’(월간조선사·2004)은 1980년대 동유럽 공산주의가 붕괴되기까지 40여 년간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정식명칭 국가안전부·STASI)에 놀아난 서독의 허약한 모습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서독 각계에서 슈타지에 협력한 소위 ‘비공식 정보요원’(IM)은 2만~3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정치 경제 사회 언론 문화 예술 뿐아니라 서독 종교계에도 깊숙이 침투했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편집자주>

기민당과 돈독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던 토마스 교회 고트프리트 부쉬 목사는 놀랍게도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오랜 첩자였다. 그는 계속된 활동으로 1994년 징역 18개월에 집행유예와 3만 마르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법정에서 “라이프치히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대학생 시절, 슈타지에 포섭되어 1961년 서독으로 밀파됐다”고 진술했다.

사실 슈타지에게 있어서 서독 교회는 정당이나 정부 부처, 또는 정보기관들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동독 공산당의 시각으로는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하고도 필요한 곳이었다.
즉 세계관 측면에서 경쟁자라는 점, 내부의 ‘적들’에 대해 동맹자라는 점, 그리고 서독 사회의 권력 요소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들은 슈타지 내의 서로 다른 부서가 서독의 개신교와 가톨릭교회를 각각 분리해 침투하도록 했고 심지어는 여호와의 증인 같은 소수 교파까지도 관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슈타지 문서의 비밀`

특히 1950년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교회 공작은 슈타지 간부 모임의 주요 테마였다. 1956년 10월에 있은 한 간부회의에서 에리히 밀케는 “교회에 대한 공작 문제를 서독으로까지 확산시키는 것”이야말로 슈타지의 긴급한 과제라고 소속 장군들에게 엄중히 선언했다. 4년 후 그는 또 이렇게 확언했다. “교회 문제에서 1차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서독 교회 지도부와 개개 지도자가 행사하는 영향력을 폭로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사가(史家) 베른트 셰퍼에 따르면 서독 출신의 베네딕트 교단 수도사 오이겐 브람메르츠도 1975년 이래 로마에 거주하면서 슈타지 간첩으로 활동했다. 수도사 브람메르츠는 한때 가톨릭 통신 로마 특파원과 비스바덴 특파원으로 일하던 알퐁스 봐쉬뷔시에게 접근하여 그를 슈타지 첩자로 포섭하기도 했으며, 사례비를 주고 그로부터 바티칸 사무국 내 독일 담당 부서에서 나오는 문서들을 빼냈다. 이 문서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독일 출신 고위직 신부 에르빈 요셉 엔더에게서 나온 것들이었다.

슈타지는 이렇게 해서 수없이 많은 교황 알현 자리와 협의 자리에서 흘러나온 정보들을 자세히 보고받았을 뿐 아니라 바티칸 고위 지도부 인사들에 대한 내부평가와 교회정책, 인사정책, 동방정책과 관련한 비밀을 얻어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리히트블릭’과 ‘안토니우스’라는 가명의 두 간첩이 슈타지에 넘겨준 바티칸 관련 정보는 모두 760가지에 달한다. 이 가운데 일부는 KGB에 넘겨졌다.

특히 1970년 7월 서독 연방총리 빌리 브란트가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와 가진 회담의 속기록 내용을 보면 브란트 총리는 바오로 6세에게 “동유럽 이웃국가들과 함께 가는 평화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서독연방의회 가톨릭 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동방정책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한 교황의 대답은 신비로웠다. “평화를 위한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총리 선생.”

또 슈타지는 독일 개신교 내에서 ‘서독 교회 반동 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진보’세력을 강화하고자 시도했다. 슈타지는 1961년에 독일 개신교협의회 회장 오토 디벨리우스의 회장직 사퇴도 자신들이 함께 영향력을 행사해 이룩해낸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독일 개신교는 라이너 에펠만과 마르쿠스 메켈과 같은 동독의 재야 목사들이 계속 수난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동독 정권의 교회 담당 내각사무처와의 관계 개선에만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 역사가 게르하르트 베지어는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된 후 서독 교회들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독 공산당과 함께 놀아난 것은 동독 교회들뿐만이 아니었다. 서독 교회들은 아무런 외부 압력도 없이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더욱더 용납받을 수 없다.”

평화와 화해와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위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참여 활동, 그 과정에서 공산 독재의 정당화에 이용당해도 괜찮다는 생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들의 가슴속 깊숙이 숨겨 있다.

그 정신적 원인과 관련해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미카엘 J. 이나커는 교회의 민주주의관 발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바탕으로 독일 개신교에 내재하는 ‘이데올로기의 취약성’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개신교는 민주주의를 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닐까?”  

정리/신문영 기자  so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