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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란 사람의 글 속에 나타난 뉴에이지 사상

운영자 2004.03.05 15:25 조회 수 : 1163 추천: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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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 나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나에 대한 나의 자료는 겉으로 드러나고 내가 속해있는 소속감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나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주를 알아야 한다. 이 우주를 알기 위해서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종교는 어떤가. 기독교, 불교, 유교 할 것 없이 우주와 나와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에서의 물질과 이익만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우주와 나와의 관계정립을 밝힌 이가 예수, 석가, 공자, 노자 같은 분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가르침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다만 엉뚱한 복(福) 타령만 하고 있다. 화복(禍福)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복을 사고 팔기에 여념이 없다.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화에는 복이 붙어 있고 복에 화가 엎드려 있다(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노자, {도덕경 58장})고 하였다.
이런 우리들에게 다석 류영모 선생은 "우리는 우주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주 여행가가 되어 훨훨 돌아다닌다고 꼭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의 불꽃이 문제다.… 생각의 불꽃이 우주의 주인이 되면 그것으로써 우주인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찾아서 류영모 선생을 길잡이로 여행을 떠나보기로 한다.


몸말

1. 다석 류영모의 생애


스스로 비주류의 자리에 있기를 원했던 다석 류영모 선생은 평생을 자신이 세워 놓은 사상과 뜻에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앙과 사상은 그의 삶과 분리하여 생각한다면 아마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의 살아온 그림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류영모의 신앙 연보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아버지 류명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남
1905년(만 15세) YMCA 총무 김정식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나가다.
1910년(20세) 남강 이승훈의 초빙으로 평양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2년간 봉직하다.
1912년(22세) 오산학교에서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정통신앙을 버리고 기성교회에 나가지 않았 다. 이 무렵에 이미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지니다. 동경 물리학교에서 일년간 신학하는기회에무교회주의자 內村鑑三의 강연을 듣다.
1915년(25세) 김효정(23세)과 결혼하다.
1918년(28세) 살아온 날 수를 셈하기 시작하다.
1921년(31세) 古堂 曺晩植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 일년간 봉직하다.
1928년(38세) YMCA간사 滄柱 玄東完의 간청으로 YMCA 연경반(硏經班)을 1963년 35년간 지도 하다.
1935년(45세) 종로 적선동 솜공장을 처분하고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옮겨 농사하다.
1939년(49세) {성서조선} 124호(1939년 5월호,103-104쪽)에 {湖)岩 文一平兄이 먼저 가시는데} 추도문을 기고하다.
1940년(50세) {성서조선} 135호(1940년 4월호, 75-76쪽)에 {결정함이 있어라} 시편을 기고하다.
1941년(51세) 마음의 전기(轉機)를 맞아 예수정신을 신앙의 기조로 하다. 2월 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 단식을 시작하고, 이튿날엔 종신토록 부부간의 성생활을 끊겠다는 뜻의 解婚을 선언하다. 12월 5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절감하고 {눅임의 기쁨}(一日氣溫感)을 작시하여 {성서조선}156호(1942년 1월호, 12쪽)에 기고하다.
1942년(52세) 1월 4일 重生日, 入敎(1905년)한지 38년만에 하나님과 예수를 깊이 체득하고 {부르신지 38년만에 믿음에 들어감} ({성서조선} 157호, 1942년 2월호, 33-38쪽),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성서조선} 158호 1942년 3월호, 57-61쪽)를 기고하다. 성서조선사건으로 4-5월 57일 동안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 그금되다.
1955년(65세) 일년 뒤인 1956년 4월 26일에 죽는다는 사망예정일을 선포하다. 1955년 4월 26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974년 10월 3일까지 계속하다. 김흥호는 속기사를 시켜 다석의 1956-57년도 YMCA 硏經班 강의를 기록케 하다.
1959년(69세) 노자(老子)를 우리말로 완역하다.
1960년(70세) 주규식이 1960-61년도 YMCA 硏經班 강의를 받아쓰다.
1965년(75세) 강원도 평창군 방림에서 농사하는 차남 자상(自相)을 자주 찾아가다.
1977년(87세) 톨스토이마냥 객사할 요량으로 6월 21일 가출했다가 23일 밤중에 순경에게 업혀 집으로 돌아오다. 그 다음부터는 거의 말을 하지 않다.
1980년(90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다. 7월 31일 부인 김효정여사 88세로 별세.
1981년(91세) 2월 3일 구기동 집에서 돌아가다. 날수로 33.200일을 살다. 2월 5일 벽제 공원묘지의 부인곁에 묻히다.


2. 류영모의 사상


류영모는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에 대해서도 박식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다 다루려고 하면 너무나 많은 분량의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낮은 식견으로 커다란 나무를 이해하고 밑그림 그리기에는 벅찬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의 기본적인 사상을 각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것을 간단히 정리하고 류영모가 바라본 각 종교에 대해서도 간단하게만 정리하고자 한다.

2.1. '하나님'사상


그의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 사상이다. 그의 '하나님'은 기독교가 자기들만의 고유한 이름이라 고집하는 '하나님'과 다르지는 않지만 기독교가 그것이 자신들의 전용어로 알고 있는것과 하느님과 갈라서 다르게 생각하는것을 그릇된 생각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인류가 입을 열어 말할 때부터 있었던 첫말이다. 이것은 나와 우주의 근원이 되는 절대자에 대한 호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 부처와 노자, 공자의 아버지 역시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들(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 대해서 말했던 사람들이다 라고 주장한다.

한웋님
난손요 님계실걸요 만 아바지 되실걸요
그러나 먹을거알거시 에뵈믄 계절못뵙
몬몸속   빟이솟나 빟웋에서 한웋님

(해설) 나는 손이요 손님이다. 하나님은 존재요 머리요 주인이다. 하나님은 하늘이요 나는 땅이다. 천존지비만 하나님은 있고 나는 없다. 이것만은 진리(眞理)다. 하나님은 아버지, 나는 아들 되실걸요. 이것은 절대다. 그러나 먹을 거,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도 먹지만 나는 또 먹힐 것이라는 것, 이 땅에서 나타나고 영광(榮光)을 받으면 계 하나님 나라에 가서 자기를 뵐 수가 없다. 만물 육체(肉 ) 속에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은 언제나 무욕이 되고 비우고 언제나 세상을 초월하고 하늘로 올라가 공상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나느 무(無)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진심(盡心), 진성(盡性), 쓸 것 다 쓰고 아무것도 남김없이 무(無)가 되어 하늘에 올라야 지어명(至於命)이다.

ㄱ."빔(空)"으로의 하나님


'하나님'은 빔(空)이요, 허공이다. 그 허공은 우주를 안고 있는 것으로 허공인 '하나님'과 나는 관계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빔(空)은 석가에게 있어서 니르바나로 허공과 같은 뜻이다. 니르바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니르바나이다. 니르바나를 음역하면 열반(涅槃)이고 의역하면 적멸(寂滅)이 된다. 니르(Nir)는 없다는 뜻이고, 바나(vana)는 소리라는 뜻으로 '한 님'은 말씀이 없으신 무음(無音), 무언(無言)이 되신다.
빔, 허공(空)이 노자에게 있어서 무(無)가 되는 것이다. 노자는 무(無)를 위해서 유(有)가 있음을 세가지 예를 들어 말하고 있다. 수레와 그릇과 집이다. 이것들이 이롭게 쓰일 수 있음은 그것들이 미련한 빈자리(空間)인 무(無)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도범혜(大道汎兮)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을 류영모는 노자가 바라본 신관(神觀)으로 보고 있다. "한얼은 가없이 크도다"(大道汎兮)는 '하나님'의 얼은 가없이 커서 안 계시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장자 역시 무(無)를 밖으로 찾아가 다다르는 지극한 곳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안으로 찾아가 만나는 것은 얼 (道)로 말하였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도(道)란 표현으로 나타난다. 도(道)는 이 우주의 존재 근원이란 말이다. 곧 '하나님'이다. 이렇듯 공자는 삶 가운데서 중요한 고비에 꼭 찾는 분이 '하나님'이었다. 공자는 '하나님'을 예수처럼 살아있는 아버지로 대하였다. 예로 그의 제자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통곡하기를 "이럴 수가 하느님께서 나를 죽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죽인 것이다"(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天喪予)라고 하였다. 또한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朝楣夕死可矣)"태도로 살았다. 공자 역시 석가의 말처럼 '하나님'은 말씀 안한다(天不言)고 하였다.


위에서 말한 모든것이 절대적인 빔(空)이다. 이 세상에는 상대적인 빔(空)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왔다가 살아지는 이슬과도 같은 것이나 절대적인 빔(空)은 '하나님'이다.
류영모는 "아주 빈 절대공(絶對空)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야말로 참이 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허공이다. 이 허공이 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알아야 헐 것은 빈탕, 한데, 허공이다. 백간짜리 집이라도 고루고루 쓸줄 알아야 한다. 우주 또는 그 이상의 것도 내 것으로 쓸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허공인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류영모{다석어록})

ㄴ. "얼(靈)"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류영모는 '하나님'을 얼 곧 영(靈)으로 이해하고 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자기계시이며 동시에 인간의 생명을 유지 시켜 주시는 궁극적 형태로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로서 표현된 말씀과 상관관계에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위한 계시의 근본적인 형식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과 동일시된 나는, 이제 나가 주인이 아닌 참나(眞我)인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다. 이 주인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의 모든 것을 주장하는 분으로 이 주인을 찾았던 인물이 예수이고 석가 였다. 이렇듯 주인이 되는 '하나님'을 찾는데는 인간의 궁극적인 복종만이 있어야 한다.
이렇듯 종교 다원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류영모는 신(神)에 대한 부분을 접근하고 있다. 그러므로 류영모의 '하나님'사상의 중심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탐진치(貪瞋痴)를 쫓아 살아가는 수성(獸性)의 모습, 즉 몸으로 태어난 제나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우리에게 빔(空)으로 찾아오시는 성령으로 난 사람(얼나)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가 동일해 지는 것을 말한다.

ㄷ. 없이계신 하나님


다석 류영모 선생의 또 하나의 하나님 이해는 없이 계신 하나님이다. 이러한 없이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서강대의 정양모 교수는 그의 소논문 {다석 류영모 선생의 신앙}에서 류영모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아울러 "초월해서 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속에 자기의 뿌리 밑둥을 자기가 파고 들어간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내 깊은 속보다 더 깊이 계신다"(Deus intimior intimo meo)라고 한 어거스틴의 표현과 대비시키고 있다.
다석 어록 전반에 수록된 없이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계시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절대를 그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신(神)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인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좀 이상하다. 하나님의 이름은 없다. 모세가 백성에게 어떠한 신(神)이라 말하리까 라고 하자 "나는 나다"라고 하였다. '엘리'니 '여호와'니 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것이 신(神)이다.…(중략)… 신(神)이라는 것은 어디 있으면 신이 아니다. 언제부터 있었다고 하면 신이 아니다. 언제부터 어디서 어떻게 생겨 무슨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은 신이 아니다. 상대세계에서 하나라면 신(神)을 말하는 것이다. 절대(絶對)의 하나는 신(神)이다.…(후략)…"

"하나님은 없이 계신 이다. 없으면서도 계신다. 사람이란 있으면서 없다. 있긴 있는데 업신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슬퍼서 어떻게 우리 아버지처럼 없이 있어볼까 하는 게 우리의 노력이다."

이렇게 없이 계신 하나님은 위에서 본바와 같이 빔(空)의 하나님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찾는 것이며, 이것은 물체적 육체적 자신을 이룬 존재를 찾는 것이 아닌 생명의 근원이며 영생인 절대적 빔(空)을 이루는 것이다.

2.2. 류영모의 인간이해


류영모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적 개념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몸과 영에 대한 이원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삶을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상의 고통을 벗기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깨달음, 구경각, 등과 같은 단어로 말하고 있다.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성자들(예수, 석가, 노자, 공자)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 실천하고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같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는 류영모의 몸나와 얼나의 개념을 알아보고, 가온찍기로서의 인간이해를 알아 보도록 하겠다.

ㄱ.몸나와 얼나


류영모 선생은 몸나와 얼나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인간이해를 하고 있다. 몸나는 육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총체적인 인간의 동물적인 속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탐진치(貪瞋痴)를 가진 인간이다. 얼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얼을 받아 새로워진 몸을 말한다.
류영모는 "목숨"에 대해서 "以命食生曰妄이요 以生復命曰眞이라"했다. 김흥호의 해설은 "목숨을 가지고 사는 것을 탐하면 그것은 얼빠진 사람이요 거짓이다. 삶을 가지고 천명을 완성하면 참 사람이요 진실이다. 즉 마음을 가지고 몸에 집착하면 망령이고 몸을 가지고 마음을 살리는 것이 진실이다. 천명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 육체의 삶이다."
류영모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1956년 YMCA에서 목요강좌때 하신 말씀으로 적어 보았다.
나는 몬(物) 웋야(2)
제 노릇을 제 몰랏다. 눈귀에 팔려 짓궃게 쓴 입과 혀로다.
몸살이나 나잔으믄 제 세상인 양 세상에 제양?였다.
그러나 다아니구나 몬도 '나' 아냐!
사람은 자기가 자기가 되지 못하고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가는 수가 거의 다다. 껍데기 유행에 팔려 사람 같지 않은 짓만 구질구질하다 마는 남녀의 두 입과 두 혀로다. 식색에 끌려다니다 마는 세상 사람들이다. 가끔가다 몸살이나 앓는 병신들이 이 세상을 제 세상인 양 착각도 하고 이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것 같은 착가도 하는 어리석은 등신이다. 그러나 병신도 내가 아니고 등신도 내가 아니다. 물질도 육체도 내가 아니다.
나는 몬(物) 웋야(5)
맘을 븨여라. 속을 븨여라 만히 만히 븨여라.
하늘을 보아라 치어다 보아라 울어 우러보이라.
한웋님 아 지 브름 븬탕 한델 긘넬 이(들이여)
나는 형이상(形而上)이다. 몸을 비우고 마음속을 비우라 깨끗하게 비우라. 하늘을 보아라 쳐다보아라 회개하여 울고 애통하며 우러러보아라.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은 반드시 빈탕 한델 건너가서 하나님께 들리게 된다.
빈탕 한델 건너오고 빈탕 한델 건너간다. 무소유(無所有)와 자각(自覺)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다. 일식(一食) 빈탕, 일좌(一坐) 한데, 식색(食色)을 끊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도 없고 형이상이 될 수도 없다.

ㄴ. 가온찍기로서의 인간이해


류영모는 궁극적인 인간의 모습을 가온찍기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가온찍기는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이다. 그 장소는 여기라고 하는 곳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적 개념은 지금이라는 순간 즉 찰라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그러한 깨달음을 가온찍기(ㄴ·ㄱ)라고 한다. 깨달음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합일의 순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하나님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닌 우리 마음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 이다. 그러한 하나님을 찰라에 깨닫게 되는 것이 가온찍기이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완전하려고 한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얼나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고 몸나로서의 삶 즉 인간의 동물적 속성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이러한 인간에게 가온찍기의 경험이 있어야 얼나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가온찍기(ㄴ·ㄱ)의 뜻을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기역(ㄱ)과 아오(·)과 만나서 '가'자가 된다. 이것은 영원을 향해 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니은(ㄴ)과 아오(·)가 만나서 '온'자가 되어 영원히 온다는 말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서 가운데 점인 아오(·)가 가온데(中)에 있는 인간을 나타낸다. 인간은 영원히 가고 영원히 온다는 것 가운데서 지금, 순가, 찰라, 여기라는 점(·)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음의 글에서 우리는 가온찍기에 대한 류영모의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가온

가거라  기 따로  땅사리 우리 울월 울니므로
오느니 온나 땅파기로 어려워 다시계시골로
온나 나가니 우리 나그네 기리우리이다
계 기! 안요 우리는 다시 계 그리워 우리 우리 우리
우리 우러러 다시 그리워요 기리 기리 기리
계 가자오니 계가요 기리우리이다.
우리 나그네 아바계 모신 계 우리 길일이다
나그네 나 아달로 우리계 옳찲 한 길로 예답
우리예 살잠? 빛웰   뎨계
따로 따로 따로 난
땅사리

가온은 중(中)이다. 희로애락미발위지중(喜怒愛樂未發謂之中), 감정을 초월해서 진리를 깨달은 각자(覺者)가 중이다. 중은 우리의 꽃이다. 빛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는 것이 가다. 온은 발이개중절위지화(發而皆中節謂之和)다. 화(和)는 내재적 생명이다. 예, 이제 여기, 이 순간 이 공간 한 찰나가 영감(靈感)이다. 우리는 계속 온 영감 받으며 올글어 가고 영글어 가는 내재적 충만(充滿), 실존(實存)이다.
가거라  기, 있다시온 예다시 간 여래선서(如來善逝)다. 참으로 와서 빛으로 가는 것이다. '가거라'는 아무 미련 없이 가셨다. ' 기'는 왕이신 주님. '오느니 온나'는 인구가 자꾸 증식하여 쏟아져 나온 곰팡이같은 나. '온나(來我)', '나가니(生行)'이 세상에 태어난 무수한 나가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니'계 기' 거기 가신 그인가, 아니다이 세상 사람과 주님과는 너무도 다르다. 우리도 우러러 그리스도처럼 하늘나라로 가자고 바라고 비오니 우리는 나그네요 나요 그요 너요 우리는 한통 친구다. 여행 도중에 있는, 길 가운데 있는 나그네인 나,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자고 들러붙자는 데가 아니다. 땅이란 여기 나고 저기 나고 따로따로 나와 서로 분별(分別), 차별(差別), 땅땅 쏘아 죽이는 것이 땅사리, 지상의 생활이다. 땅에서 태어난 땅살이, 지상 생명은 땅파기, 농사짓고 땅파기, 무덤 만들고 서로 일하고 죽이기에 바쁜세상이다. 이 문명에 희망이 있느냐. 없다. 그러니 따로따로는 그만두고 우리 또다시 합하여 나와 그와 너가 하나가 되어 나그네, 나그네 길동무, 도반(道伴), 도인(道人)들이 되어 우리는 다시 천명(天命)을 그리고 하나님 계를 그리는 성(性)이 되어 다시 그리워 솔성(率性)하여 계가요, 도(道)를 걸아갑시다. 아버지께, 아버지 모신 주님께 우리는 하나님 아달로 우리 다 함께 계 가요. 하나님의 빛웰, 영광(榮光)이 찬란한 영광 가운데 데계, 우리의 본 생명인 제계로, 우릴의 생명의 근원으로 우리의 울월, 음악과 문장을 울리고 빛내면서 다니시계, 하나님 계시는 참 고향(故鄕) 골짜기로 가요.기리우리이다, 찬양하나이다. 우리 우리 우리, 우리들이 우리의 음악 문장을 울리고 울리고 기리 기리 기리, 영원히 찬양하고 찬양하고 찬양하리라. 우리 주님, 기를 기리우리이다, 찬양하며 우리 하나가 되리이다,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지이다. 할렐루야, 그것이 우리의 길이요, 우리의 일이다. 옳, 의(義) 찲 진리(眞理)충만(充滿)한 유일(唯一)길, 찬양으로 예 여기 이제 내 가슴, 내 마음, 내 속까지 답, 도착(到着), 감화, 감동, 감격,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께로 오는 감격을 노래하는 춤이 가온이다.

ㄷ. 예수에게 나타난 인간이해


예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탐심을 물리치라, 성내지 말라, 음욕을 품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하셨다. 여기서 육의 무익함은 육신의 어버이로부터 받은 몸, 즉 제나로서의 육으로 이것은 썩어져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요한복음13장 25절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하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을 류영모는 "이 세상의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세상에서는 육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난 류영모의 말로 하면 얼나로서 살아야 함을 예수 역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ㄹ. 석가에게 나타난 인간이해


석가의 말을 빌리면 더욱 더 몸에 대한 부정적 측면이 나타난다. 석가는 열반경에서 "가섭이여, 독한 것 가운데 삼독(三毒)보다 더 독한 것이 없는데 나는 그것을 모두 끊었소. 그래서 세간에 독한 것은 두려울 것이 없소"라고 말한다. 여기서 삼독(三毒)은 탐욕(貪慾) 진에(瞋 ) 치정(痴情)이다. 이런 삼독을 끊지 못하는 몸을 가지 제나를 죽이지 못하면 진정한 얼나로서 살아 갈 수 없다. 참나인 얼나에 이르기 위해서는 몸과 맘의 지각 및 인식을 초월해야 한다. 즉 지식의 세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ㅁ. 노자에게 나타난 인간이해


노자는
知人者智 사람을 아는 이는 슬기롭고
自知者明 (참)나를 아는 이는 밝다
勝人者有力 사람들을 이기는 이는 힘이 있고
自勝者强 (제)나를 이기는 이는 굳세다
知足者富 넉넉한 줄 아는 이가 가멸하다(부요하다)
强行者有志 (제나를 이기는) 굳셈으로 가는 이는 (하느님의) 뜻(얼)을 지닌다
不失其所者久 그 가진 뜻(얼)을 안 잃기를 오래도록
死而不亡者壽 (몸은) 죽더라도 죽지 않는 것은 얼목숨이다.
노자 역시 제나를 이기어 얼나를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노자 역시 제나 속에 있는 탐진치의 수성을 이기지 못하면 얼나로서 일어날 수 없음을 또한 강조한다.

ㅂ. 공자에게 나타난 인간이해


공자는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자랄 때는 혈기가 미정한지라 여색을 삼가고 자라서는 혈기가 바야흐로 강건하니 싸움을 삼가고 늙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약하였으니 욕심을 삼가야 한다"(君子有三戒 小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力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典)고 하였다. 이것은 삼독인 탐(貪), 진(瞋), 치(痴)를 나이에 따라 더 삼갈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와같이 성자들 역시 몸에 대한 이해를 탐(貪), 진(瞋), 치(痴)로 인한 썩어질 것이고 이것은 수성(獸性)을 지닌 짐승과 같은 것으로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죽어야만이 얼나로서의 나가 살수 있는 것이다. 얼나로서 나가 살기 위해서는 '한아님'의 성령이 나에게 들어올 때 몸나인 제나가 얼나로 영나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독을 끊고 사는 것은 진흙 연못에 피어난 연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연꽃과 같은 사람들을 류영모는 석가, 예수, 노자, 공자같은 성인으로 보고 있다.

3.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 이해


ㄱ. "얼"로서 이해한 종교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다석 류영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얼"에 대한 개념일 것이다. 이것은 신적측며이나 인간적 측면이나 모두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말이며 "얼"을 통한 하나님 이해와 "얼"을 통한 인간이해가 잘 나타나 있음을 지금까지 생각해 봤다.
이런 "얼"로의 거듭남을 구원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아마도 모든 종교에서는 얼로의 거듭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몸을 추구하지 않고 얼을 추구했던, 위에서 살펴본 기독교, 불교, 유교, 도교와는 다르지만 노자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각각의 종교에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각 종교의 중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 싯타르타(부처), 공자, 노자가 얼생명으로 거듭남을 받았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각 종교의 얼생명을 얻은자들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주어진 바탈(性)을 그대로 잘 쫓고 나간 이들이 공자, 노자, 석가, 예수다. 나는 맹자, 장자도 하느님과 성신을 통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과 성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바탈을 알 수가 없다. 성명(生命)은 절대다. 하늘 땅이 갈리다 하여도 끄떡 않는다. 이것이 불성(佛聖)이요 영성(靈性)이다.
또한 류영모는 각 종교의 경전에 대한 이해는 밥을 먹듯이 먹는다는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성경만 먹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교 경전도 불교의 경전도 먹는다. 살림이 구차하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여기저기에서 빌어먹고 있다. 그래서 희랍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 맷감량(飽和量)으로는 소화가 안되는 것도 아니어서 내 건강이 상한 적은 거의 없다. …… 그리스도의 경경을 보나 희랍의 철학을 보나 내가 하는 말이 거기에 벗어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나님이 하여 주실 것이다."(다석어록 p. 129)라고 했다.
이렇듯 류영모는 각 종교의 얼생명을 얻은 사람들과 경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각 종교들 간에 통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각 종교를 통하게 하는 것은 역시 앞에서 살펴본 "얼"이라고 하는 것이다.

ㄴ. 종교를 넘어선 종교


위에서 각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공통분모가 "얼"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렇지만 류영모는 위의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각각의 종교의 교리나 제의 사상을 비교하고 공통분모를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통찰하고 깨달은 자기만의 독특성을 가지고 종교를 이해하고 있다.
"홀리지 말아야 한다. 무슨 신비, 무슨 신학, 무슨 철학이라 떠들지만 거기에 홀리지 말라. 툭툭 털고 나서는 것뿐이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나라는 위치는 태양의 발바닥 같은 곳이다. 여기를 뚫고 세차게 올라가야 한다."(다석어록, p. 212)
다시말해 류영모는 각 종교에서의 깨달음, 즉 하나님에게로의 "얼생명"으로의 거듭남은 교리, 신조로 고백되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얼"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얼을 통해 깨닫게 되는 하나님은 어느 종교에서 말하든 한 하나님임을 류영모는 말하고 있다.
"원일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말하고 싶은 것은 원일(元一)이다. 본디의 하나가 원일이다. 원일은 유일무이(唯一無二)이다.(다석어록, p.170)

4. 류영모 사상에 대한 현대적 고찰


류영모의 사상은 현대의 종교다원주의 사상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아니 종교 다원주의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서구의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는것을 한국에서는 류영모 선생이 말했다. 비약된 말일지 모르지만 이런 현상은 아마도 이천년전 이스라엘에서의 예수 선포가 인도에서의 석가모니 설법과, 중국에서는 노자의 교훈과 공자의 교훈이 무엇이 다른가?
세계의 다른 구석 구석에서 진리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는데 자신이 처한 상황과 언어와 환경 속에서 표현되어진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서구의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자고 있다.
현대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은 "우리와는 다른 초월적인 신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종교적 해석을 실제로 살펴보고, 이런 관점에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라는 현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라고 말하면서 현대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려 한다. 특히 힉은 영원한 일자 개념을 사용하여 신적 실재에 대한 세계 대 종교의 공통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신성한 실재, 영원한 일자는 무한하여 인간의 사고, 언어, 체험의 영역을 넘어서면서도, 유한한 우리 인간 본성에 가능한 제한된 방법으로 반응하고 그 앞에 드러나며 개념화되고 조우하는 등 인류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대종교 전통의 공통 근거로 본다". 여기서 영원한 일자의 이해는 칼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axial period)'에 대략 800-200B.C 시기에 영원한 일자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을 통해 특유의 인간 개성이 나타났으며, 인간이 갖는 신성(divine)에 대한 느낌은 거의 무한히 확대되고 발전해 왔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른 형태의 문화를 가지고 나타나게 되었다고 힉은 주장한다. 그리고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처한 상황에 따라 인식하게 되면 인간 개인의 감정과 도덕적 인식등과 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양태에 따라 영원한 일자를 인식할 수 있고, 인식의 양태를 통제하는 것은 영원한 일자로 생각하고 있다.
세계의 대종교들의 영원한 일자에 대한 의식과 인식은 객관적으로 각 종교마다의 다양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원한 일자가 우월하다고 하는 의식과 인식을 하게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각자의 종교 안에서 학습되어지고 적응되어진 것이다.
이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세계는 다원화 되어져 가고 있고 다원화 되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공통의 하나님을 찾으려 한다. 공통의 하나님을 찾으려 할 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처럼 넓은 마음을 자져야 하지 않을까!
이제까지 기독교의 배타적인고 국수적인 입장을 이제는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그러면서 정체성을 잃지않고 세계의 모든 종교와 대화하며 공통의 하나님을 따르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