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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Koguryo , 高句麗 ]
이칭별칭
구려, 맥구려
시대
고대/삼국/고구려
성격
고대국가
소재지
한반도 중북부~중국 만주
정의
기원전 1세기에서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
개설
1. 고구려의 어원
국호 ‘고구려’의 어원은 ‘구려(句麗)’에서 비롯하였다. 몽골고원 오르혼 강 기슭에 서있는 돌궐(突闕) 제2제국의 빌게가한과 그의 동생 퀼테킨을 기린 2개의 고돌궐비(古突闕碑)에서 고구려를 배크리(Bökli)라 기술하였다. 돌궐어에서 B음과 M음이 상호전환 될 수 있으므로 배크리는 매크리(Mökli)이며, 그 밖에 범어잡명(梵語雜名)과 돈황문서(敦煌文書) P.1283 등에서 고려를 ‘무구리(畝久理)’ ‘Mug-lig’라 하였다. 이는 모두 맥구려(貊句麗) 즉 ‘맥족(貊族)의 구려’를 기술한 것이다. 이는 곧 고구려에서 ‘구려’가 어간이고, ‘고’는 관형사임을 말해준다. 고구려어에서 성(城)을 ‘구루(溝漊)’, ‘홀(忽: khol)’이라 하였다. 이는 읍(邑), 동(洞), 곡(谷) 등을 나타내는 ‘고을’과 통하는 말이다. ‘고구려’는 ‘구려’에다가 ‘크다’, ‘높다’는 뜻의 ‘高’=‘大’를 덭붙인 말로서, ‘큰 고을’ ‘높은 성’의 뜻을 지닌 말이다.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상에 등장한 것은 현토군(玄菟郡) 설치 때(B.C. 107) 그 속현(屬縣)의 하나로 고구려현(高句麗縣)이 두어지면서였다. 즉 토착민들이 ‘큰 고을’이라고 부르던 읍락에 현을 설치하고, 이를 고구려현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뒤 기원전 75년 현토군이 퇴축된 이후 이 읍락을 중심으로 고구려 연맹체가 형성되었고, 이후 국호로 사용되었다. 5세기 중엽 이후로는 ‘높고 빼어나다’는 한자의 뜻을 살려 고구려를 줄인 말인 ‘고려(高麗)’를 공식 국호로 삼았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왕씨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전승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를 모두 고구려라 기술하였다.
2. 고구려인의 기원
고구려 발흥지인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들의 종족 계통을 중국 측 사서에서 맥족이라 기술하였다. 맥족은 선진문헌(先秦文獻)에서부터 등장하는데, 그들의 거주지역이 북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부터 요동(遼東) 지역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 걸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압록강 중류 지역의 맥족은 먼저 문헌 상에 등장하였던 북중국의 맥족이 한족(漢族)에 밀려 동으로 이동한 이들이라는 설이 기원후 2세기에 제기된 바 있고 근대에도 같은 주장이 이어졌다. 그러나 선진문헌의 맥족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한다기보다 한족 거주지의 북쪽에 사는 농경문화가 덜 발달된 족속들에 대한 범칭(汎稱)이다. 맥족 이동설은 아무런 구체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다.
주민이동설의 또 하나의 예는 근래 중국학계의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고이족설이다. 즉 일주서(逸周書) 왕회편(王會篇)의 에서 기원전 12세기 말 성왕(成王)이 낙양에서 사방의 제후와 종족들의 조회를 받았는데 그 중 고이족(高夷族)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 기사의 ‘고이(高夷)’에 대해 4세기 초 공조(孔晁)가 주(注)를 달아 고이가 곧 고구려다고 하였다. 이런 공조의 주를 근거로 삼아, 고이족이 산동반도를 거쳐 요동반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고구려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이족이 고구려였다고 한 것은 공조의 주가 유일하고, 그것은 낙양에서 조회가 있었다는 주(周) 성왕(成王) 대로부터 무려 1,400여 년이 흐른 뒤에 기술된 것이다. 고이가 고구려를 지칭한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으며, 고이족 이동설도 그러하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의 기원을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방안은 이 지역에 널리 분포해 있는 적석총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는 소박한 형태의 무기단 적석총(積石塚)에서부터 거대한 방단(方壇) 계단식 적석총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양식의 적석총이 존재한다. 이들 적석총의 기원을 요서 지역 능원(凌原)의 홍산 문화 유적인 우하량(牛河梁) 적석총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시간적·공간적으로 압록강 적석총 유적과 너무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우하량 유적은 기원전 3000~20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적석총은 형태와 시간적 측면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요동 반도 남단의 청동기 시대 무덤인 적석총유적(강상묘·루상묘 등)이다. 압록강 하류 관전현·봉성현 등지의 적석총을 매개로 양 지역의 유적이 서로 연결되는 면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구려를 세운 이들로서 한인들에 의해 맥족이라고 호칭되었던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들은 외부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토착해서 살아왔던 족속이다. 청동기 문화단계에서 요동 방면으로부터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어 기원전 3세기 대에 연(燕)나라가 요동군을 설치한 이후 연의 철기문화를 수용하면서 서서히 발전을 도모해나갔다. 이들은 기원전 1세기 중반 고구려연맹체를 형성한 이후 스스로를 고구려인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국의 성장과 함께 그 세력 하에 포괄되어 들어온 예맥계의 옥저(沃沮)·동예(東濊)·부여(夫餘)·조선(朝鮮) 등의 여러 종족들이 원 고구려인을 중심으로 상호 융합하여 보다 확대된 고구려인을 형성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한인들도 융합되어 들어왔으며, 남녁의 한(韓)족의 일부도 그러하였다.
3. 고구려의 경제와 수취제도
고구려가 발흥한 압록강 중류 지역은 비교적 척박하고 농경지가 적었으며, 서북쪽으로 몽골고원의 초원지대로 나아갈 수 있으며, 동북으로는 삼림지대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고구려인은 일찍부터 유목민이나 삼림지역의 종족과 관계를 맺었다. 고구려인은 기본적으로는 정착 농경민이었지만, 그 생업에서 목축과 수렵도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발전하여 요동과 서북한 지역 등 넓은 농경지대를 확보한 된 뒤에도 그 생활문화에선 목축과 수렵을 중시하는 면을 유지하였다. 유목지대로의 진출과 북으로 삼림지대의 지배는 이런 면을 뒷받침하였다. 즉 고구려인의 생업은 농업 일변도만은 아니었으며, 지역에 따라 일종의 복합경제적인 성격을 지닌 경제를 운영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의 일부가 몽골 고원의 돌궐로 이주해가 몇몇 집단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다. 이런 면은 망국 전부터 고구려인들이, 유목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목축 경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음을 말한다. 고구려는 기원 전후부터 선비족(鮮卑族) 등 일부 유목민 집단과 관계를 맺었고, 멸망할 무렵까지도 일부 거란족(契丹族)과 말갈족(靺鞨族)을 그 휘하에 두고 있었다. 이 역시 목축경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결된다.
고구려의 수취제도는 고구려 초기 연맹체적인 부체제(部體制) 단계에선 피복속 읍락들을 단위로 공납(貢納)을 징수하는 형태였다. 구체적인 공납물의 내용은 각 읍락의 산출물에 따라 차이가 있어, 옥저의 읍락에선 해산물 등도 징수하였고, 미녀들이 공납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공납물은 집단을 단위로 부과되고 징수되었다. 그런데 읍락 단위로 집단적으로 계산되어 부과되었더라도, 구체적으로 읍락 내부에서는 그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서 부과된 것을 모아 바치는 형태였을 것이다. 그럴 때 무엇을 기준으로 읍락구성원에게 분담시켰을 것인지가 문제이다. 이에 대해선 당대의 상황을 전하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만큼, 뒤 시기의 수취 면모를 통해 거슬러 추론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 후기 민(民)에게 부과된 조세에 대해『주서(周書)』고려전에서 “부세는 견(絹), 포(布), 속(粟)으로 내는데, 그 가진 바에 따르며, 빈부를 헤아려 차등으로 내도록 한다”라고 하였다.『수서(隋書)』고려전에서는 “인(人)은 포 5필, 곡 5석을 세(稅)로 내며, 유인(遊人)은 3년에 1번 세를 내는데 10인이 세포(細布) 1필을 함께 낸다. 호(戶) 마다 1석의 조(租)를 내며, 차등호는 7두, 하등호는 5두를 낸다”라고 하였다.『주서』는 세 부담 내용을 포괄적으로 기술하였고,『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전한다. 후자의 내용에서 포 5필과 곡 5석은 모든 이에게 부과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과중하다. 이는 일종의 호조(戶調)로서, 이에서 말하는 인은 호주인 남정(男丁)을 지칭하는 것이고, 호마다 균일하게 부과되었다. 이것이 부세의 주된 것이고, 호(戶)마다 그 빈부에 따라 3등급으로 구분지어 차등으로 내는 조는 부가세적인 성격의 이다. 이외에 노동력 징발을 하는 부역이 있었다. 즉 고구려 후기 시행되었던 수취제도에서 조세는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균일하게 부과되는 인두세가 그 주된 부분을 차지하였다. 통일기(統一期) 신라에서는 호를 9등으로 세분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산출한 계연(計烟)에 의해 조세를 부과하였다. 9등호를 구분하는 기준이 인정을 중심으로 한 총체적 자산이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신라 말 고려 초 이후 점차 토지가 주된 기준이 되어 조세가 부과되었다.
이런 진전을 보면 고구려 초기에는 인정을 기준으로 한 부세가 정해졌고, 그것이 읍락 단위로 부과, 징수되었던 것 같다. 공동체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지방제도가 정비되어진 고구려 중기에 접어들면서 관료조직을 통해 개별 호에 대한 수취가 행해지게 되었다.
4. 고구려사의 시기구분
이에 대해서는 수도의 소재처에 따라 구분하는 시각이 있다. 즉 환인(桓因)시기, 국내성(國內城) 시기, 평양 시기 등으로 나누는 설이다. 수도의 소재처에 따른 구분은 구분의 기준이 간단명료하고, 유적·유물과 직결하여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미술사와 고고학에서 선호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도의 변천이 한 나라의 역사적 변화 발전상을 단계 별로 반드시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내성 천도 시기조차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 그러하다. 정치사적 측면에서 시기구분을 하여, 국초에서 3세기 말 봉상왕(烽上王)대까지를 초기, 6세기 중반 안원왕(安原王)대까지를 중기, 양원왕(陽原王)대 이후 보장왕(寶藏王)대까지를 후기로 설정하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설은 각 시기 별의 특징적인 국가의 성격이나 그 정치운영 양상에 따라 시기구분을 하였다. 즉 전기는 연맹체적인 부체제의 성읍국가(城邑國家)가, 중기는 군현제(郡縣制)적인 중앙집권체제의 영역국가(領域國家)가 형성되어 운영되던 시기였고, 후기는 중앙집권체제는 지속되었지만, 그 정치 운영이 귀족연립체제(貴族聯立體制)적인 성격을 지녔던 시기로 파악하였다. 현재 이 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입각해 각 시기의 고구려사의 면모를 살펴본다.
형성 및 변천
1. 고구려 초기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
1) 5부체제의 성립
현토군이 퇴축된 뒤, 압록강 중류 지역에는 소노(消奴)집단이 중심이 되어 여러 지역집단(那: 內, 奴, 壤)들을 규합한 완만한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나(那)’는 압록강 중류 지역 각지를 흐르는 하천 변에 형성된 집단으로서, 부족이나 시원적인 소국(小國: chiefdom)이었다. 퇴축된 후 현토군은 고구려 연맹체 내의 각각의 나와 외교·무역 관계를 가져 이를 개별적으로 조종하여 고구려사회 내에서 강력한 통합세력이 출현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런 현토군의 간접지배 정책이 상당 기간 효과를 발휘해, 고구려 사회 내에서 혼돈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부여 방면에서 남하해온 계루(桂樓) 집단이 두각을 나타내 소노집단을 누르고 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주몽이 신통술 대결을 통해 송양왕(松壤王)을 눌렀다는 설화는 소노집단에서 계루집단으로 연맹체 장이 교체된 사실을 전하는 바이다.『후한서(後漢書)』고구려전에서 전하는 고구려후 ‘추(騶)’는 추모(鄒牟) 즉 주몽(朱蒙)으로서, 기원 전후 무렵 고구려의 군장인 추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몽설화는 그 구성이 부여의 동명설화(東明說話)와 흡사하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볼 때 예(濊)족인 부여인의 묘제(墓制)는 석관묘(石棺墓)와 토광묘(土壙墓)였는데 비해, 맥족인 고구려인의 그것은 적석총이어서 차이가 난다. 만약 부여족의 일단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웠다면 압록강 중류 유역에 석관묘나 토광묘 무덤 떼가 확인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이런 점을 들어, 주몽설화는 부여의 동명설화를 대폭 차용하여 후대에서 만든 것으로써 실제상의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설이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계루집단은 부여 방면에서 이주해온 주몽집단을 중심으로 여러 계통의 이들이 결합한 혼성 집단이었으며,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대두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몽설화는 4세기 후반 공식적인 고구려의 건국설화로 정립되어질 때 부여의 동명설화가 이에 대폭 차용되어졌으나, 이에는 고구려 건국기의 일정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즉 주몽설화의 사실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이해이다.
인근의 다른 ‘나’들을 통합하며 계루집단의 세력이 확대해나가자, 이를 억제하려는 한군현(漢郡縣) 세력이 개입하여 다른 나를 지원하거나 직접 침공하여, 고구려 내부의 분열을 유발하였다. 그에 따라 일부 집단이 한군현의 작용력에 따라 고구려 연맹체에서 이탈해 나가기도 하였고, 나들 간의 상쟁을 불러일으켜, 1세기 후반 이후 장기간에 걸친 내분과 혼란이 지속되었다.
오랜 혼란을 수습하고 2세기 초 재차 고구려연맹체의 통합력이 형성된 것은 태조왕(太祖王: 國祖王) 때였다. 태조왕 궁(宮)은 아마도 주몽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계루부 내의 방계 세력이었던 것 같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한군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압록강 중류 지역의 여러 나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여, 외부와의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즉 각 나의 자치권의 일부를 박탈해, 무역·외교·전쟁권을 왕권에 귀속시켰다. 나아가 일부 나들은 계루부에 병합하였다. 압록강 중류 유역의 나들은 그간 그들 사이에서 진행되어오던 상쟁과 통합으로, 태조왕대에 이르러 다섯이 되었고, 계루부 왕권에 의해 이들 다섯 집단의 자치력 일부가 통제되었다. 이것들이 곧 5부(五部)이다. 대내적 통합력을 강화한 뒤 태조왕은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옥저와 동예의 읍락들을 공략하여 지배하에 두었다. 서남쪽으로는 현토군과 낙랑군(樂浪郡) 등과 대결을 벌려나갔다. 북으로는 부여와 상쟁을 이어갔다. 이런 형세는 그 뒤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2) 5부체제의 정치구조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아 대외교섭권은 상실하였지만, 각 부는 그 내부의 일에 관해서는 자치력을 지녔다. 왕족 대가(大加)들과 각 부의 장들은 휘하에 자신의 관인을 두었다. 그렇지만 동일한 관등을 지녔을지라도 각 대가들 휘하의 관인은 왕에 속한 관인과 동열에 서지 못하였다. 분립하는 가운데서도 상하 서열이 주어졌다. 주요 국무는 왕족 대가와 각 부 대가들로 구성된 회의에서 처결되었다. 왕은 고구려 전체의 왕인 동시에 계루부의 장이었다. 그는 초월적인 권력자라기보다는 대가들의 대표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곧 ‘primus inter pares’(동료들 중의 최상위자)라 할 수 있다. ‘사연나(四椽那)’ 즉 연나부(椽那部) 내의 4개의 집단과 같이, 각 부에는 그 안에 부내부(部內部)라고 불릴 수 있는 하위의 자치체들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5부에 의해 정복된 집단들에 대해선, 그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에 맡기고 수장을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식으로 간접 지배하였다. 동예와 옥저의 읍락 등이 그러하였다. 양맥(梁貊)의 읍락들도 그러하였다. 초기 고구려국은 이런 각 급 자치체의 연합체였다. 여러 자치체 중 5부는 지배종족으로서 고구려국 내에서 집단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옥저와 동예 양맥의 읍락들은 피정복민으로서, 일종의 집단예민적(集團隸民的)인 성격을 지녔다. 당시 ‘고구려’라 하였을 때,『삼국지』동이전에서처럼 이를 5부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고, 이와는 달리 5부와 함께 옥저·동예·양맥의 읍락 등 5부에 정복된 예민 집단들을 포괄하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 5부와 여타 피복속집단들은 실제상 고구려 국가 구조 내에서 그 정치적 위상이 엄연히 구분되어졌다.
각종 자치체들을 상하 위계에 따라 누층적으로 쌍아올린 형태가 고구려 초기의 국가구조였다. 주요 정책의 결정과 집행은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국가구조를 형성케 된 것은 각급 자치체들을 해체하고 관료조직을 통한 일원적인 지배방식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근본적으로는 당시까지 읍락에 공동체적 관계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배조직이 발달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적 통합력과 동원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제가(諸加)회의와 같은 기구를 통한 정책결정 방식과 함께, 전통적인 제의(祭儀)가 주요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10월 전국적인 규모로 동맹제(東盟制)라는 축제가 열렸다. 동맹제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지녔다. 동맹제의 구체적인 진행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일신(日神)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어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동굴에서 수신(隧神)을 불러내어 나무로 깎아 만든 신상(神像)에 접신케 한 뒤, 천으로 신상을 덮고 배에 태워 압록강을 통해 국내성의 제사 장소로 옮겼다. 수신이 도착하여 수신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올리며 신상을 덮고 있던 천을 벗기면, 햇빛이 신상에 가득 비치어 제의가 절정을 맞는다. 즉 수신(隧神)은 수신(水神)으로서 여신인데, 이에 남신인 햇빛(日神)이 비쳐, 양신(兩神)이 교접하는 형상을 이루게 된다. 이는 곧 한 해의 풍성한 수확을 준 일신과 수신에게 감사를 드린 후 두 신을 교접케 함으로써, 새 생명을 잉태하여 내년에도 풍성한 수확을 약속받는다는 것을 제의를 통해 나타내었다. 이런 제의의 진행과정을 주관하는 최고 사제가 곧 고구려왕이다. 왕은 인간들의 감사와 바램을 신들에게 전하고 신들의 약속을 인간들에 전하는 신성사제였던 것이다. 나아가 고구려왕 자신이 신성왕(神聖王)으로 형상화되었다.
동맹제 때, 5부의 유력자들은 왕이 집전하는 제의에 참여하였다. 만약 이 제의에 참석치 않는다면 이는 곧 반의(反意)가 있다고 간주되어진다. 왕이 집전하는 신께 올리는 제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곧 왕의 권위에 승복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왕은 이런 제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할 수 있고, 지배층의 결속을 도모하였던 바이다.
아울러 동맹제가 수도에서 행해질 때 각 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와 함께 물자교류가 행해지며 기예를 다투는 각 종 놀이가 행해질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이러저러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역시 각 부와 부내부의 주민들 간의 소통과 교류를 통한 정서적 결속 도모에 큰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3) 정치정세의 변화
5부체제 하에서 고구려 내부의 정치정세는 서로 길항(拮抗) 관계에 있던 계루부 왕실의 통제력과 각 부의 자치력 간의 관계의 진전에 따라, 그리고 왕과 왕족, 대가들 간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점차 왕실의 집권력이 각 부의 분권력을, 그리고 왕권이 왕족대가들의 권력을 압도해가는 상황으로 진전되어갔다. 그와 함께 왕위계승 관행도 바뀌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기저에는 사회분화의 진전에 따른 친족관계와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에서의 변화가 가로놓여 있었다. 사회분화에 따라 발생하는 빈농(貧農)을 구제하기 위한 조처인 진대법(賑貸法)이 고국천왕(故國川王)대에 시행된 사실은 이런 추세를 말해준다.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고구려 초의 왕위계승은 부자계승이 확립되지 못한 형태였다. 다분히 형제계승의 모습을 띄었다. 그러다가 2세기 후반 신대왕(新大王) 사후 그 아들인 고국천왕이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들이 없이 죽자, 왕비 우씨(于氏)가 시동생인 발기(拔奇: 發岐)와 이이모(伊夷模: 延優) 중 나이가 적은 이이모를 다음 왕위계승자로 추대하고 신왕과 결혼한 일이 일어났다. 이에 발기가 반발하여, 요동의 공손씨(公孫氏)와 연결해 반란을 일으키는 왕위계승분쟁이 발발하였다. 이를 고비로 이후에는 부자계승이 정착되었다. 즉 이이모(산상왕)의 사후 그 아들 동천왕(東川王)이 왕위를 이었고 그 뒤로 왕위의 부자계승이 확립되었다.
또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 취수혼(娶嫂婚: levirate)도 동천왕대 이후 더 이상 지배층의 혼인관행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왕위의 형제계승과 취수혼이 반드시 서로 동반하는 관행인 것은 아니지만, 상호 적합적 관계에 있다. 모두 친족의 공동체적 관계가 잘 유지되던 사회에서 흔히 행해지던 습속이다. 그런데 사회분화의 진전과 함께 친족관계도 분화되어져 감에 따라 취수혼이 더 이상 선호혼(選好婚)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각 부의 자치력도 점차 약화되고 반면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어 갔다. 대외전쟁은 이런 추세를 촉진하였다. 그 결과 3세기 말 4세기 초 이후 고유한 명칭을 띄었던, 자치력을 지닌 정치단위로서의 5부는 소멸되었다. 이제 부(部)는 수도의 행정구획 단위가 되었다. 방위명(方位名) 5부가 그것이다. 이와 함께 같은 시기에 형(兄) 등 새로운 관등을 핵으로 하는 관등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4) 대외관계의 확대와 관구검의 침공
고구려 건국기의 대외관계의 주된 대상은 한(漢)의 변군(邊郡)이었다. 이와의 관계에서 소극적으로는 한군현의 침투와 분열 책동을 막고 그들의 문물을 수용하는 교역관계를 유지하였다. 적극적으로는 요동군과 현토군·낙랑군 등 한군현 지역을 공략하여 물자와 인민을 노획하였다. 한편으로는 인근의 부여를 압박하고 일부 유목민 집단들을 규합하여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해 한군현은 고구려 내부의 각 자치집단과 고구려에 귀속해 있던 유목민 집단 등의 한군현으로의 이탈을 부추기거나, 산상왕 즉위 분쟁 때처럼 고구려 내부 상황을 이용해 무력침공을 감행하여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고, 일면으로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던 부여를 지원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런 양자의 관계는 3세기 중반에 들어 변화하는 면을 보였다. 후한제국이 멸망하고 중국대륙에 세 나라가 대치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중국의 오(吳)가 북중국의 위(魏)를 공략하기 위해 요동의 공손씨 세력과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위의 보복을 두려워한 공손씨가 오와의 동맹을 거부하자, 오는 동편의 고구려에 손을 내밀었고, 고구려도 이에 응하여 사신을 오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런 중 위가 요동의 공손씨 세력을 공략하여 멸하였다. 이제 고구려가 위와 직접 국경을 접하며 그 압박을 받은 상황이 되었다. 동천왕이 오와의 관계를 끊어 위에 우호적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남쪽의 오와 동북쪽의 고구려가 연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동북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위는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244년 관구검(毌丘儉)이 이끄는 위군(魏軍)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고구려군은 혼강(渾江) 유역에서 위군을 맞아 분전하였다. 근접하여 벌리는 단병접전에선 고구려군이 우세하였으나. 진을 치고 대규모 집단적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마침내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었다. 동천왕은 옥저 방면으로 피난해야만 하였다.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추격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위군은 회군하였다. 이 때 관구검이 환도성 인근인 소판차령에 기공비를 남겼다. 이듬해 재차 위군이 침공하여, 북옥저(北沃沮: 두만강 유역)를 거쳐 부여(길림시 일대)로 우회하여 귀환하였다.
관구검의 침공으로 고구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수도인 환도성이 파괴되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전 후 동천왕은 수도를 임시로 ‘평양’에 옮기었다.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시 일대가 아니라 독로강(禿魯江: 將子江) 유역의 강계 지역으로 보거나 집안의 평지 지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전란에 따른 피해가 컸었지만, 위군은 고구려 영토에 주둔치 못하고 곧 회군하였으며, 이후 중국 내에서의 삼국 간의 분쟁과 이은 위나라 지배층 간의 권력투쟁으로 위군의 압박은 지속적인 것이 못되었다. 고구려는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국가체제를 재정비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집권력이 강화되었다. 아울러 비록 유효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하였지만, 고구려는 3세기 중반 이후 북중국 왕조와의 교섭하면서 별도로 남중국 왕조와도 관계를 맺는 등 그 대외교섭의 폭을 크게 확대하였다. 그와 함께 당시 복잡한 국제 관계와 각 국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새로운 경험을 쌓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다음 세기에 들어 전개된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동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는 데에 유효한 경험이 되었다.
3. 고구려 중기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체제의 형성과 천하관(天下觀)
1) 4세기 이후 대외적 진출
4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는 격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주도하던 중국의 진(晉)제국이 무너지고 주변의 유목민들의 이동과 정복전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 그간 동아시아 고전 문명의 중심지였던 북중국 지역이 혼돈에 빠졌다. 많은 북중국의 주민들이 장강(長江) 이남으로 이주하였고, 북중국에선 흉노(匈奴)·선비(鮮卑)·저(氐)·갈(羯)·강(羌) 등의 유목 종족이 이주하여 왕조를 세우며 그들 간에 엎치락뒤치락 흥망을 거듭하는 이른바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 그간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주도하던 중심축이 붕괴되고 국제적인 혼란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런 상태는 오히려 그간 중국왕조의 압박을 받아왔던 중국 주변의 종족과 국가들에게 변화와 발전의 호기를 제공하였다.
고구려는 (서)진제국의 몰락에 따라 지원 세력이 없어진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여 313년과 314년에 각각 이를 병탄하였다. 서로는 요동평야로 진출하여 그 지배권을 둘러싸고 모용선비(慕容鮮卑) 등의 유목민 집단들 및 한(漢)인 잔여세력 등과 벌였다. 북으로는 부여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나갔다. 당시 부여국은 지금의 길림시 일대에 중심지를 두고 있었는데,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왕이 자살하고 부여인들이 대거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곧 이어 진나라의 지원을 받아 국가를 회복하였다. 이 때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던 부여인들 중 일부는 옛 터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 지역에 머물다가 점차 자립하였으니, 이것이 동부여이다. 복국(復國)한 뒤, 부여는 북진하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에 길림 지역을 포기하고, 서쪽 농안 방면으로 그 중심지를 옮겼다.
한편 서북 방면으로 뻗어나가던 고구려의 기세는 모용선비의 공세로 벽에 부딪쳤다. 342년 무순의 현토성(玄菟城) 방면에서 국내성으로 나아가는 교통로 중 비교적 험준한 남로(南路: 南道)를 통해 진군해온 모용황(慕容皝)의 침공군에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등의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북로(北路: 北道)를 택해 침공하였던 모용선비군이 고구려 주력군에게 격파되었기 때문에 모용황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버지인 미천왕(美川王)의 시신를 발굴해 가져가고 왕의 모후(母后)와 왕비를 인질로 사로잡아 급히 귀환하였다. 고국원왕이 곧 수도를 회복하였으나, 모용연(慕容燕)과의 관계에 수세적인 입장에 놓여졌다. 고구려에게 타격을 가한 뒤, 모용연은 346년 농안 방면에 있던 부여국을 공략하여 그 왕과 5만여 명의 주민을 사로잡아갔다. 크게 약해진 부여는 이후 고구려에 의지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렇듯 4세기 중반 요동평원의 지배권을 둘러싼 투쟁에서 고구려는 모용연에게 기선을 제압당하여, 그 세력의 팽창이 저지되었다.
한편 이 무렵 남에서부터 백제의 세력이 북진해와 낙랑·대방 지역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쟁투를 벌리었다. 양군은 371년 평양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하였다.
2) 소수림왕대의 개혁
고구려는 서와 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수도가 불타고 그 국왕이 전사하는 등 타격을 입어, 위기에 빠졌다. 모두루(牟頭婁)와 고자(高慈)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자기 집안의 시조가 주몽의 건국에 기여하였음과 중시조가 모용황의 침공에 대항하여 공을 세웠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곧 모용황의 침공에 따른 위기가 당시인들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되고 기억되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는 몇몇 개혁이 추진되었다. 먼저 약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가적 결속을 도모키 위해, 건국 설화와 시조 이래의 왕실 계보를 확립하였다. 고구려 건국 신화는 하백(河伯) 즉 강의 신의 딸인 유화(柳花)가 햇빛을 받아 임신하여 낳았던 주몽이 부여에서 박해를 받아 남하하여 고구려 지역에서 건국하였고, 그 아들인 유리(琉璃)가 뒤에 아버지를 찾아 부여에서부터 와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손자인 대무신왕(大武神王)대에 부여를 공격해 격파하여 그 압박에서 벗어나 강대국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간 고구려 초기사에 관한 이러 저러한 설화가 여러 갈래로 전해져 왔는데, 그것들을 모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부여의 동명설화의 많은 부분을 차용하여 수식하기도 하여, 왕실의 공식적인 전승(傳承)으로 확립하였다. 고구려 초기의 역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장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건국설화의 정립은 곧 고구려 건국사에 대한 국가적 공인이라고 하겠다.
이와 함께 왕실의 계보를 정립하여 공인하였다. 시조 주몽의 직계 후예로 이어져오던 계루부 왕실은 앞서 말했듯이 1세기 후반 이후 상당 기간의 정치적 혼란을 거친 뒤 태조왕이 재차 통합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태조왕 직계들이 왕위를 이어갔고 그들은 사실상 태조왕을 시조로 하는 계보의식을 지녔다. 그에 따라 태조왕 이전 시기 재위하였던 왕들과 그들의 계보에 관한 전승이 일정치 않았다. 그런 면은 현전하는 문헌의 단편에서도 확인된다. 이제 왕실이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주몽왕계(朱蒙王系) 태조왕계(太祖王系)를 결합한 단일 왕계를 공인하였다. 즉 공식적인 건국 전승과 왕계를 정립하고, 왕실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확립하여, 현 왕실을 중심으로 한 결속을 도모하였다. 곧 왕실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기리는 내용을 담은 건국설화를 확정하고, 왕실의 계보를 정립함을 통해, 패전과 왕의 전사 등에 따른 충격을 계기로 일어날 수 있는 국내 여타 정파의 이탈이나 다른 정치적 움직임을 누르고 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결속을 다지는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아울러 현 상황이 요구하는 위대한 군주의 모습을 건국설화를 통해 표현하려 하였다. 3대 대무신왕이 그 좋은 예이다. 그는 강력한 정복군주로 형상화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소수림왕 3년(373)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이 때 제정된 율령이 중국 어느 왕조의 율령을 모법(母法)으로 한 것이며, 그 구체적인 편목이 무엇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추정이 제기될 뿐이다. 그렇지만 굳이『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이 기사의 사실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율령은 나라의 제도와 형벌에 관한 규정을 담은 중국왕조의 법률체계이다. 다른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지닌 나라에서 율령을 수용할 때 모법이 그대로 이식될 수는 없고, 받아들이는 나라의 상황에 맟게 변용하거나 선택적으로 수용되게 마련이다. 그런 만큼 율령의 반포가 곧 전체 법률체계를 중국적인 것으로 바꾼다는 것을, 달리 말하자면 나라의 체제를 율령에 입각한 체제로 전반적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73년에 중국적인 법률체계인 율령을 반포한 후 고구려의 법에는 율령적 요소와 함께 고유법적인 요소도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소수림왕 3년에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것은 율령이 지향하는 체제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율령은 혈연이나 출신 지역의 차를 넘어서 보편적인 성격을 띈 제도와 형벌체계의 수립을 지향하였다. 직접적으로는 군현제에 입각한 제민(齊民)지배를 지향하였다. 3세기 말 4세기 초 이후 고구려에서는 군현제를 지향하는 지방제도의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율령이 반포되었고, 그것은 곧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하겠다는 개혁 방향의 제시였다.
그런 의지는 율령반포 한 해 전인 소수림왕 2년(372) 태학(太學)을 설립한 데서 이에 표명되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에 필수적인 요소가 문서행정에 밝은 인력이다. 태학의 설립은 새로운 관료조직의 확대에 대비한 인재의 양성 조처였다.
소수림왕대에 있었던 또 하나의 개혁 조치는 불교의 공인이다. 이때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북중국에서 성행하던 이른바 북방불교(北方佛敎)였다. 북방불교에선 ‘왕이 곧 부처임(王卽佛)’을 표방하였다. 이는 5호16국의 혼란한 시기에 호(胡)족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한 북방불교는 호족 취향에 맞게 주술적(呪術的)이고 기복적(祈福的)인 요소를 다분히 많이 띄었다. 불교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고구려에 수용되었으며, 왕실이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왕즉불의 사상은 왕실의 천손의식(天孫意識)과도 부합할 수 있는 바였다. 아무튼 불교는 고구려 영내에 포괄된 종족들의 다양한 문화와 신앙을 보다 보편성을 지닌 종교의 세계로 귀합시켜 나가, 고구려 영내 주민들의 융합을 촉진하였다. 아울러 인도-서역-중국으로 이어지는 전파 경로를 거치면서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가 녹아져 있는, 당시 최고의 국제문화인 불교를 통해 고구려는 보다 넓고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3) 5세기~6세기 전반 중앙집권화의 진전
(1) 광개토왕·장수왕대의 대외적 팽창
4세기 후반 개혁을 통해 내적 체제 정비에 주력하였던 고구려는 391년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즉위와 함께 급격한 대외적 팽창을 해나갔다. 고국양왕(故國壤王) 대에 고구려의 북변을 침량하였던 거란을 원정하여 일부 부족을 공략하고 피랍된 고구려인을 귀환시키었다. 서로는 요동평야를 둘러싼 쟁패전에서 모용씨의 후연(後燕)을 격퇴하고 최종적인 승자가 되었다. 이어 남으로 세력을 뻗쳐 백제를 압박하여 한강 하류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나아가 한강 상류 지역으로 세력을 뻗치었다. 한편 신라가 백제와 왜(倭)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고구려의 지원을 요청하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였다. 고구려군은 신라 수도를 거쳐 낙동강 하류 지역에까지 진출하여 백제군과 왜군 및 가야군의 연합세력을 격파하였다. 이번 원정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 주민에 대한 고구려 조정의 이해가 깊어졌으며, 신라에 깊이 고구려 세력을 부식하였다. 아울러 고구려의 중장기병(重裝騎兵)은 한반도 남부 지역 여러 나라들의 전력 정비와 군사전략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동북방으로도 진출하여 동부여를 병합하였다. 동부여는 앞서 말했듯이 부여의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으로 망명하여 자립한 나라이다. 고구려군이 수도로 밀려오자 동부여 왕실은 저항치 못하고 항복하였다. 412년 왕이 죽자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하였다. 즉 ‘국강상(國原)에 능이 있는, 크게 땅을 넓히고 세상을 평안하게 한 좋은 태왕(太王)’이란 의미를 지닌 시호이다.
이어 즉위한 장수왕(長壽王)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평양천도는 국가의 중심지를 옮긴 것인 만큼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녔을 뿐 아니라, 이 이후 고구려의 대외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조처로서 의의를 지녔다. 전략상으로 국내성에서 서쪽으로 혼강 상류로 나가 소자하(蘇子河) 유역을 거쳐 무순·심양 방면으로 진출하여 요동 평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뒤 요서(遼西) 지역을 차지하고 내몽고 초원 지대로 나아가 몽골고원의 유목민 세계의 제압을 도모하는 진출방향이 상정될 수 있겠다. 이와 함께 요서에서 서남방의 북중국 방면으로 나가 중국 천하를 놓고 쟁패전을 벌리는 방략이 상정될 수 있다. 청나라의 팽창 과정이 그것을 잘 말해주며, 여진족의 금나라도 크게 보면 이런 경로를 취해 팽창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평양천도를 함으로써, 요하 서쪽으로의 팽창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실제 그 이후 고구려 조정의 대외정책도 그러하였다. 그 대신 한반도로의 남진책(南進策)을 강화하였다. 그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신라·가야 간의 화전(和戰) 양면에 걸친 교류가 증진되었다.
물론 이후 고구려가 요서 지역의 정치 정세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430년대에 들어 선비족의 탁발씨(拓拔氏)가 세운 북위(北魏)가 세력을 동으로 확장해와 북연(北燕)을 압박하니, 북연 황제 풍발(馮跋)이 동으로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436년 북위군과 고구려군이 북연의 수도 용성(龍城: 현 朝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고구려군이 먼저 성에 들어가 성내를 석권하고 북연 황제와 그 주민을 몰아 동으로 귀환한 사건이 벌어졌다. 북위군과 고구려군이 직접 무력 충돌을 하진 않았지만, 양측은 이후 상당기간 동안 첨예한 대립상을 보였다. 520년대에도 북위의 내분에 따른 혼란한 상황에서 고구려군이 용성 지역에 진주하여 많은 수의 그 지역민을 고구려로 이주시킨 일이 있었다. 그리고 요하 상류 방면의 거란 부족들 중 일부를 고구려 세력 하에 귀속시켰다. 470년대에는 고구려가 유연(柔然)과 모의하여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동록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을 분할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자 그 남쪽의 해(奚)족과 거란족이 동요하여 이동하는 등의 분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은 고구려가 요서지역과 그리고 요하 상류나 흥안령 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른 일들이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북중국 방면으로의 진출이나 몽골 초원의 제패를 도모하였던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몽골고원이나 북중국 방면으로 뻗어나가려 하였다기보다는 그 방면으로부터의 영향력을 차단하여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고구려 세력권을 공고히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광개토왕대 이래로 신라에 미친 고구려의 영향은 장수왕대에도 이어졌다. 경주평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들이 그런 면을 증언해준다. 호우총(壺杅塚)의 청동 호우(壺杅), 금관총(金冠塚)의 네 귀 달린 청동제 항아리, 서봉총(瑞鳳塚)의 연수명(延壽銘) 은그릇(合杅) 등은 그런 예이다.
한편 475년 장수왕은 3만군을 파견하여 백제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략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참살하였다. 이후 한강유역의 상태에 대해서는, 고구려군이 귀환한 뒤 한강 하류 지역은 사실상 방기되었다는 견해도 있었고,『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사에 따라 백제군이 북진하여 한강 하류를 회복하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전자는 한강 하류 지역에 고구려 관계 유적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하였다. 그런데 근래 이 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다수 발견되어 더 이상 이 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551년 백제군이 다시 한강 하류 지역을 탈환하였을 당시 이 지역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6개의 행정 단위(郡)가 설치되어 있었던 만큼, 475년 이후 얼마 안 있어 백제가 탈환하였다고 단정키 어렵다. 475년에서 551년 사이 기간 중, 지역에 따라 그 구체적인 양상에서는 변동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한강 하류 지역에는 고구려의 지배력이 미치고 있었다.
한강 상류 지역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세력이 뻗치고 있었다. 나아가 죽령(竹嶺)을 넘어 영주·봉화·영양·울진·영덕 등 경북 북부 지역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
고구려는 금강 상류의 청원군 방면으로도 세력을 부식하여 남성골에 산성을 축조하니, 그에 대응해 맞은 편 보은지역에 신라가 486년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축조하였다.
이렇듯 5세기 종반 고구려가 남으로 한반도의 중부 지역을 석권하고 계속 남진세를 보이자 이에 대응해 백제·신라·가야가 연합하여 대응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한편 고구려는 서북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일부 부족을 그 영향력 하에 두었으며, 중·동부 만주의 말갈 부족들 다수를 복속시켰다. 그와 함께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걸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런 형세는 5세기 말 6세기 초 물길(勿吉)의 성장에 따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6세기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2) 지방제도의 정비
4세기대 이래로 지속되었던 대외적 팽창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고구려 조정은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에 주력하였다. 중앙 관서조직의 확충과 함께 확대된 영역을 지방제도로 편제하여 통치해나갔다. 고구려 발상지였던 압록강 중류 지역은 5부의 자치력 약화와 함께 곡(谷)을 단위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4세기가 진전되면서 영토가 늘어난 일부 변경지역에 축성(築城)을 하고 성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포괄하는 지방통치 단위가 설정되었다. 4세기 이후 6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군(郡)제가 고구려 영내에, 모든 지역은 아니지만, 상당히 널리 시행되었다. 이 시기 군제가 시행되었음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 구체적으로 ‘군(郡)’이란 표현이 있고, 한강 유역 16개 ‘군’의 존재나 고구려 후기 무관직인 ‘말약(末若)’을 일명 ‘군두(郡頭)’라 한 것 등의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군 아래에 몇 개의 하위 성이 있었고, 그 아래 촌(村) 등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어진다. 군에 파견된 지방관이 수사(守事)였던 것 같다. 군은 통상적으로는 성(城)이라 칭하고 그 지방관의 칭호를 통해 군임을 나타내었다.
지방제도의 시행은 피복속민을 지역단위로 편제하여 지배코자 한 조처이며, 이는 곧 피복속 지역의 주민과 토지에 대한 일정한 지배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함을 의미한다. 율령이 반포된 이후에는 그에 입각해 지방관이 지역민을 통치하였다. 곧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체제의 수립과 제민지배(齊民支配)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보이는 ‘대왕국토(大王國土)’라는 표현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지방지배가 공납제적인 것에서 조세제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고구려 세력 하에 있던 말갈족과 일부 거란족은 지방제도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족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되어 공납과 군사적 조력을 하였다.
군제는 6세기 중반 이후 변화가 있게 되었다. 중앙정계의 재편과 함께, 수사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고, 욕살(褥薩: 都督), 처려근지(處閭近支: 刺史), 루초(婁肖: 縣令) 등이 새로 지방관의 명칭으로 등장하였다. 욕살과 처려근지 등은 군정권과 민정권을 함께 지니고 있었으며, 그 치소(治所)가 산성 안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방제도와 군사제도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군사국가적인 면모를 강하게 띄었다.
고구려 말기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점차 광역의 지역별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욕살’이 주재한 성을 중심으로 다수의 성들을 통괄하는 광역의 행정·군사구역이 편성되는 경향을 보였다. 667년에 작성된 일종의 전황표(戰況表)인 ‘목록’에서 보듯, 욕살의 성을 가르킨 ‘주(州)’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한 것도 이런 면을 말해준다.
4) 고구려 지배층의 천하관(天下觀)
5세기대를 통해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포괄하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고구려 지배층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형성하였다. 이 천하관은 당시 고구려를 둘러싼 객관적인 형세가 반영된 것인 동시에, 고구려 대외정책 수립에 기본 토대로 작용하였다.
천하관은 국내외의 현실 정치질서에 대한 인식을 담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국의 성격이 어떠하고, 국제사회에서 자국과 인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를 개진한 것이다. 5세기대의 금석문(金石文)에서 이에 관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기술되어져 있다.
먼저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녀 천하 사방에서 가장 신성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된 논거로 만유를 주재하는 신인 천제(天帝)가 고구려 왕실의 조상신이며, 고구려왕은 천제의 신성한 핏줄을 이은 ‘천손(天孫)’임을 내세웠다. 이런 천손이 다스리는 나라는 여타 주변국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나라를 신성한 천손국으로 여김은 곧 주변의 나라나 집단들은 마땅히 고구려에 복속하여야 할 존재들로 규정하는 의식과 연결된다. 그래서 고구려 지배층은 자국과 주변국과의 관계를 상하 조공관계(朝貢關係)로 규정하였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상하 조공질서를 형성한 그러한 국제정세를 유지하는 것을 ‘수천(守天)’, 즉 천제의 뜻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하였고, 고구려왕은 ‘수천’의 주체임을 자부하였다. 또한 중원고구려비에서 신라를 동이(東夷)라 하였음에서 보듯이, 고구려와 조공국을 대비해 이를 화(華)와 이(夷)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 ‘화’와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계에 의거한 구분일 뿐이었다. ‘대왕국토’ 주민의 존재 양태가 신라·백제 주민의 그것과 사회적·문화적으로 현저한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당시 고구려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 즉 동아시아는 몇 개의 천하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겼다.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의 천하, 중국인들의 천하, 그리고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천하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간의 관계에서 중국적 천하의 상대적인 우위성을 인정하지만, 기본적으로 각 천하는 병존하여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실제 이 시기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및 몽골고원의 유연과 각각 교류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세력균형 상태를 유지케 하는 방향에서 대외관계를 추진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시 가장 강대하고 팽창적인 북위와 밀접한 교섭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남조와 유연의 연결을 도와주는 등 북위의 팽창을 견제하여,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막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또한 이런 다원적 천하관(多元的 天下觀)에 의해,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천하에 속한다고 여긴 주변 나라들에 대해서는 자연 그 바깥에 있는 집단들과 구별하여 인식되었다. 그러한 측면이 객관적인 지리적·문화적·정치적 및 종족계통적 측면 등과 결부되어, 신라·백제·동부여·북부여 등에 대해 일정한 동류(同類)의식을 형성케 해주었다.
아무튼 고구려 지배층의 천하관은 고분벽화의 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 집안오회분(集安五灰墳) 4호분, 강서대묘(江西大墓) 등의 벽화 구성은 황룡과 북극성으로 상징되는 오방위 우주관과 천하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중앙을 상징하는 천청에 황룡과 북두삼성(北斗三星)이, 사방의 고임돌에 사신도(四神圖)와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다. 왕이나 그에 준하는 인물이었던 피장자가 누워 있는 이곳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표현이다. 죽은 자에 대한 표현은 현세에 대한 의식을 나타낸 것으로써, 당시인들이 지닌 천하관의 반영이었다.
4. 고구려 후기 귀족연립정권체제로의 변화
1) 6세기 후반의 정세 변동
(1) 왕위계승 분쟁과 내우외환
6세기가 진전되면서 고구려는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고, 귀족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모습을 나타냈다. 531년 안장왕(安藏王)이 피살되고 그 동생인 안원왕(安原王)이 즉위하였다. 귀족 간의 갈등은 안원왕 대에도 지속되었다. 안원왕 말년인 544년 12월 마침내 그것은 대규모 정란(政亂)으로 분출되었다. 안원왕은 세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째 왕비는 소생이 없었고, 둘째 왕비와 셋째 왕비가 각각 아들을 두었다. 당시 귀족들이 각각 이 두 왕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이를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으로 불리웠다. 왕의 병이 위중해지자, 추군과 세군은 서로 먼저 왕궁을 장악하여 우세한 지위를 선점하려 하였다. 마침내 양측 간의 무력충돌이 궁문 앞에서 벌어졌다. 이후 3일간 수도에서 양측 간의 격렬한 대결이 벌어졌고, 추군이 승리하여 정국을 장악하였는데, 이듬해 초 8세의 어린 왕자가 즉위하니, 이가 양원왕(陽原王)이다. 패배한 세군 측의 피살자가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수도에서의 전투는 일단락되었지만, 분쟁은 여파는 지방 각지에서 이어졌다. 그래서 551년 당시 한강 상류의, 아마도 충주지역의 사찰에 머물고 있던 승려 혜량(惠亮)이 진격해온 신라군에 투항하면서 “우리나라는 정란으로 언제 망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던 것은 그런 측면을 잘 말해준다.
이렇게 고구려 내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551년 북진을 단행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 6개 군을 차지하였으며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 군을 공취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고구려는 서북방면에서부터 또 다른 위협에 직면하였다.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가 552년과 553년에 걸쳐 요하 상류 지역의 해(奚)와 거란에 대한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고, 창려성을 직접 순시하여 요하 선을 압박하였다. 이와 함께 552년에는 외교적 압박을 가해 북위 말기인 520년대에 고구려로 넘어온 북위 유민(流民) 5천 호를 다시 쇄환해갔다. 거란의 일부를 휘하에 두고 있던 고구려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한편 이 시기 몽골고원에서 새로운 변동이 일어났다. 그간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에 있던 유연이 멸망하였다. 유연의 피복속민으로서 야철업(冶鐵業)에 종사하며 알타이 산맥 서남록 준가르 초원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돌궐(突闕)이 흥기하여, 552년 옛 상전국인 유연을 격파하였다. 이 활기찬 신흥 유목제국은 조만간 흥안령을 넘어 요하 유역으로 그 세력을 확대할 기세였다. 초원에서의 세력교체에 따른 파장은 급속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신흥 돌궐의 영향력이 고구려 휘하의 거란과 말갈에 뻗쳐오고 나아가 고구려 본토에까지 밀려들어 온다면 심각한 위기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게 된 바이다.
550년대 초에 진행된 이러한 일련의 내우외환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 귀족들은 방안을 모색하였다. 먼저 귀족들 간의 내홍을 중단하고 그들 간의 갈들을 수습하기 위해 실권자의 직인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 간에서 선임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방어력이 크게 강화된 평산성(平山城) 형태의 새로운 수도 건설을 제기하였다. 기존의 궁성은 동평양(東平壤)의 안학궁(安鶴宮)터 자리에 있었고, 궁성 외곽에 시가지가 조영되어 있었다. 새로운 수도는 지금의 평양 중심부에 위치하며 궁성과 시가지 전체를 나성(羅城)으로 둘러싸는 그러한 형태였다. 실제 신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것은 30여 년이 흐른 뒤인 586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남북 두 방면에서 맞이하는 외침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쪽의 신라와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다. 마침내 신라와 밀약(密約)을 맺었다. 양국 간 화평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고구려는 이미 상실한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과 그리고 함흥평야를 포함한 동해안 일대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 같다. 신라로서도 평야지대이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어, 백제의 점령지인 한강 하류 지역이 탐이 났던 것이다. 이런 양국이 평화 협약을 맺었다는 사실은『삼국유사(三國遺事)』와『신당서(新唐書)』신라전,『일본서기(日本書紀)』등에서 전하고 있고,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마운령비(摩雲嶺碑)에서도 “인접국이 신의를 서약하고, 평화의 사절이 오고 갔다”고 하였다.
이어 553년 백제가 점령한 한강유역을 신라가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오랜 숙원인 고토회복에 성공하였지만, 곧이어 동맹국 신라의 공격으로 이를 상실하게 되니, 백제 성왕(聖王)은 크게 분노하였다. 이듬해 백제군과 가야군 및 1천여 명의 왜군을 동원한 백제의 반격전이 벌어졌다. 백제군은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괴멸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이 때 성왕도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다.
관산성전투 이후 신라와 백제 간에는 해를 이은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남부 국경 일대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런 뒤 고구려는 주력을 서북으로 돌려 돌궐의 침공에 대비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2) 귀족연립정권 체제 형성
양원왕 즉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귀족들 간의 분쟁은 내외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자 대대로 선임제를 매개로 한 귀족들 간의 절충에 의해 수습되었다. 그런데 이 타협책이 잠정적인 수습안에 불과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뒤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6세기 후반의 상황을 전하는『주서(周書)』고려전에서 “대대로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상쟁을 벌여 이긴 자가 스스로 취임하며 왕이 임명치 못한다”고 하였다.『구당서』고려전과『한원』에 인용된「고려기(高麗記)」등에서도 같은 내용을 좀 더 상세히 전한다. 즉 6세기 후반 이후 국정을 총괄하는 직임인 대대로를 3년 마다 고위 귀족들이 선임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에 비해『위서』고구려전 등 6세기 전반 이전의 상황을 전하는 사서에서는 이런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왕권이 강대하였던 6세기 이전 시기에는 대대로가 귀족들 간에서 선임되지 않았거나, 선임되었더라도 대대로의 지위가 권력의 중추이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런 상태에서 변화가 생겨, 양원왕 즉위를 둘러싼 귀족들 간의 대규모 분쟁을 거친 후, 대대로가 귀족들의 이해를 조정하고 대표하는 지위가 되었고, 대대로를 3년마다 선임하는 관행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대대로의 직임을 잘 수행하면 연임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즉 유력 귀족이 세력을 유지하면 계속 집권할 수 있었다. 6세기 후반 이후 일종의 귀족연립정권체제(貴族聯立政權體制)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대대로의 선임은 곧 연맹체장 선임의 유제(遺制)를 되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임의 주체는 중앙귀족이었다. 귀족연립정권 하에서 귀족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권이 크게 위축되었지만, 지방할거 상태가 아닌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유지되었다. 6세기 후반 이후 새로운 귀족들이 전면에 대두하였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 집안도 6세기 후반 이후 두각을 나타낸 신흥 귀족이었다.
(3) 대외관계 상에서의 변화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에서 두드러진 변화의 하나는 신라의 약진이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중국왕조와의 교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남조와의 교섭에 치중하였던 종전과는 달리 북조와의 교섭도 전개하였다. 그에 따라 북제(北齊)는 565년 진흥왕을 “사지절도독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都督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이에서 유의되는 것은 종전에 중국왕조의 고구려왕에 대한 책봉벼슬에서 관행적으로 주어지던 “동이교위(東夷校尉)”나 “동이중랑장(東夷中郎將)” 등 동이를 주관한다는 벼슬이 신라왕의 책봉 벼슬로 주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 중국왕조의 책봉호가 실제적인 의미를 지닌 벼슬은 아니었지만, 동이 문제는 고구려에 일임한다는 자세에서 이제 고구려만이 교섭의 대상이지는 않다는 식의 변모를 나타내었다. 당시 백제도 북제와의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신라와 백제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고구려는 남조의 진(陳)과의 교섭을 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교섭이 없던 왜국과 공식적으로 통교(通交)하여 570년에서 574년 사이에 세 차례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역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를 지녔다. 한편 동쪽으로 진격해오는 돌궐를 격파하여 그 동진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전제적으로 볼 때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대외관계의 상황은 종전과 다른 면이 많아졌다. 삼국간의 관계는 종전의 고구려에 대항해 신라·백제·가야가 연합하던 형태에서 삼국이 각개 약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 간의 상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고구려 남부 국경 일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졌다. 북제와의 관계도 북제 자체가 돌궐의 압력을 방어하는데 주력해야 했던 만큼, 고구려와의 갈등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돌궐의 팽창세력 또한 동으로는 고구려에 의해 저지되었고, 남으로는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 선에서 머물렀다.
이처럼 6세기 중반 이후의 정세변동은 기존의 국제관계의 틀에 상당한 충격을 가하였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581년 수(隋)제국의 등장은 기존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상황 변화를 야기하였다. 그와 함께 고구려의 대외관계도 격류에 휩싸이게 되었다.
2) 수(隋)와의 전쟁
581년 수(隋)가 건국되었고, 이어 동돌궐(東突闕)을 격파, 복속시켰다. 나아가 589년 남중국의 진(陳)을 통합하였다. 삼백여 년 만에 강대한 통일중국왕조가 등장하였다. 통일중국제국의 등장은 인접한 나라들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고구려는 진의 멸망 소식에 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던 것은 그런 위기의식에서였다. 통일중국제국의 등장은 기존의 국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재편을 요하였다. 즉 5~6세기 대에 유지되었던 다원적 세력균형 상태를 타파하고, 중국왕조 중심의 일원적인 질서를 확립하려 하였다. 그간 다원적 세력균형 상태를 지탱하던 주요 세력들인 몽골초원의 유목민 국가, 남중국의 왕조, 북중국의 왕조, 티베트 고원 동북 사면의 토욕혼(吐谷渾), 한반도와 만주의 고구려 중에서 고구려를 제외하고 모두 수제국에 통합되거나 격파·복속되었다. 그럼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수의 압박이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돌궐과의 협력을 통해 수제국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의 세력 하에 굴복한 돌궐이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수와 고구려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오히려 수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고구려원정에 동원되었다. 고구려와 수의 대결은 후자의 네 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진행되었다.
수나라는 수륙 양 방면으로 대병을 동원하여 속전속결로 일거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그에 대응해 고구려는 성곽을 중심으로 한 방어전을 벌였다. 그리고 일면으로는 적의 최대 약점인 긴 보급선을 교란, 차단하면서 가을이 되어 추위와 보급 부족에 시달리게 되기를 기다리는 장기 지구전을 펼쳤다. 이에 조급해진 적군이 별동대(別動隊)로 무리한 침투 기습전을 벌리면, 이를 내륙 깊숙이 유인하여 타격을 가하는 방책을 취하였다. 이런 고구려의 작전에 말려 수군은 번번이 패배하였다. “요동에 가서 헛되이 죽지마라(無向遼東浪死歌)”가 수나라 말기 민중 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음에서 보듯, 고구려 침공에서의 거듭된 패배와 전쟁에 따른 고통과 재정파탄이 주요 원인이 되어 수제국은 멸망하였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에서 유의되는 점은 양국 간의 전쟁이 한반도 내의 삼국관계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백제와 신라는 수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수군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이에 부응해 고구려 남부 국경을 공격하는 형태의 공동 작전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정작 전쟁이 벌어졌을 때 백제와 신라는 모두 한 걸음 물러서 정세를 관망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아무튼 수제국의 등장에 따른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의 움직임은 고구려에 의한 수군 격퇴에 의해 저지되었고, 요하 이동으로 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3) 연개소문의 집권
(1) 정변
수를 이어 등장한당(唐)은혼란에 빠진 중국을 재차 통합하고, 이어 수나라 말기 이후 강성해진 돌궐을 격파하여 몽골 초원의 유목민 사회를 제압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당과 고구려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었고,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당과 고구려가 각기 자기의 영토를 지키며 평화 공존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은 굳이 고구려를 신속(臣屬)시키려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평화공존론은 곧 당의 신료들의 이념적인 반대에 봉착하였으며, 이어 당이 국내를 통일하고 주변의 인접국들을 정복해나가자 고구려 정벌론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런 흐름의 중심에는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있었다. 그는 돌궐의 힐리가한을 격파한 뒤, 몽골 고원 유목민집단의 수장들로부터 630년 유목세계의 패자라는 의미를 지닌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되었다. 이제 그는 농경세계와 유목세계를 아우른 ‘황제-천가한’이 되었다. 이에 팽창해오는 당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구려 조정은 631년 2월 북으로 부여성(夫餘城)에서 동남으로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해 7월 당 조정은 요서지역에 고구려가 만든 경관(景觀)을 파괴하였다. 이 경관은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전사한 수군(隋軍)의 시체를 모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써 고구려에게는 일종의 전승기념탑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 시점에 경관을 파괴하는 당의 조처는 명백히 고구려에 대한 위협이고 도발이었다. 이에 고구려 조정은 대륙 정세의 추이와 당의 정책을 더 예의 주시하였다.
이어 당은 토욕혼을 격파하였고, 나아가 640년에는 천산북로(天山北路)에 있는 고창국(高昌國)을 병탄하고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이제 사실상 당의 서부와 북부 방면에 있던 주요 나라들을 대부분 병탄한 셈이 되었다. 당의 다음 예봉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세민은 다음해 641년 5월 고구려에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파견하였다. 직방낭중은 병부 소속으로서 국내외의 주요 군사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직으로서 군사정보 수집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그는 고구려에 입경한 뒤, 산천 지리와 군사시설 주민동향 등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가 보고하였다. 그 때 당태종은 곧 고구려에 대한 정벌전을 감행하겠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개진하였다. 한편 진대덕이 평양성을 방문하였을 무렵 고창국 멸망 소식을 접한 고구려의 상하는 크게 당황하였다. 다가올 국가적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귀족들 간의 내홍을 촉발하였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연개소문의 거취를 둘러싸고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앞서 연개소문이 그의 부친의 직임인 동부대인(東部大人: 욕살) 직을 계승하려 했는데, 강대한 연개소문 집안의 세력과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다른 귀족들이 거부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무리에게 호소하여 간신히 계승할 수 있었다. 그 뒤 그의 세력이 강화되어가자 위협을 느낀 왕과 다른 귀족들이 모의를 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를 천리장성 감역(監役)으로 임명하여 일단 중앙정계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자신을 향한 압박이 가중되어지자, 642년 10월 연개소문은 사열을 한다면서 귀족들을 초치한 뒤 부병(部兵)을 동원해 귀족들을 대거 살육한 뒤, 궁성을 침범하여 영류왕(營留王)을 죽이고 보장왕(寶藏王)을 옹립하였다. 그는 막리지(莫離支: 太大兄)로서 대모달(大模達: 大將軍)에 취임하여 군권을 쥐었으며, 대대로와 귀족회의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중리제(中裏制)를 시행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중리제는 조정의 공식적인 관서조직(外朝)과는 별도로 궁중에 설치하여 내조(內朝)라 할 수 있는 왕 직속 행정조직이라고 여겨진다.
중앙에서의 정변에 성공하였지만, 지방 각지에 있는 그의 반대세력에 대한 토벌이 필요하였다. 유명한 안시성(安市城) 성주는 그의 반대파였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승리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양자는 타협을 통해 사태를 마무리하였다. 연개소문은 그를 안시성주로 인정하고, 그는 연개소문이 새로운 집권자임을 승복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2)연개소문과 김춘추의 평양성 회담
그 무렵 남으로부터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평양성을 찾아왔다. 642년 8월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그 성주가 죽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어, 신라의 낙동강 서편 지배권이 흔들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평양성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그를 환대하였고, 모처럼 양국의 정치 실세들 간에 담판이 벌어졌다. 김춘추는 고구려가 상쟁을 중지하고 화평관계를 맺으며 군사적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한강 유역을 신라가 고구려에 돌려준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응수하였다. 김춘추가 이를 거부함에 따라 모처럼의 담판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와 협력하여 신라의 대당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립된 신라가 당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당이 이에 적극적으로 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이제 당이 개입함에 따라, 더 이상 신라와 고구려 간에 타협이 진전될 여지가 없어지게 되었다. 당의 고구려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찾아온 김춘추의 제안에 대한 연개소문의 거부는 고구려로 하여금 남북에서 적을 맞이하게 하는 운명적인 선택이었다. 이는 고구려의 안위에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연개소문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유혈 정변을 거처 집권한 그로서는 대외강경책이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데 유효하다고 판단하였던 데서 비롯하였던 것 같다.
4) 당과의 전쟁
(1) 645년의 전쟁
고구려의 정변과 뒤이은 신라의 당에 대한 구원 요청은 고구려 침공의 기회를 노리던 당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은 수차례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고구려가 그것을 거부하는 과정을 거쳐 명분을 쌓은 뒤, 마침내 644년 7월 고구려 원정을 선포하고 물자와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대략 20여 만에 달하는 당군(唐軍)은 수륙 양면으로 침공을 기도하였다. 수군(水軍)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 남단을 공격하는 길을 취하였고 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평야로 나아가는 길을 취하였다. 당의 선봉장인 이적(李勣)은 평탄한 북로 길을 택해 요하를 건너 지금의 푸순 고이산성(高爾山城)인 신성(新城)을 공격하였다.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이곳에 고구려군을 묶어둔 뒤, 그 남쪽의 개모성(蓋牟城)을 공략하고 이어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하였다. 한편 당 태종 이세민의 본군은 중로 길을 택해 요하를 건너 바로 요동성으로 밀려들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이어 백암성(白巖城)도 공략하였다. 그 다음으로 안시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요동벌에서 평양으로 나아갈 때 취하는 평탄한 대로의 길목에 안시성이 위치하고 있는 만큼, 이 성의 함락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한편 이 무렵 고구려 중앙군 15만이 안시성으로 접근해왔다. 안시성 교외에서 벌어진 양군의 회전에서 당군의 기동력과 포위전술에 휘말려 고구려군은 사령관 이하 3만 7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대패를 당하였다. 당군은 승세를 몰아 안시성 공략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완강한 안시성민들의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공방전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음력 9월에 접어들면서 요동 평원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재차 전열을 정비한 고구려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며 당군의 보급선을 위협하였다. 한편 그간 연개소문이 정성을 쏟았던 설연타(薛延陀)에 대한 공작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즉 연개소문은 몽골 고원의 터키계 유목종족인 설연타에게 막대한 물자를 제공하면서, 당시 당군의 주력이 요동으로 나가있는 동안 방어력이 약화된 당의 관중(關中) 지역을 기습 공략할 것을 종용하여 왔다. 설연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고, 안시성 함락을 기약할 수 없으며, 추위와 보급품 부족이 닥쳐오고 있는 상황에서 당군은 신속한 철수 외에 대안이 없었다. 철수는 막대한 피해를 동반하였다.
한편 요동 전선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이 해 5월에 전쟁의 불꽃이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옮겨 붙었다. 신라군 3만이 임진강을 넘어 북진하였다. 신라는 644년 당으로부터 ‘참전하여 조병(助兵)하라’는 요구를 받아왔다. 그러나 신라 조정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고, 645년 2월에도 출병 독촉을 받았다. 정통성을 둘러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선덕여왕(善德女王)으로서는 참전 여부와 그 결과가 경우에 따라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선덕여왕은 참전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신라군이 북진하자 백제군이 그 공백을 노려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백제 역시 당으로부터 조병할 것을 요구받았는데, 행동으로서 백제의 선택을 분명히 하였다.
645년 4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 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어 5월에 전쟁의 불꽃은 한반도 내의 삼국관계에 직접 옮겨 붙었다. 나아가 6월에는 왜국에서 정변(大化改新)이 일어나 일본열도에 까지 그 파장이 뻗쳐 나갔다.
(2) 고구려·백제·왜의 연대 형성
철수한 뒤에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번 침공을 통해 그는 고구려를 일거에 정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새로운 방안을 안출하였다. 그 하나는 장기소모전이다. 즉 소규모 단위의 병력을 고구려 변경 지역이나 해안지대에 투입하여 치고 빠지는 것을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고구려인이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고, 지치게 될 것이며, 그런 뒤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 남부 국경지대에 강력한 제2전선을 구축하여, 그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원정군의 최대 약점인 군수품 조달을 남으로부터 받을 수 있게 한다는 방안이다. 그럴 때 새삼 주목되는 것이 신라와 신라군의 가치이다.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에 이어 647년 왜국으로 건너가 양국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을 시도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648년 당으로 건너가 이세민과 논의하여 양국 간에 군사동맹을 맺었다. 신라 조정은 당의 연호와 관복을 채용하는 등 적극적인 친당정책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시행하였다. 신라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국은 끝내 당-신라 축에 가담치 않았으며 기존의 백제-고구려 축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런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치하는 상태는 660년 백제 멸망전을 거치면서 종국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5) 고구려의 멸망
오랜 당과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크게 피폐해졌다. 당의 군사적 압박을 견제할 목적으로 북아시아 초원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방안은 계속 추구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시 외곽에 있는 아프라시앞 언덕의 궁전 유지(遺址)의 벽화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사신의 모습은 그러한 절박한 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성과는 여의치 않았다. 특히 660년 백제의 멸망으로 고구려의 전략적 위치는 더 악화되었다. 이어 661년 당군이 침공해와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이어 겨울철이 되자 당군은 고구려군에게 격파되고 역으로 고구려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식량마저 떨어져가고, 본국과의 보급선이 차단된 위기상황에 몰렸다. 그때 남으로부터 신라군이 진격해와 군수품을 보급해주니, 그것을 먹으며 점진적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새삼 신라군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침공군이 동계 작전도 벌릴 수 있게 되어 고구려의 전략적 위치는 크게 악화되었다.
상황이 악화되니 연개소문의 후계구도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일찍부터 각급 단위 기관이나 부대의 지휘관직을 역임케 하였다. 장남인 남생(男生)은 중리소형(中裏小兄), 중리대형(中裏大兄)을 거쳐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이 되었고 이듬해 장군이 되었으며, 28세에 막리지(태대형)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이 되었으며, 연개소문 사망 직후인 665년 32세로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가 되어 군국(軍國)을 총괄하였다. 차남인 남산(男産)도 비슷한 과정을 걸었다. 삼남인 남건(男建)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런 승진의 길을 세 아들에게 열어준 것은 이들이 군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남생이 막리지 삼군대장군이 된 해가 바로 백제 멸망 이듬해였다. 이 해에 남생이 삼군대장군으로서 당의 침공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게 하여, 군권을 실제적으로 장악케 하였다. 그러면서 연개소문은 남산과 남건에게도 군권을 이관하여, 세 아들 모두가 군국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세 아들이 군권을 나누어 장악하고 서로 협력하여 국정을 이끈다면 연씨 집안의 권력은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연개소문 사후 남생이 655년 태대막리지가 되어 군국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동생인 남산·남건과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국내성에서 반기를 들고 당에 투항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은 당은 666년 9월 군대를 보내어 남생을 지원하였다. 그에 따라 요하에서 국내성에 이르는 고구려 서북부 깊숙이 당의 세력이 뻗쳐 들어온 형세가 되었다. 고구려 중앙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남생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옛 수도인 국내성은 천혜의 요새로서 외부에서 공략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조금 전까지 고구려 최고 권력자이던 남생이 반란을 주도하는 상황이다 보니 진압이 어려웠다. 남생은 667년 당에 입조하였다. 이후 남생은 고구려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당에 알렸고, 당군의 향도(嚮導)가 되어 적극 협력하였다. 이처럼 남생 형제들 간의 이전투구가 지속되자 남녘을 지키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이탈하였다. 그는 666년 12월 자신의 관할구역인 함경남도 남부 일대와 강원도 북부 지역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런데 내분이 터진 뒤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어떤 적극적인 조처도 마련되지 못하였다. 이런 양상은 20여년에 걸친 연개소문의 집권과 무관할 수 없다. 연개소문은 대규모 유혈 정변으로 집권한 후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려 하였고, 권력을 아들이 세습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억압적 권력행사는 불가피하였다. 자연히 여타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하였으며, 무엇보다 기존 권력 장치를 무력화하였다. 연개소문에게 집중된 권력은 그가 죽자 엄청난 권력 공백을 초래하였다. 그의 아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갈등을 조정한다든가 어느 한 편으로 힘을 몰아주든지 하여, 권력의 혼돈상태가 빨리 종결되게 하는 데에 왕이나 귀족회의 등 어떠한 권력 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최고 집권층 내부에서 일어난 분열과 배신, 투항은 고구려인들의 저항력을 마비시켰으며, 오랜 동안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구려 사회에 패배주의를 만연케 하였다. 한편 667년 2월 이적이 이끈 대규모 당의 침공군이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하였다. 신성은 오랜 저항 끝에 그해 9월에 내부 투항자들의 항복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군은 요동성 방면을 거쳐 압록강 하구로 진격하였다. 그에 따라 요하 이동 고구려 영역 내에 두텁고 깊게 당의 점령지가 마련되어졌다. 이어 이듬해 봄에는 북으로 북부여성 일대가 당군에 의해 공략되어졌다. 당군은 이제 평양성을 향한 총진군에 나섰다. 이런 당군의 진격에 보조를 맞추어 신라군이 남에서 북진하였고, 평양 남쪽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로 투항하였다. 이제 평양성을 향해 나아가는 남북 양 방면의 진격로에 방어벽이 없어졌다. 드디어 당군과 신라군에 의해 평양성이 포위되었다. 이어 9월 21일 평양성 방어를 총괄하던 장수가 투항함에 따라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6) 고구려부흥운동과 유민의 향방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은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2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런 뒤 5부 176성 69만 호의 옛 고구려국을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00현(縣)으로 재편하고, 고구려인으로서 당에 투항하거나 협력한 자를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임명하여 표면에 내세우고 당인(唐人) 관리가 실제적으로 통치하도록 조처하고 안동도호가 이들을 총괄케 하였다. 새로이 행정단위를 구획하는 등의 일에는 장안에 머물던 남생이 깊이 간여하였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인들의 반발을 원천적으로 약화시키고 당의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한 방책으로 부유하고 힘 있는 고구려인 2만 8천여 호를 당의 내지에 대거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이는 고구려인 사회를 뿌리채 뒤흔들었고, 고구려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고구려 유민의 반발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당의 지배에 대한 무력 저항이었다. 다른 하나는 당의 지배 망에 벗어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검모잠(劍牟岑)의 봉기가 그 한 예이다. 요동지역에서도 안시성을 위시한 봉기가 있었고, 부여성 일대에서도 봉기가 잇따랐다. 고구려 유민들의 무력 봉기는 부흥운동군이 상호 연대하는 조직성의 부족과 우세한 당군의 무력에 밀려 673년 무렵까지는 진압되었다. 한번 국가가 붕괴되면 그것을 대체할 조직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정복자가 자행한 억압과 약탈에 따른 고통스런 현실은 고구려인의 저항을 촉발하였으나, 70년에 걸친 장기간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력(民力)과 최고 지배층의 배신적 행위를 경험한 이들에게 국가나 그에 준한 조직체에 대한 믿음과 상호 신뢰감을 회복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을 요하였다. 무엇보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와 내일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구성원 개개인의 가슴 깊이 심어주는 데에는 장기간의 헌신과 승리에 대한 실제적 경험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적군은 그런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밀어붙였던 것이다.
한편 반당(反唐) 저항운동 과정에서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갔다. 그들의 이주는 소규모 단위로 이루어졌고 상당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이들의 향방은 몇몇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라로 합류한 이들이다. 이에는 그들의 원주지가 신라에 병합됨에 따라 함께 귀속케 된 이들이 있고, 668년 전후 이래로 일련의 격동에서 연정토 일파나 안승(安勝)의 무리와 같이 집단적으로 신라로 내투한 이들이 있었다. 전쟁 포로로 잡혀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하였던 이들 중 상당수는 당군에 밀리자 신라로 넘어와 신라군에 합류하였다. 신라와 당의 전쟁이 종결된 676년 이후에도 당의 지배에 저항하던 고구려 유민이 산발적으로 소규모 단위로 신라로 넘어왔다. 668년 이후 고구려 유민으로서 신라에 합류한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둘째, 발해(渤海) 건국과 함께 발해인이 된 이들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계속 원주지인 동부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집단과, 대조영(大祚榮) 집단같이 요서지역으로 옮겨져 거주하다가 동으로 탈주한 집단, 그리고 요동방면에서 동부 만주 지역으로 옮겨온 이들이 있었다.
셋째, 일본열도로 이주해간 이들이다. 험한 바다를 건너간 보트피플 같은 난민이었던 이들은 일본열도 여러 곳에 정착하여 생을 이어갔다. 관동지역의 가나가와현에 있는 고려절터(高麗寺址)는 이 지역에 정착하였던 고구려 유민들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일본조정으로부터 고려왕(高麗王)이라 성[姓: 카바네(かばね)]을 받았던 약광(若光)의 일족이 정착하였던 지역이다.
넷째, 당의 내지로 강제 이주된 집단이다. 이들은 크게 관내도(關內道)·농우도(隴右道) 등에 옮겨진 이들과 회하(淮河) 유역 등 강·회(江·淮) 방면에 배정된 이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전자를 보면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부와 감숙성(甘肅省) 방면에 정착케 되었다. 이 지역은 티베트의 토번(吐蕃)과 몽골고원의 유목민 세력의 연결을 차단하는 긴 회랑지대이자 농경과 목축이 함께 행해지던 곳으로서, 실크로드의 요지이다. 당은 고구려인의 군사적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 지역에 정착시키고, 일종의 지역 자위를 위한 지방병인 단결병(團結兵)으로 편성하였다. 유명한 장군인 고선지(高仙芝)는 이 지역에 정착케 된 고구려인의 후예였다. 강·회 방면으로 옮겨진 이들은 회하 유역의 황무지에 정착하여 생활을 꾸려나갔다.
다섯째, 몽골고원 돌궐의 지배 하로 이주해간 이들이다. 이들은 당의 지배를 피해 집단적으로 옮겨갔는데, 그 중에는 고문간(高文簡)처럼 묵철가한(黙啜可汗)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막리지(高麗王莫離支)’라 칭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고문간, 고공의(高拱毅), 고정부(高定傅) 등이 각각 이끄는 고구려인 집단은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몽골고원을 떠나 당으로 내투하여 내몽골 지역에 정주하였다.
여섯째, 요동 지역에 그대로 계속 머문 이들이다. 이들은 668년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 통치를 받았는데, 여러 차례 저항과 당 내지로의 강제 이주를 겪었고, 많은 이들이 동부 만주나 몽골고원 및 신라로 이주해가 안동도호부 관내에는 가난한 소수만 남게 되었다.
일곱째, 고구려에 근접한 영주(營州) 방면에 옮긴 이들이다. 당 내지로 끌려갔거나 돌궐로 갔다가 당으로 흘러들어간 이들의 운명은 여러 형태를 보였다. 676년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재건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 일환으로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으로 봉해 677년 당 내지로 옮겨졌던 고구려 유민과 함께 요동에 귀환시켜 고구려 유민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겼다. 보장왕은 요동에 귀환한 뒤 얼마 안 있어 옛 복속민이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연결하여 당에 반대하는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러나 발각되어 다시 당 내지로 유배되었고, 보장왕과 함께 귀환했던 고구려 유민은 다시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당에 끌려간 뒤 개인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고선지 왕모중(王毛仲), 백제 유민인 흑치상지(黑齒常之), 사타(택)충 등과 같이 크게 입신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출세는 당제국의 국제성과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한결 용이하였다. 그러나 외형상의 개방적 분위기에서도 당 사회 내면에 흐르는 한족의 배타성 때문에 멸시와 모멸이 심하였으며, 대개 역모 등의 혐의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변경지대에 거주하게 된 고구려 유민들은 집단적으로 정착하였는데, 주위에 상대적으로 저급한 문화를 지닌 북방 종족들이 거주하였고 한족의 문화적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하였으므로, 비교적 후대까지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때에 따라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영주 지역에 정착하였던 대조영 집단이 그러하였다. 계속 영주지역에 머물렀던 이정기(李正己) 집안의 경우,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 두각을 나타내어, 산동 지역으로 옮겨 몇 대에 걸쳐 독자적인 군벌로 군림하였다.
이렇듯 일부 고구려유민들은 이런 저런 자취를 조금 남겼지만, 당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대다수인 일반민은 장졸들에게 전쟁포로로 주어져 노예로 처분되기도 하였고, 변경지대나 황무지에 집단 정착케 되어 어려움과 천대 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자취 없이 동화되어갔다.
한편 고구려의 지배 하에 있던 말갈족 사회도 고구려 멸망 후 큰 변화가 있었다. 7세기 대의 말갈 7부 중 제일 서쪽에 거주하던 속말말갈은 그 일부가 당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일부는 원주지에 있으면서 고구려 부흥운동과도 관계를 지니는 등 격렬한 진통을 겪었으며, 일부는 당군에 종군하는 등 다양한 양태를 나타내어 전체적으로 분산되어졌다. 당의 영주지역으로 이주하였던 속말말갈인들은 7세기 말 대조영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하여 발해를 건국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백산말갈(白山靺鞨)은 일찍부터 고구려에 협력하였던 관계로 전쟁 피해를 심하게 받아, 고구려 멸망 후 그 무리의 다수가 당으로 끌려갔다. 안거골부(安車骨部), 호실부(號室部), 백돌부(伯咄部) 등의 말갈 부족들은 고구려에 협력하여 전쟁에 참여하였던 만큼, 668년 이후 그간 말갈 사회에 개입하여 작용해왔던 고구려의 세력과 조직이 붕괴되자 말갈족의 기존 질서도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고구려에 협력하였던 관계로 다른 말갈족 촌락들의 이탈과 저항을 받게 되어 “분산 미약”하게 되었다. 그 대신 철리부(鐵利部)·월희부(越喜部) 등과 같은 새로운 말갈 부족들이 두각을 나타내었고, 고구려 영향권 바깥 지역에 있던 흑수부(黑水部)가 강성해졌다.
그러나 가장 강성하다는 흑수말갈도 대추장이 없이 열여섯 부락으로 나뉘어 자치를 영위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른 말갈족도 같은 형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소규모 단위로 계속 동부 만주지역으로 유입하여 각지에 분산 정착하였다. 세월이 흘러 전쟁의 상흔이 회복되면서, 이들이 지닌 높은 생산력과 문화는 이 지역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신라와 당의 전쟁 결과에 따라 7세기 종반 이 지역은 국제적으로 힘의 공백상태가 되었고, 각지에 산재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촌락들이 각지에 산재하여 자치를 영위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들 집단들을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적 구심력의 형성은 요서지역에서 탈주해온 대조영 집단의 등장을 기다려야 하였다.
7) 고구려사의 역사적 의의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평양 땅에 외국의 통치기구가 설치된 것은 B.C. 108년 고조선(古朝鮮)이 망하고 낙랑군 조선현(朝鮮縣)이 설치된 이후 776년 만이다. 낙랑군과 안동도호부는 동일하게 평양지역에 설치한 중국왕조의 통치기구였지만, 이 지배 기구를 설치하는 과정은 양자가 판이한 면을 보였다. 즉 한제국이 고조선을 멸망시키는데 육군 5만과 해군 8천이 동원되어 1년여의 공방전이 소요되었다. 평양 지역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은 그 뒤 400여년을 지속하다가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구축되었다. 그에 비해 668년 평양성 함락에는 수와 당 2개 왕조에 걸쳐 70년이 소요되었다. 통일중국왕조인 수는 고구려 원정에서의 패배가 주요 원인이 되어 멸망하였다. 당은 오랜 전쟁 끝에 신라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어 설치된 안동도호부는 불과 8년 만에 고구려부흥운동군과 신라에 밀려 만주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차이를 낳게 된 것은 무엇보다 B.C. 108년과 A.D. 668년 사이에서 일어났던 변화에 기인한다. 즉 고조선사회와 중국의 전국시대 사회 간에는 현격한 문화적·물질적 격차를 보였다. 진·한제국이 성립한 뒤에도 그 격차는 여전하였다. 그 결과는 고조선의 멸망과 한군현의 설치로 나타났다. 기원전 108년 이후 예·맥·한족의 여러 집단들은 한편으로 한군현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한군현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자기사회의 발전을 도모하여, 중국사회와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선두에서 이런 움직임을 이끌어나간 것이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문화는 신라·백제·가야 등에 전해져 그들의 발전을 견인하였다. 삼국시대의 후반에 들어서, “문자와 무기가 중국과 같다”라는 상징적 표현이 함축하고 있듯이, 한국고대사회는 중국고대사회와 별다른 큰 격차 없이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70여 년에 걸친 수·당제국과의 항쟁, 이은 나당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바이다.
기원 전후 무렵부터 668년에 이르는 고구려의 존립기간은 삼국시대의 대부분을 점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고구려국은 작은 성읍국가에서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아우르는 큰 영역국가로 성장하였고, 그 영역 내의 예(濊)·맥(貊)·한(韓)계의 여러 집단들과 일부 한인(漢人)과 말갈인들을 융합하여 고구려인이라는 보다 큰 단위의 족속을 형성하였다. 그와 함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여러 갈래 문화를 수렴하고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건설하였다. 고구려 문화는 신라·백제·가야와 바다건너 왜국에 영향을 주었으며, 말갈족은 고구려 문화의 훈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곧 고구려는 고대 중국사회와 고대 한국사회 간의 발전의 격차를 극복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독자성과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건설하였으며, 고구려인은 한국인의 형성에 한 축이 되었다.
고구려의 문화
1. 문학과 예술
1) 한문학
고구려에서 이른 시기부터 한자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2세기 중반 고구려의 관인으로 주부(主簿)가 보이는데, 주부는 원래 현(縣)의 속리(屬吏)의 직명이었다. 현토군의 지배에서 벗어난 뒤, 이 속리의 명칭을 습용하여 고구려왕 휘하의 실무행정을 주관하는 관인의 직명으로 삼았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각 시기 문서행정의 보급이 어느 정도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고구려 국가의 성장에 따라 점차 그 보급이 확대되었을 것이다.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세웠는데, 이는 문서 행정의 보급을 전제로 한 조처였다. 그런 만큼 한자와 한문 보급이 상당히 진전되어진 상태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율령의 반포와 지방제도의 확충에 따라 한문은 관리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불교의 공인과 함께 한역(漢譯) 불경(佛經)의 보급 또한 한문 보급을 촉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문 사용이 널리 행해지면 질수록, 구어와 문어 사이의 불일치에 따른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한자의 음과 훈(訓: 새김)을 빌어서 우리말을 기록하는 차자표기법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지명·인명·관명 등의 표기에 쓰였다. 이어 이두(吏讀)와 같은 표기법이 고구려에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이 신라에 전해져 더 진전된 형태로 발달하였다.
한편으로 한문학(漢文學)이 발달하였다. 이 시기 한문학 작품으로는 한시(漢詩)와 비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시는 노자(老子)의『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을 원용한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는 남녀간의 애틋한 애정을 표현하였다. 고구려의 비문으로서는 광개토왕능비(廣開土王陵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있고, 묘지(墓誌)로서 중급 귀족인 모두루(牟頭婁)의 묘지 등이 전해진다. 장중한 예서체(隸書體)의 광개토왕능비는 이 시기 한문학의 높은 수준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광개토왕의 훈적을 간결하게 압축해서 표현한 부분은 사료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한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은 역사서이다. 고구려에서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의 사서가 편찬되었으나, 그 실체가 온전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 내용은 몇 차례의 전승 과정을 거치면서 윤색되어져, 그 일부가 중세사서인 현전하는『삼국사기』에 반영되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2) 고분벽화
고구려의 고분은 그 나름으로 종합예술의 결정체였다. 특히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그러하다. 적석총의 경우, 소박한 무기단 적석총에서 장군총(將軍塚)과 같은 정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계단식 적석총에 이르기까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시기의 축조양식을 보여준다. 적석총에 이어 고분의 주된 양식이 된 것은 석실봉토분이다. 석실봉토분 중에는 무덤 안길과 무덤방의 사방 벽과 천정에 벽화를 그렸던 것들이 있다. 대부분 평양과 집안 일대 지역에 밀집해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숫자는 90여 기(基)에 달한다. 고분벽화는 그 소재에 따라 생활풍속도, 장식문양도, 사신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 고분벽화의 주된 화제(畵題)는 생활풍속도였다. 이어 장식문양도, 사신도 순으로 주된 화제가 변천해갔다. 생활풍속도에서는 묘주의 가정생활 모습, 그의 막료·하인 등의 인물도, 외출 때의 행렬도, 사냥하는 모습, 전투도, 묘주 인물상, 성곽도, 가옥 모습 등이 그려져 있어, 당시 생활상을 생생히 전해준다. 이들 초기 고분벽화는 막돌을 쌓아올린 무덤 벽면에 두텁게 회를 바른 뒤 회가 채 마르기 전에 그려졌다. 안악3호분, 춤무덤, 씨름무덤 등이 대표적인 초기 벽화고분이다. 후기에는 묘실 벽면의 고르게 다듬은 판석에 바로 그림을 그리는 식이 유행이었다.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강서대묘 등은 웅혼한 화필과 빼어난 색감의 벽화로 유명하다. 이들 고분벽화를 통해 볼 때 고구려 후기의 벽화에는 생동감과 역동성을 지닌 활력이 여전하였다. 곧 문화적인 측면에서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이미 기력이 쇠잔해져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 아니라, 목 잘린 해바리기처럼 외부세력의 침략에 의해 멸망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고분을 크게 축조하는 것은 내세를 현세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지는 세계로 보는 계세적(繼世的) 내세관에 따라 죽은 자가 내세에서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많은 물자와 사람 등을 넣고 시체를 잘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불교나 도교 등이 퍼지면서 이런 계세적 내세관을 떨치고, 내세는 현세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불교적인 전생적(轉生的) 내세관이나 도교사상에 따른 승선적(昇仙的) 내세관이 퍼져나갔고, 그런 면은 벽화 내용에도 반영되어 연화전생도(蓮花轉生圖)나 승선도(昇仙圖) 등이 그려졌다. 사신도는 중국에서 한대 이래로 유행하던 바로서, 도가적(道家的) 세계관의 영향을 나타낸다.
3) 음악과 춤, 놀이문화
고분벽화에는 음악·춤·교예 등에 관한 내용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고려악, 백희).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3호분의 무덤 안길에 꼬는 동작으로 춤을 추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소그드인 무용수가 그려져 있고, 장천 1호분 현실 북벽 상단에 채찍을 든 사람이 가면을 쓴 사람을 따라가는 소그드 대면극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각저총, 무용총, 안악3호분 등 비교적 이른 시기의 생활풍속도 벽화에서 씨름과 수박(手搏)이 주요 부분을 차치하고, 이어 장천1호분, 수산리, 약수리, 팔청리 벽화 등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의 것들에선 다양한 재주와 곡예를 주 내용으로 하는 백희기악도(百戱伎樂圖)가 그려져 있다. 씨름과 수박이 주요 구성요소였던 잡희(雜戱)에, 서역(西域: 중앙아시아)으로부터 전해진 다양한 도구와 동물을 이용한 곡예나 가면극이 추가되면서 더욱 다양해져 이를 통칭해 백희라고 불렀다. 교예를 하는 서역인들이 실제 고구려에 왕래하였던 것 같고, 서역의 음악과 춤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고구려의 백희가 신라에 영향을 주고 고려로 이어졌던 것 같다.
2. 건축-성
고구려인들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축조물은 성곽(城郭)이다. 성은 평지성(平地城)·산성(山城)·평산성(平山城) 등으로 나눠지는데, 고구려 성의 대부분이 산성으로서, 산의 능선을 활용해 성벽을 쌓았다. 고구려 산성의 다수가 고로봉식(栲栳峰式) 또는 포곡식(包谷式)이라 불리는 형태를 지녔다. 즉 뒤에 높은 주봉우리를 배경으로 해서 계곡을 끼고 좌우 능선을 따라 내려와 평지에 닺게 하는 성벽을 축조하여, 성내에 일정한 공간과 수원(水源)을 확보하는 형태이다. 모양이 안락의자처럼 보인다. 성벽 축조 재료에 따라 석성(石城), 토성(土城),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산성은 둘레가 1~2백 미터에 불과한 보루성(堡壘城)에서부터 10㎞가 넘는 대형 산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 대형 산성들은 적지 않은 경우 지방 행정단위의 치소(治所)였던 것 같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들여쌓기로 쌓았으며, 치(雉)와 옹성(甕城)이 있는 예도 있다. 평지성인 요동성의 경우, 요동성총(遼東城塚) 벽화에 그 평면도가 전해져, 전모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 평산성은 평지성과 산성을 결합한 형태로서 전자의 편이성과 후자의 방어에 용이함을 결합한 독특한 면모를 지녔다. 평양성(장안성)의 경우가 그 전형이다. 장안성은 그 내부가 북성(北城)·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성과 외성에는 정연한 구획이 지워져 계획도시의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3. 민속
고구려의 민속으로서 후대에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솔서혼(率壻婚)적인 혼속(婚俗)과 희생물로 돼지를 쓰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돼지를 인간계와 영계(靈界)를 이어주는 신성 동물로 여겨, 이를 하늘에 올리는 제사에서 희생물로 썼다. 이런 민속은 오늘날에도 무속 제사와 각종 공사 관련 제사 등에 돼지머리를 제상에 올리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세기 전반까지도 간간히 행해지던 솔서혼은 결혼 후 사위를 데리고 사는 혼속이다. 이 혼속은『삼국지』동이전에서 전하는 고구려 혼속인 서옥제(婿屋制)와 연결된다. 즉 결혼식 후 신부 댁에서는 새로이 작은 집[婿屋]을 지어놓고, 사위가 저녁이 되어 신부 부모에게 서옥에 들어가 잘 수 있게 허락해줄 것을 청하기를 몇 차례 하면 이를 허락하였다. 사위는 처가살이를 하다가 첫 아이가 태어나 어느 정도 자라면 처와 아이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갔다. 즉 처를 맞이하는 댓가로, 다른 말로 하면 처가의 노동력 손실을 보상하는 의미로, 처가에 수년간 노동 봉사를 하는 혼속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아이와 외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이 함을 도모한다는 기능도 있다. 이 서옥제 혼속은 이후 시기 가난한 사람의 혼속으로 행해졌던 솔서혼, 즉 처가살이 혼인 양식과 연결되는 바이다.
4. 종교
1) 불교
불교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그것은 다분히 기복(祈福)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391년 고국양왕의 하교(下敎)에서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였음은 그런 면을 잘 말해준다. 이런 측면은 당시 가람(伽藍) 배치도를 통해서도 확인되어진다. 498년에 세워진 평양의 청암동 절터를 보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이 있고 탑과 금당의 평면적 비율이 0.7 : 1이다. 탑의 평면적 비율이 후대에 비해 매우 높고, 사원 구조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런 가람 배치와 탑의 비중은 석가모니의 사리나 그와 연관된 물건을 봉안하는 곳으로 여겨진 탑이 당시인의 주요한 신앙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또 당시의 신앙이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과 해탈을 위한 자신의 수행보다는, 사리의 영험에 의거하려는 신비적이고 기복적인 면이 강했음을 말해준다.
고구려 불교의 특성 중 하나는 왕실 불교 내지는 국가불교적인 면이다. ‘왕이 곧 부처’임을 표방하는 북방불교가 전해졌고, 왕실은 이의 홍포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승려들은 왕권의 존엄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 함양에 적극 복무하였다. 사찰에서는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전사한 이들의 영혼이 왕생극락(往生極樂)하기를 기원하는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와 같은 법회들을 국가적 행사로 개최하였다.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이 동일시되었다. 이런 면들은 백제나 신라도 동일하였다.
불교 수용 이후 시간이 흐름과 함께, 점차 불교 교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었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일 뿐이며, 독자적인 존재성(存在性: 自性)이 없다고 보아, 만유(萬有)의 실상은 공(空: sunya-ta)이라고 주장한 삼론학(三論學)이 널리 퍼져나갔다. 삼론학에 조예가 깊은 승려 혜관(慧灌)은 625년 왜국에 파견되어 삼론학을 홍포하여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시조가 되었다. 승려 혜자(慧慈)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어 삼론학을 널리 펴 일본 삼론종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 말기에는 일체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지녔다고 주장한『열반경(涅槃經)』이 전해졌다. 승려 보덕(普德)이 이 경전에 밝았다. 그는 7세기 중반 연개소문이 도교를 장려하는데 반발하여 백제로 이거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통일기 신라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의 확산과 함께 점차 불교적 윤리관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내세관의 변화와도 결합되었다. 불교 수용 후 종전의 지배적 내세관이었던 계세적 내세관이 점차 바뀌어졌다. 내세는 현세의 삶이 무대를 바꾸어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죽은 자는 현세에서 저지른 자신의 업(業)과 쌓은 공덕(功德)에 따라, 즉 현세에서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불교적 윤리관에 의한 평가에 의해 내세의 삶이 주어진다고 여기는 전생적(轉生的) 내세관이 퍼져나갔다. 자연 계율에 맞게 생활하려 하고, 그에 따라 불교적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일반인의 생활 속에 널리 자리 잡아 나가게 되었다.
2) 도교
중국의 잡다한 민간신앙을 신선술(神仙術)을 중심으로 체계화한 것이 도교이다. 그에 비해 도가사상은 만물의 근원인 도(道)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도교에서 노자를 신격화하여 숭앙하고 도가사상을 교리정비에 많이 이용하였으나,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북위 때 정비된 종교 형태의 도교는 삼국 말기에 이 땅에 전해졌다. 한국 고대의 민간신앙에는 도교의 내용에 비길 수 있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도교는 별다른 큰 마찰 없이 수용되었고, 한국 민간신앙과 결합되어 이해되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 고분벽화에 여러 가지 모습의 신선이 등장함을 보아 이 무렵에는 도교가 상당히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조의 모산파(茅山派) 도교의 중심인물인 도홍경(陶弘景: 456~536)의『신농본초(神農本草)』에서 고구려의 유명한 약재로서 인삼과 함께 금가루를 정제한 일종의 연단(煉丹)을 진약(珍藥)으로 소개하였다. 이는 연단의 복용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 신앙이 고구려에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때의 도교는 교리체계와 조직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연개소문 때에 불교 사찰을 뺏어 도관(道觀)으로 삼고, 도사(道士)를 우대하는 도교진흥책을 취함에 따라 교단 조직을 갖춘 도교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교의 반발 등으로 도교가 그렇게 널리 퍼져나갔던 것 같지 않다.
한편 4세기 이래 노장(老莊)의 도가사상에 대한 이해도 진전되었다. 불교의 교의를 도가사상의 개념에 의거해 풀이하기도 한 격의(格義)불교도 도가사상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아무튼 도가사상은 당시 귀족층의 생활과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을지문덕의 시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도사사상에 대한 이해는 불교·유교에 대한 그것과 함께 고구려 후기 당시 최고 지식인들의 교양을 가름하는 주요한 한 부분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사연구 현황과 전망
고구려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그 단초가 열렸다. 한백겸(韓百謙)·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 주로 문헌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역사지리에 관한 문제들이 논급되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학풍이 미처 만개하기도 전에, 국권 상실과 함께 연구의 주도권은 일본인 학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의 랑케사학을 이어받은 일본 근대사학은 이른바 고등문헌비판에 의거해 관계 사료를 검토하여 모순되거나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제거하고 객관적으로 논증되는 사실들만을 취하여 고구려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자연 연구의 주된 부분은『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검토에 모아졌다. 그 결과로 제시된 것이 산상왕 이전의 기사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별하여, 고구려는 3세기 이후에 들어 비로소 믿을 수 있는 역사의 시대로 들어선다고 보았다. 그 이전의 왕계를 위시한『삼국사기』기사는 후대인의 작위에 의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초기 고대사 관련 기록에 대한 사료비판은 근본적으로 고대사를 복원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것인데, 일인학자들의 과도한 의고주의(疑古主義)적 자세와 고대사회와 고대 사료의 성격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 사료비판이 사료 말살로 치달아, 초기 고구려사를 허구로 돌리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특히 그런 작업은 유사 이래로 왜소하고 허약한 나라라는 한국의 역사상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식민지 현실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어지는 잘못을 낳게 하였다.
해방 후 뒤이은 분단과 전쟁에 따른 대립으로 고구려사의 무대였던 현장을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고구려사연구는 상당 기간 큰 진전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1960년대에 들어 북한학계에서 광개토왕능비에 관한 새로운 연구가 제기되어 논란이 이어졌다. 고구려사의 전개에 대한 북한학계 나름의 이해체계가 제시되어졌고, 그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고구려 초기부터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수립하였고 그 사회의 성격을 중세로 본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남한 학계에선 1970년대 이후 고구려사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의 사료적 신빙성 검토에서 비롯하여 고구려 초기의 국가 구조와 정치운영 형태, 고분벽화의 검토, 대외관계, 천하관(天下觀), 영역확대와 지방제도의 정립과정 등의 주제로 그 연구 영역이 확산되어 나갔다. 1990년대에 들어 한중관계(韓中關係)의 정상화에 따라 만주지역 답사가 가능해졌고, 나아가 21세기에 들어 평양 방문이 가능해짐에 따라, 고구려사의 무대였던 지역에 대한 접근과 북한 및 중국학계와의 직·간접 교류는 연구를 촉진시켰다. 아울러 새로운 연구 인력의 확충과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대한 이해의 축적은 연구역량을 크게 강화하였고, 상당한 연구 성과를 내었다.
한편 1990년대 이후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연구가 양적, 질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21세기에 들어 중국의 국가적 사업인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따른 일련의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고구려사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사에 대한 기존의 이해체계를 변개시키려는 것이었다. 고구려사의 성격을 중국사에 귀속되는 중국의 한 지방사(地方史)로 규정하고, 그에 입각해 고구려사를 해석하려는 것이다. ‘중국고구려사론(中國高句麗史論)’이라 할 수 있는 이 시각은 20세기 초부터 제기된 바 있고,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민족이론인 ‘중화민족론(中華民族論)’에 뿌리를 둔 것이다. 즉 현재 중국 영토 내에 포괄되어 있는 55개 소수민족들은 유사 이래로 중앙의 한족(漢族)과 긴밀한 교류를 하여 왔으며, 언젠가는 한족과 완전 융합하여 하나의 중화민족을 형성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현재 중국 영내의 소수민족들은 과거에도 한족과 교류 융합하여왔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는 한족에 완전 융합 동화될 것이다는 주장이다. 자연 이에 따라 “중국 영내의 모든 지역의 주민들은 중국인이며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사의 무대는 오늘날의 중국 영역 내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기되었던 것이 ‘일사양용론(一史兩用論)’이다. 즉 지금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고구려사의 귀속을 규정하려하니,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에는 중국사이고 그 이후로는 한국사가 되어, 하나의 역사가 중국사도 되고 한국사도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427년을 경계로 고구려사의 성격과 그 귀속을 달리 규정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런 점을 의식하여 중국학계에선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즉 현재의 국경이 기준이 아니라 역사상 중국왕조가 가장 멀리 팽창하였던 시기의 경계를 기준으로 한 ‘역사영역론(歷史領域論)’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나라 제국의 영역의 남쪽 한계인 한강유역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 지역을 중국의 역사영역으로 설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강 이남 지역만이 한국사의 역사영역이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고구려사의 의의는 중국의 역사영역을 한족(韓族)의 나라들의 침탈로 부터 지켰다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는 일사양용론에 비해 더 적극적이고 팽창적인 시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본 입장에 서서 중국학계는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공식적인 논지를 여러 주제들을 통해 개진하였다.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고, 기자조선은 실재하였으며, 위만조선은 중국인들에 의한 정복국가였다고 풀이하였다. 그리고 이어 한군현(漢郡縣)이 설치되었고, 그 하나인 현토군에서 고구려가 발흥하였으며, 고구려는 중국의 고대종족인 고이족(高夷族)이 세운 나라이며, 예맥족(濊貊族)은 중국의 고(古)민족이었다고 하였다. 즉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영역에서 중국의 고대 종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고, 건국 이후 계속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중원의 왕조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어왔던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의 다수가 중국의 한족에 흡수 동화되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왕건의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은 그릇된 주장에 불과하며, 그리고 고구려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는 10세기 이후의 중국사서의 기술은 착오였다고 풀이하였다.
이런 중국학계의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검토와 비판이 행해졌다. 기자조선은 허구적인 전설에 의거한 것이며, 위만조선은 중국계 유이민과 고조선 토착민의 연합정권이었는데 이를 중국계 주민에 의한 정복왕조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며, 고조선 지역의 주민은 종족적으로는 예족이었고 일찍부터 농경과 청동기 문화를 영위해왔던 만큼 고조선 지역의 문명의 여명이 마치 한(漢)족의 이주와 정복에 의해 열린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사실에 어긋난다. 그리고 고구려인의 기원을 고이족으로 보는 견해는 근거가 없는 설이다. 즉『일주서(逸周書)』의 왕회(王會)편에서 성주지회(成周之會)에 참가한 종족 중 고이가 보이는데, 이 고이를 고구려라고 한 언급은 성주지회가 있었다고 하는 시기로부터 무려 천 육백여 년 뒤인 4세기 초 사람 공조(孔晁)의 주(注)가 유일한 것이며, 고이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이주하여 혼강 유역에 정착케 되었다는 이동경로에 대한 주장도 전혀 문헌적·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중국왕조와 고구려 간의 조공책봉관계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의례 상의 상하관계를 설정하는 정도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며, 더욱이 이를 고구려가 중국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상정하는 것은 역사적 실상에 부합치 않는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것은 한반도 중부 지역 주민들이 공유하고 있던 고구려계승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고구려유민과 발해유민의 다수가 중국 내지로 끌려가 한족에 흡수 동화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유민들은 한족들에 비해 절대 소수이며, 동화된 뒤에 이들이 고구려계승의식이나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한족 사이에 전혀 남기지 못하였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한족들 사이에 고구려 계승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중국고구려사론은 정치적 주장 이상의 객관적 근거를 지닌 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중국학계에선 이런 주장이 견지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안은 한국의 연구역량의 확충과 객관적 연구의 심화이다. 현지 조사와 발굴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서 일방적인 중국학계의 보고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객관적인 실증적 연구를 통해 고구려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되어지는 바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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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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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翰苑)』
『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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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서(北齊書)』
『북주서(北周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일본서기(日本書紀)』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노태돈, 집문당, 2009)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김일권, 사계절, 2008)
『고구려 남진정책연구』(백종오, 서경, 2006)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김현숙, 모시는사람들, 2005)
『고구려의 서방정책 연구』(이성제, 국학자료원, 2005)
『고구려와 비교해본 중국 한·위·진의 벽화분』(강현숙, 지식산업사, 2005)
『고구려정치사연구』(임기환, 한나래, 2004)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전호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고구려고분벽화연구』(전호태, 사계절, 2000)
『고구려사의 제문제』(손영종, 신서원, 2000)
『고구려사연구』(노태돈, 사계절, 1999)
『고구려 영역확장사 연구』(공석구, 서경문화사, 1998)
『한국사 5-고구려-』(국사편찬위원회 편, 1996)
『역주(譯註) 한국고대금석문(韓國古代金石文)』1(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김기흥, 역사비평사, 1991)
『조선고고학전서-고구려편-』(박진욱, 1991)
『고구려사』(손영종, 1990)
『고구려민족형성(高句麗民族形成)과 사회(社會)』(이옥, 교보문고, 1984)
『삼국사기연구(三國史記硏究)』(신형식, 일조각(一潮閣), 1981)
『동이전(東夷傳)의 문헌적(文獻的) 연구(硏究)』(전해종, 일조각(一潮閣), 1980)
『한국벽화고분(韓國壁畫古墳)』(김원룡, 일지사(一志社), 1980)
『사학지(史學志) 13-중원고구려비 특집호(中原高句麗碑 特輯號)-』(단국대사학회(檀國大史學會) 편, 1979)
『삼국시대(三國時代)의 미술문화(美術文化)』(진홍섭, 동화출판공사(同和出版公社), 1976)
『고구려사연구』(리지린·강인숙, 1976)
『한국고대사회연구(韓國古代社會硏究)』(김철준, 지식산업사, 1975)
『단재신채호전집(丹齋申采浩全集) 상(上)』(신채호, 형설출판사(螢雪出版社), 1972)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의 연구(硏究)』(이홍직,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 1971)
『한국미술문화사논총(韓國美術文化史論叢)』(고유섭, 통문관(通文館), 1966)
『평양성』(채희국, 1963)
『高句麗史と東アジア』(武田幸男, 1988)
『廣開土王陵碑の硏究』(李進熙, 1972)
『通溝』(池內宏, 1938)
『高句麗考古』(魏存成, 1994)
『廣開土王碑硏究』(王健群,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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