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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고조선 (古朝鮮) 과 단군신화(檀君神話)

운영자 2004.04.14 07:35 조회 수 : 1294 추천: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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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古朝鮮)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이라고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BC 2333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세웠다는 신화상의 단군조선과 BC 108년 중국 한(漢)나라에 의해 멸망된 위만조선(衛滿朝鮮)을 함께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신화적으로 정리된 것으로서, 그 연대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이 계속 나오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서북부에 청동기문화가 발전하는 과정과 고조선사회의 발전과정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치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아직까지 학계의 통일된 정설은 없다. 다만 현재까지 발표된 다양한 견해들을 대략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고조선은 처음부터 망할 때까지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위치했다는 견해이다. 문헌상의 근거로는 〈사기〉 조선전에 조선과 연(燕)의 경계로 표시하고 있는 패수(浿水)를 청천강으로,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단군이 도읍으로 정한 아사달(阿斯達)을 평양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의 무제에 의해 설치된 4군 중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일대에 다수 분포하고 있는 한식 유적·유물들을 통해 볼 때 지금의 평양 일대였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도성이었던 왕검성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의 위치는 자연히 평양 일대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고조선의 영역은 현재의 평안남도 일대로 국한되는 셈이다. 이 견해는 낙랑군의 위치나 고조선 최후의 단계인 위만조선 도성이었던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올바른 해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고조선 역사와 문화의 기원은 위만조선보다 훨씬 이전 시기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위만조선의 위치만으로는 전체 고조선의 위치를 논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다음은 현재의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일대에 위치했다는 견해이다. 이는 중국의 고문헌에 나타나는 강이나 산 등의 위치 비정에 의해 패수를 다링 강[大凌河]으로, 열수를 랴오허 강[遼河]으로 본 결과 나타난 견해이다. 또한 여기에 청동기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뒷받침되기도 했다. 고조선 전기의 문화는 비파형동검 문화이며 비파형동검은 랴오허 강을 중심으로 한 랴오닝 성 일대에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고조선의 영역은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 서북부를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이럴 경우 평양 일대임이 분명한 낙랑군의 위치와 맞지 않는 점과, 과연 청동기 전기에 이처럼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는 영역국가가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이동설이 있다. 이 견해는 고조선의 전기 단계에는 현재의 랴오닝 성 일대에 고조선의 중심이 위치했으나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공 이후 서쪽 영토 2,000리를 빼앗기고 그 중심지가 평양 일대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BC 4세기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는 랴오닝 성 일대였으나, 위만조선의 도성인 왕검성이나 낙랑군의 치소(治所)인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일대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도 앞의 두 견해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비파형동검 문화가 랴오닝 성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 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세형동검의 중심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북지방이라는 점이다. 이동설은 몇 가지 세부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고조선의 위치문제에 관해서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으로 간주되고 있다.

국가형성과 사회성격
고조선은 청동기문화의 발전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애초부터 국가의 형태를 띠고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남만주와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세력집단들이 청동기문화의 난숙과 철기문화의 보급이라는 과정 속에서 이합집산과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국가를 형성했던 것이다.

고조선이 비록 국가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주변세력에게 하나의 구분되는 집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BC 7세기경이었던 것 같다. 중국측 자료인 〈관자 管子〉·〈산해경 山海經〉 등에는 이미 조선이라는 세력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다. 이 단계는 비파형동검 문화의 발전기로서 랴오닝 성 일대의 각 지역 집단 사이 또는 집단 내에서 경제적 우열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 인정되지만 계급분열과 이를 공고히 하는 장치인 국가의 발생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국가의 발생은 이보다 훨씬 뒤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 '범금8조'(犯禁八條) 단계에 가서야 확인된다. 범금8조는 〈한서〉 지리지에 낙랑조선의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다. 8개의 조항 중 3가지만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임을 당한다.
둘째,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한다.
셋째, 도둑질한 자는 남자일 경우에는 피해자의 노(奴)로 삼고 여자일 경우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배상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사람당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사회에 이미 노예의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며 아울러 사유재산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범금8조가 반영하고 있는 사회상은 사유재산의 발생에 기초한 계급분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범금8조는 노예의 지속적인 공급을 보장하고 노예소유자들의 계급지배를 공고히 해주는 법이라고 볼 수 있다. 범금8조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고조선 사회의 형편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대체로 BC 1000년 후반기,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단계의 산물이 아닐까 추정된다. 한편 중국측 사서에 의하면 고조선은 BC 4세기 후반경에 스스로 왕을 칭할 정도였고 연(燕)과 전투를 벌여 서쪽땅 2,000리를 상실하기도 했다. 이는 역으로 고조선이 이미 2,000리 이상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따라서 고조선은 늦어도 BC 4세기경에는 상당한 정치적 발전이 있었고 국가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의 사회구조는 불분명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앞의 범금8조에서 보았듯이 기본적으로 노예와 노예소유자 간의 대립관계를 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동기문화 단계의 씨족장 또는 지역수장이 전화(轉化)하여 나타난 노예소유자들은 경제적 부와 정치권력을 독점했으며 이러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법과 정치제도를 만들어냈다. 노예를 포함한 피지배계급들은 직접 생산에 종사하면서 사회의 기층을 이루었다. 물론 노예도 아니고 노예소유자도 아닌 일반 평민들도 광범위하게 존재했을 것이나 이들도 또한 국가 또는 노예소유자의 지배 속에서 항상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종족
고조선의 주민을 이룬 기본종족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나 아직 구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다. 고조선과 관련시킬 수 있는 종족집단으로서는 당시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 서북지방에 분포하던 숙신(肅愼), 조이, 예(濊)와 맥(貊), 동호(東胡), 산융(山戎), 호맥(胡貊) 등을 들 수 있으나 이중에서 예맥을 제외하고는 직접 고조선과 연관되는 집단은 없다. 다만 고조선의 기본종족이 예족 또는 예맥이냐, 아니면 고조선은 기본적으로 조선족으로 구성되고 주위에 예 혹은 예맥족들이 거처하고 있었느냐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멸망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는 위만조선이다. 위만조선은 BC 2세기초 무렵 중국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유망민들을 규합해 당시 고조선의 왕이었던 준왕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 위만에 의해 세워진 국가이다. 위만은 보다 발달된 철기문화를 가지고 이주하여 토착 고조선인들과 연합하여 국가를 건설했다. 사서에 나타난 바로는 상비적인 군사조직과 공적 권력기구로서의 통치기구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왕(王)·비왕(裨王)·상(相)·장군(將軍)·대신(大臣) 등을 들 수 있다. 위만조선은 발달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진번·임둔 등의 주변 세력들을 누르고 한반도 중부 이남의 여러 세력집단들과 중국 한(漢)과의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부를 취했다. 한편 한(漢)은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던 흉노에 대한 정벌이 일단락되자 위만조선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BC 109년 한의 무제는 수륙양면으로 대군을 파견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했다. 왕검성을 배경으로 벌어진 수개월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위만조선은 멸망되었다. 그 주된 이유는 위만조선의 지도층이 분열되어 결국 당시 왕이었던 우거가 주화파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한은 위만조선의 땅에 4군(四郡)을 설치하여 토착세력들을 통솔하려 하였으나 곧 치열한 항쟁에 부딪쳐서 진번(眞番)·임둔(臨屯), 뒤이어 현도군(玄郡)까지 축출되었다. 다만 낙랑군만이 위만조선의 도성이었던 왕검성을 기반으로 장기간 존속하면서 토착세력들이 성장을 방해했으나 이 역시 313년 한반도로부터 축출당했다.→ 기자조선, 단군조선, 위만조선

단군신화(檀君神話)

홍익인간
웅녀
특성
고조선의 건국신화
변신설화적 요소
신선사상의 반영
한국의 토테미즘
한민족의 형성
 
단군 (檀君)
우리 민족의 시조(始祖)이며 고조선(古朝鮮:단군조선)의 첫 임금. 단군왕검(檀君王儉) 또는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손자이고, 환웅(桓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웅녀(熊女)이다. 우리나라 국조신화(國祖神話)인 〈단군신화〉의 주인공이다.

단군신화
<단군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중국의 〈위서 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 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고려 후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 조선 초기 권람(權擥)의 〈응제시주 應製詩註〉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풍부하여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고기〉의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랜 옛날에 환인의 서자(庶子: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을 가리킴)인 환웅이 항상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 인간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번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여 3·7일(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호랑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 왕검이 당고(唐高:중국 3황 5제 중의 堯를 말함. 당시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조의 이름이 요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뜻이 같은 高자를 대신 쓴 것임) 즉위 50년 뒤인 경인년(庚寅年:당고의 즉위년은 무진년으로 50년뒤면 정사년이므로 경인년이란 표현은 아마 틀린 듯함)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弓자 대신 方자를 쓰기도 함)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의 호왕(虎王:주의 무왕을 말함. 고려 2대 혜종의 이름이 武이기 때문에 이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그밖의 다른 기록들도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단군신화의 해석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상 등장한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관한 것인 만큼 오늘날에는 민족 전체의 국조신화로 여겨지고 있으며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신화란 원래 당시의 현실 속에서 고대인이 경험한 것을 객관화시켜 형성된 관념이 간접적으로 표현된 사회적 의식형태의 하나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전하는 신화는 과거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완전한 형태로 정착된 것은 아니다. 역사발전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화도 오랜 세월 변천을 거듭하여 내용의 일부가 소멸하기도 하고 첨가되기도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때문에 학자들 사이에는 신화의 내용을 허구로 인식하여 〈단군신화〉와 관련된 고조선의 존재조차도 부정하는 견해로부터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다양하다.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를 관점의 차이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 수 있다.

<단군신화〉의 생성과정과 주인공에 관한 학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는 견해이다.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와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종족들이 백산(白山)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종족적 관계는 여하튼 간에 이 문화가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가 바로 단군과 부루(夫婁)라고 본다. 둘째, 이 신화가 삼신(三神)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 두 계통의 신화가 섞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융합된 것으로 이해했다. 셋째,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했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祭主)의 의미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다고 보아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넷째, 신화 또는 토테미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 민족 태고의 의식을 보여주는 사실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단군신화〉의 농경관계 기사를 곡물재배민족의 제의(祭儀)로 파악하고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 dual organization)로 간주하여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일광금기(日光禁忌)와 탈피(脫皮)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다. 다섯째, 단군신화에 나타난 곰숭배사상에 주목하여 이 신화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Paleo Asiatic)과 연결시키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논거로 고아시아족의 시조설화에 곰숭배사상이 포함되어 있고 자신들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었던 점, 최고의 샤먼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이 어원상으로 관련이 있다는 점, 텡그리의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고대신화에서 하늘과의 통로로 여겨진 신성한 나무) 관념이 신단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민족의 개국신화로 정착되는 과정에 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원래 고조선의 한 종족신화였던 〈단군신화〉가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전체 민족의 신화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편찬시기가 대몽항쟁기였던 점, 〈제왕운기〉에서 구월산(九月山)을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아사달산으로 보고 거기에 사당이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이 무렵부터 단군신화가 민족 전체의 신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을 모신 뒤로는 명실상부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신화〉가 처음부터 우리민족의 건국사화(建國史話)로 인식되었다고 보고 있다. 즉 고조선은 이미 BC 12세기 이전에 북경 근처의 롼허 강[河]서쪽 경계로 하여 동북부는 헤이룽 강[黑龍江] 밖까지 이르는 만주일대와 한반도 전지역을 영토로 하는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실재하고 있던 국가이므로 〈단군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며 따라서 단군은 그뒤 줄곧 개국시조로 인식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신화에 담겨진 역사적 현실과 그 시기 및 사실성 여부에 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다.

첫째, 〈단군신화〉가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1단계에서는 씨족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토템이 생겼고, 2단계에서는 군사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했으며, 3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뒤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으로 보았다.

둘째,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고대국가의 성립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우사·운사·선·악·곡·형 등 360가지 인간사 등의 단어들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여 〈단군신화〉에 나타난 사회가 부권(父權) 중심의 농경사회 내에서 계급분화가 이루어지고 지배자가 등장한 청동기시대 초기라고 보았다. 또한 곰과 호랑이, 환웅과 웅녀의 결혼 등의 내용을 통하여 토템을 믿는 몇 개의 종족이 결합하여 부족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셋째, 〈단군신화〉가 포용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를 고고학적인 연대와 관련하여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지역과 관련되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가 고아시아족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단군신화〉의 시대적 성격이 신석기문화와 연결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넷째, 〈단군신화〉를 4단계의 역사적 발전단계가 압축된 것으로 보아 무리사회 단계인 환인시대, 부락사회 단계인 환웅시대, 부락연맹체사회 단계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 국가사회 단계인 단군시대로 보아 한민족의 역사적 체험, 즉 인류사회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각 시대를 고고학 자료와 연결시켜 환인시대는 1만 년 이전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 환웅시대는 1만 년 전 전후부터 6,000여 년 전까지의 전기신석기시대,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는 6,300~4,300여 년 전(BC 2300경)의 후기신석기시대, 고조선시대는 BC 2300년경부터 BC 2세기말까지로 보아 신화의 내용 대부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함께 랴오닝[遼寧] 지역의 풍하문화(豊下文化:夏家店下層文化)가 청동기문화로서 단군의 개국연대와 연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단군신화〉를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언급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문헌에 보이는 자료를 토대로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 내의 화상석(畵像石)의 그림과 〈단군신화〉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이의 전파가 종족 이동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했다. 최근에는 이 견해의 바탕이 되는 무씨사당의 화상석이 단군신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밖에 단군과 관련된 문헌 중 도가(道家) 계통의 역사서인 〈규원사화 揆園史話〉·〈환단고기 桓檀古記〉 등을 제시하여 단군조선의 역사가 47대의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실사(實史)였음을 강조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이 역사서가 한말과 일제하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라는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한 점이 많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고 계속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의 고양과 관련하여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大倧敎)이다. 대종교는 1909년(융희 3) 나철(羅喆)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대종교에서 단군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이던 개천절(開天節)을 8·15해방 후 정부가 정식으로 국경일로 지정했다. 1945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령으로 공포되어 사용되던 단기(檀紀)는 고려말 우왕(禑王)의 사부였던 백문보(白文寶)가 사용한 예에서 처음 보인다. 요즘의 단기는 조선시대의 사서 〈동국통감 東國通鑑〉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요 즉위 25년 무진년으로 본 것에 근거하여, 단군 원년을 BC 2333년으로 정한 것이다. 5·16군사정변으로 군사정부가 집권한 뒤인 1962년 1월 1일부터 단기 사용을 중지시키고 공식적으로는 서기(西紀)만을 쓰고 있다.

참고문헌 (檀君神話)

단군기원 (檀君紀元)

우리나라 시조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고 즉위한 BC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연호. 줄여서 '단기'라고도 한다.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 魏書〉에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부르니 중국의 고(高:堯) 임금과 같은 때"라 했고, 같이 인용한 〈고기 古記〉에는 "단군왕검이 당고(唐高: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불렀다"고 했는데 이것이 연대환산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단군의 건국사실을 전해주는 우리 문헌으로는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帝王韻記〉를 비롯하여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통감〉, 권람(權擥)의 〈응제시주 應製詩註〉 등이 있지만 단군기원의 연대환산에 대하여 언급한 가장 오랜된 기록은 고려시대 백문보(白文寶)이다. 가령 〈고려사〉 열전 백문보조에 보면

"하늘의 기수(氣數)는 순환하여 700년이 한 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이면 한 대주원(大周元)이 되니, 이것이 황제(皇帝)와 왕패(王覇)의 치난흥쇠(治難興衰)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므로 주년(周年)의 기회가 됩니다"라고 공민왕에게 글을 올려 단군기원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

20세기에 들어 대종교(大倧敎)가 창설되면서 단군기원을 썼는데 이 종교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을 체계화했다. 1909년(융희 3) 1월 15일 나철(羅喆)이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교리를 알리면서 시작되었는데 그밖에 대종교에서 갈라선 단군교(檀君敎)에서도 단군기원을 썼다. 그러나 단군기원을 공식적인 국가연호로 처음 쓴 것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이다. 1948년 9월 25일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그 부칙에서 "본 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고 법제화하여 단군기원을 국가공용연호로 쓰게 되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후 1961년 12월 2일 법률 제775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그 부칙에서 "본 법은 서기 1962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법률 제4호에 관한 법률은 이를 폐지한다. 본 법 시행 당시의 공문서 중 단기로 표시된 연대는 당해 연대에서 2,333년을 감해 이를 서력연대로 간주한다"고 법제화하면서 단군기원 대신에 서력기원을 쓰게 되었다.

(스룹바벨선교회 주 : 1961년부터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를 단군기원에서 서력기원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박정희가 하나님 손에 붙들려 고레스와 다리오 정권의 정치적 배경을 이루어준 인물이라는 데 대해 한 층 더 신빙성을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