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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이승만, "한국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부국강병 시대 열어"

운영자 2004.11.16 21:47 조회 수 : 1339 추천: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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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한국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부국강병 시대 열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국가 발전 기틀 마련

<지난 12일,13일 양일간에 걸쳐 연세대 상남기념관에서 개최된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재평가에서 발표된 내용을 요약게재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 거시적 재평가]


유영익
연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이 대통령은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신생 대한민국이 직면한 공전의 혼란과 6.25전쟁이라는 재앙을 극복하면서 대한민국의 안보와 외교, 군사, 경제, 교육 등 방면의 발전을 도모한 결과 신생 대한민국을 튼튼한 기반위에 올려놓았고 이로써 1960년대 이후 남한의 눈부신 번영에 근원적으로 기여했다.

이 대통령, 대한민국 건국에 절대적 공헌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절대적으로 공헌했다. 그는 1945년 10월 미국과 소련에 의해 군사적으로 분할, 점령당한 조국에 돌아와 미*소 양국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4대국의 5년간 신탁통치 계회에 따라 ‘타율적으로’ 한국 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배격하고 그 대신 유엔(UN)이라는 국제기구의 권위를 빌어 총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자율적으로’남한만의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박사는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대한민국 헌법 제정 작업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아 그 임무를 완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제헌국회의 대다수 의원들이 선호했던 내각책임제안에 반대하고 그 대신 대통령중심제 채택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의 정체를 ‘미국식’대통령 중심제로 낙착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 대통령이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쏟아지는 ‘독재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이같이 대통령 직선제를 무리하게 관철시킨 이유는 한국과 같은 신생공화국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대통령이 필요하며 그러한 대통령은 순박하고 슬기로우며 애국심이 강한 민중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국가 발전 기틀 마련

이 대통령은 집권기간 동안 외교 면에서 일련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대통령이 이룩한 여러 외교업적 가운데 백미는 1953년에 성사시킨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1953년 10월 1일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부터 발효된 이 조약의 체결로 대한민국은 적어도 형식상 미국의 ‘허수아비 국가’가 아닌 미국과 동등한 조약 상대국이 되었으며 나아가 미국의 군사적 보호막 아래 경제*군사*정치*문화 등 모든 면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6.25 전쟁 발발 직후 이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과 美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즉각적인 군사개입을 요청하여 미군의 참전을 실현했다. 전쟁 중과 휴전후 이 대통령은 끈질기게 미국으로 하여금 국군의 병력 증강, 장비의 현대화 및 훈련 등에 대한 지원을 촉구했다. 그 결과 그는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6.25 전쟁 발발 당시 10만 명(8개 사단)에 불과했던 국군의 총병력을 1952년에 25만 명으로, 그리고 휴전 성립 후 1954년에는 65만 명으로 대폭 증원하는데 성공했다.

이밖에도 한국군은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총 9,186명의 장교를 미국에 파견하여 첨단 군사지식과 기술을 습득했다. 이 대통령은 1958년 초 미국의 한반도내 전술 핵무기 배치를 허용함으로써 북한의 전쟁도발 가능성에 대한 억제력을 강화했다. 이로써 그는 한국인이 오랫동안 희구했던 ‘부국강병’의 꿈을 실현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을 아시아권내에서 무시 못 할 군사대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농지개혁, 과전법 이래 최대의 토지개혁

일찍이 청년시절에 “이젠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라고 갈파 한 바 있는 이 대통령은 상공업과 무역의 진흥을 통해 국민경제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 구상에 따라 그는 집권 초에 우선적으로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면서 상공업과 무역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특히 농지개혁은 6·25전쟁 발발 후 일시 중단 되었다가 1951년 4월 ‘농지개혁법 시행규정’을 통해 재개되어 남한 전역에 실시되었다. 그 결과 총경지의 약 40%에 달하는 89만 2천 정보의 땅이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재분배되었다. 한마디로 이 대통령 치하에서 완결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국기에 이성계가 단행했던 과전법이래 최대의 토지개혁으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근대적 교육제도 완비, 교육기적 이뤄

한편 이 대통령은 의무교육제도입 등 근대적 교육제도의 완비를 통해 교육 기적을 이뤄냈다. 해방당시 한국인의 약 80%는 문맹이었고, 일제로부터 어떤 형태이건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했다. 특히 의무교육제도는 6*25 전쟁 중 시행에 차질이 생겼으나 1954년에 마련된 ‘6개년 계획’을 통해 여행(勵行)된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력아동의 96%가 취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부터 천부인권 및  사민평등사상을 수용하고 독립운동 기간 스스로 평등주의를 실천했다. 이 대통령은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한국사회의 평등화에 기여했다. 첫째, 그는 전통적인 신분주의와 차별주의를 배격하고 남성과 여성에게 평등한 교육 및 취업기회를 보장함으로써 사민평등*남녀평등의 사회를 구현하는데 기여했다. 둘째, 그는 농지개혁을 통해 양반 지주들의 경제적 기초를 붕괴시킴으로써 한국의 뿌리 깊은 양반제도에 결정타를 가했다. 셋째, 그는 방대한 규모의 군대를 양성함으로써 남한의 전통사회에서 출세가 불가능했던 계층이 군문을 통해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집권기간 동안, 기독교 교세 급속도로 확장

청년기부터 한글 전용을 솔선수범 이 대통령은 1948년 10월 9일에 한글전용법을 공포함으로써 한글을 전용하는 것을 국책으로 추진했다. 동시에 그는 경무대에서 영어를 상용하며, 영자신문을 읽고 주요 공문서를 영문으로 작성하는 등 영어를 많이 사용했다. 이 대통령 집권기간에 나타난 새로운 문화현상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기독교(특히 개신교)교세의 확장이었다. 1919년 건국 청사진에서 정교분리를 강조한 바 있는 그는 기독교를 헌법적으로 장려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 모범 혹은 준(準)법적 방법을 통해 기독교를 장려한 결과 기독교(개신교) 교세가 급속도로 신장했다.  

달리 말하자면, 이 대통령 집권기간 남한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불교정권’ 및 조선왕조의 ‘유교왕조’와 비교되는 ‘기독교적’정권이 대두하였고 ‘기독교 시대’(Christian Era)가 열렸던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집권하면서 자신이 해방 전부터 오랫동안 준비했던 건국 구상에 따라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및 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실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으며 이러한 업적은 역사적으로 획기적 의의를 지닌 것들이었다.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

김필재기자  2004-11-16 오전 11: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