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스룹바벨선교회

일반 한장에 요약하는 한국 현대사 (조갑제)

운영자 2005.03.10 16:00 조회 수 : 1559 추천:262

extra_vars1 http://www.chogabje.com/board/board_read.asp?tablename=choboard&idx=2864&no=6&curpage=1&searchkey=%B0%A3%B0%E1&searchregion=4&how= 
extra_vars3  
 

한국 현대사의 흐름

----------------------------------------------------------------
*발전방향: 조국 근대화(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자유통일-조국 先進化로 나아가야 하는 道程에 있다.
*대한민국의 4대 재발견: 해양정신, 기업가정신, 尙武정신, 自主정신/장교단, 기업인, 기독교, 과학기술자
*국력의 양적 규모로는 세계 12위권, 삶의 질로서는 세계 40-50위권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다투는 세 나라 한국, 대만, 이스라엘은 모두 안보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나간 현대사의 중간결산은 통일을 어떻게 이루느냐에 있다. 門前까지는 잘 왔지만···
*기성세대·대한민국의 위대한 업적과 유산을 자랑하고 옹호하는 챔피언이 등장하여 현대사의 추억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어야 조국 선진화도 이뤄질 것이다.
----------------------------------------------------------------
前史: 신라통일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건국이 가능했다. 신라는 對唐결전으로써 唐軍을 한반도에 몰아냄으로써 한반도를 한민족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했다. 삼국시대엔 민족의식이 없었다. 韓民族은 신라통일로써 만들어진 同族의식을 딛고 장구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대한민국은 민족사의 정통이며 金正日 정권은 이단이다. 대한민국의 정통론은 신라통일에서 비롯된다. 신라통일의 정당성을 부정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설 자리가 없다.
----------------------------------------------------------------

1. 1945년 광복과 분단의 의미

·해양화: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사실상 섬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 해양세력과 손잡고 해외 지향의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미국 일본 서구 등 해양문명권의 일원이 되었고 이 선진문화권의 유산들-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과학과 합리정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봉건적 전통과의 결별: 한반도 분단은 자유 對 독재의 이념형 분단으로서 자유 선진 진영에 줄을 선 한국은 後進的 대륙세력 및 朝鮮朝的인 봉건적 전통과 결별하고 근대화로 나아가려는 데 있어서의 저항이 약화되었다.
·한미동맹: 해방군으로 진주한 미군에 의해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는 계기를 맺었고 미국을 통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2.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

·국민국가 건설과정: 주체적 근대화(산업화, 민주화) 道程의 시작이었다.
·국가이념: 헌법의 基調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설정됨으로써 「脫대륙, 脫후진적 전통, 脫주자학적 전통 이데올로기」의 근대화 혁명이 발진하는 틀이 갖추어졌다.
·국가 정통성: 건국과정이 유엔의 공인하 총선거로 이뤄짐으로써 한국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였다.
·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지도력: 그의 정치철학은 반공 기독교적 민주주의였고 통치행태는 「對外 개방적·실용적 권위주의」였다. 그는 『공산주의는 호열자와 같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반도에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등장한 실용적 집권자였다.
·군대의 등장: 국민국가의 생존 조건이자 국가 목표인 富國强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또 공산주의자들의 위협 속에서 건국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朝鮮朝 개국 이후 처음으로 군대가 중추세력으로 등장했다.
·남북대치상황의 본질: 1민족1국가의 정통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의 金日成 정권을 반란집단, 북한땅을 한국의 영토, 통일을 미수복지구의 수복으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그 뒤 남북관계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과 삶의 양식과 善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으로 굳혀진다.


3. 李承晩과 그의 시대: 건국과 호국의 구심점으로서 근대화의 礎石을 놓았다

·李承晩이란 축복: 아인슈타인이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된 격. 동서양의 최고 교양을 아우르고 민족적 사명감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한국 최초의 박사. 그의 경력과 경륜은, 한국과 미국의 합작품이나 한국인의 주체성과 혼을 견지한 자주 자존의 지도자였다.
·국군의 창설: 북한의 위협적 존재로 해서 강력한 상비군을 갖게 되었다. 이 국군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다음 시대의 근대화 주도능력을 키워갔다. 강력한 국군장교단의 등장은 朝鮮朝 500년간 잊혀졌던 尙武정신과 그에 수반되는 실용정신, 효율성, 과학과 합리정신을 우리 역사에서 되살림으로써 우리 민족이 진취적이고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민족성과 기풍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지개혁: 기득권층으로서의 지주계급을 없앰으로써 그 뒤 산업화와 민주화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사회갈등의 소지를 축소시켰다. 농지개혁으로 한국 赤化가 저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일제 시대 관료의 활용: 친일 경찰과 헌병들까지 이용한 부작용도 있었으나 근대국가 운영에 참여했던 경험자가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 동원되었다.
·6·25 전쟁 지도: 그의 카리스마는 후퇴하는 국군에게 저항과 반격의 의지를 심어준 구심ㅂ점이었다.
·6·25 전쟁의 의미: 한국은 자유세계의 선봉으로서 국제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함으로써 일본과 독일의 부흥, 대만의 수호에 기여했고 미국이 對蘇 봉쇄작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냉전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다. 동서냉전은 한국에서 시작되었으며 공산주의의 붕괴도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은 또 국내 좌익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체제수호와 근대화의 큰 걸림돌을 제거했다. 전쟁을 통하여 거대한 군사집단이 생겼고 이는 근대화 주도세력의 잠재력을 키워간다.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휴전협상에서 소외된 李承晩 대통령은 단독 北進, 반공포로 석방을 카드로 미국정부를 압박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끌어냈다. 안보의 틀을 한미동맹으로 굳힘으로써 산업화 시기 국방비의 증액을 최소화하면서 국가자원을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민주 교육의 강화: 1950년대에 양성되고 온존된 젊은 인력이 60년대 근대화의 인력으로 쓰여졌고 4·19 혁명의 주도층이 되었다. 그는 언론자유와 야당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제약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시대에 양성된 민주세력이 자유당 정권의 타도의 선봉이 되었다. 李承晩도 모든 성공한 지도자처럼 「자기 성공의 실패자」였다.
·애국적 기업인의 등장: 유교적 실용주의, 한국적 상업정신(개성상인), 기독교적 직업윤리, 그리고 애국심으로 무장한 창업주群이 자본주의의 전도사 내지 개척자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李承晩은 좋은 후원자였다.
·헌법과 현실의 갈등: 그의 시대는, 민주주의의 경험이 전무한 후진국이 선진 민주주의 헌법체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현실과 법과의 괴리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 선진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으로 후진 조국의 현실을 재단할 때의 부정적 자학적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李承晩 정권의 붕괴: 자유와 복지를 다같이 갈망하는 국민들, 특히 젊은 군인들과 학생들의 커지는 에너지를 충족시켜주기에는 너무 노쇠하고 경직된 자유당 정권의 정치행태가 무리한 부정선거를 촉발시켰다. 李承晩 대통령의 하야 결단이 최소한의 유혈로 정권 이양을 가능하게 했다.

4. 張勉 정부: 善意의 실패

·붕당정치 再現: 李承晩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정치풍토에서 내각제를 실험하자 한국의 전통적인 붕당정치 행태가 再演되었다. 민주당의 新舊派 분당 사태는 정치 지도력의 약화를 가져와 4·19로 촉발된 국민들의 욕구를 감당할 수 없었고 이 틈을 탄 좌익세력의 등장은 반공정신과 개혁의지에 불타던 장교단에게 심각한 체제불안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때는 6·25가 끝난 지 불과 7년이 흐른 때였다.
·민심과 軍心의 이반: 張勉 정부는 우파 정권이었으나 좌익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군 장교단의 불안과 불신을 불식시킬 수 없었다. 일반 국민들도 민주화에 따른 사회불안에 진절머리를 냈으며 군인들의 등장을 요청하는 목소리도 커갔다. 민심과 함께 물려 돌아가는 軍心도 張勉 정부에 등을 돌려 5·16 주체세력들은 거의 공공연히 쿠데타 모의를 할 수 있었다.
·善意의 실패: 張勉 정부는 그러나 경제개발계획 작성 등 나름대로의 국가 발전 계획을 세우는 노력을 하였으나 민주당 분열에 기인한 지도력의 약화로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그의 실패로 내각제는 허약한 정치체제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강하게 주었고 대통령 중심제의 리더십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5. 5·16일 군사혁명-700년만의 군인 主導 국가개조

·왜 혁명인가. 근대화라는 가장 큰 규모의 국가개조를 가능하게 한 주체세력이 있었고, 지도자 朴正熙의 뚜렷한 목표와 이념과 전략이 있었다. 1963년에 그가 제시한 비전은 초과 달성되었다. 국민의 지지가 60% 이상이었다.
·군사문화의 확산: 13세기 고려 무신정권 이후 최초의 군사정권. 군사문화가 가진 실용성, 효율성, 과학과 합리주의, 자주성, 富國强兵의 철학 등 긍정적인 면이 획일성 등 부정적인 면을 압도하고 국가개조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 그 뒤 3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한 군사문화는 민족사의 주요 요소가 될 것이다.
·장교단의 개혁성: 당시의 군 장교단은 한국의 최강이자 최선진 개혁 집단이었다. 10%가 미국 유학 경험자로서 외무부 직원보다도 높았다.
·商工農士로의 신분혁명: 그는 士農工商의 후진적 신분서열을 商工農士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자, 언론인, 정치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기업인 군인 관료 과학기술자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킨 점에 그의 근대화 혁명적 이념의 핵심이 있다. 기업인과 군인들이 사회의 주류층을 형성한 것은 우리 민족사상 처음이다. 이들 근대화 혁명의 주체세력이 득세하면서 한국 사회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實事求是的인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朴正熙의 혁명적 역사관과 자주적 민주주의觀: 朝鮮朝의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무능, 위선, 守舊로 비판했던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우상 숭배하는 야당과 지식인들을 사대주의로 인식했다. 그의 주체적 생각은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로 표현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한국식 민주주의로 확산, 정착시키지는 못한 것이 한계였다. 그의 한국적 민주주의론은 후발 開途國의 개발전략을 뒷받침하는 국가지도 이념의 한 모델이 되었다.
·빵 다음에 자유: 朴正熙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주의는 경제발전과 물질적인 토대를 딛고 설 때만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문민세력에 대한 경멸: 그는 5·16을 일으킨 데 대해서 죄의식이 없었다. 그는 민주당과 자유당을 똑 같은 위선적 정치집단 또는 守舊세력으로 보았다.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란 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 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

6. 朴正熙와 그의 시대-조국 근대화의 騎手

·朴正熙 리더십의 본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사명감과 서민성을 바탕으로 깔고서 일본적인 武士道 정신과 국가주의 및 미국식 합리적 조직 경영법을 종합한 韓日美의 합작품.
·朴正熙 전략의 핵심: (정신적)自助-(경제적)自立-(국방과 정치의)自主의 3단계 발전론. 그는 국가 주도에 경쟁개념을 도입했다. 새마을 사업의 원칙은 잘하는 마을을 집중 지원하고 못하는 마을은 방치하여 차등과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朴正熙의 비전: 민족중흥, 조국 근대화, 자주국방, 한국적 민주주의.
·동양적 실용정신: 朴正熙는 管仲-명치유신 지도자-鄧小平-李光耀로 이어지는 동양의 실용적 정치 지도자型에 속한다.
·결정적 선택-수출입국: 좁은 민족주의가 선택하기 쉬운 수입대체 전략을 폐기하고 수출입국 전략으로의 방향전환을 통해서 우리 기업은 처음부터 국제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先경제, 後민주: 先경제, 後자주국방 건설, 先건설, 後통일의 전략에서 보듯이 朴正熙 정권은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孟子)는 동양적 실용주의 노선을 실천했다.
·남북한 逆轉: 1960년대에 남한은 경제제일 노선, 북한은 군사제일노선 추구. 1970년대에 남한은 견실한 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자주국방을 추진했으나, 북한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의 누적으로 경제파탄에 직면하여 남북한 국력의 逆轉이 일어났다.
·결정적 선택-朴正熙식 세계화 전략: 수출입국 정책, 한일 국교정상화, 월남파병, 중동건설 시장 진출은 한국인의 활동무대를 세계로 확대시켰다.
·민족사 세번째의 국제화: 신라통일 前後, 몽골 지배하,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한민족은 세계사의 중심부에서 활동공간을 확보했다. 이는 唐, 몽골, 미국 등 당대 최대강국과 친선 및 동맹관계를 유지한 덕분이다.
·維新시대의 功過: 1972년부터 7년간은 국력의 조직화, 효율의 극대화에 성공한 권위정부에 의한 중화학 및 자주국방 건설기였다. 이 기간에 언론 및 정치의 자유는 제한되었으나 경제의 고도성장으로 석유위기를 돌파하고 필리핀, 타이, 말레이시아, 북한 등을 추월하여 질적으로 다른 국가로 승격했다. 정치의 코스트가 최소화되면서 공직자 부패도 최소화되었던 시기였다.
·결정적 선택: 1973년 석유쇼크와 중화학공업 전략 밀고 나가기: 유신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1974년부터 본격화되는 중동건설시장 진출은 월남진출의 경험을 딛고 가능했다.
·근대국민국가의 기본시스템을 구축: 군의 현대화, 방위산업 진흥, 직업 공무원조직의 확립, 법령정비, 의료보험제도, 고속도로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축적, 국책 연구기관의 창설, 특히 KIST와 원자력 연구소 등 과학기술 진흥.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저항과 미국의 압력: 민주주의를 하느님처럼 모시려는 세력에 대한 朴正熙의 경멸과 代案 모색은 다수 지식인과 국민들이 판단의 기준을 선진 민주주의로 삼고 있는 대세 속에서 실패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념화한 이념집단을 만드는 데 실패한 이유는 지식인층의 반발로 근대화의 산물인 중산층을 의식화시키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카터 집권후 韓美 갈등: 카터의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 공약.
·중산층 이반-釜馬사태의 충격: 근대화 성공의 산물인 도시 중산층이 학생 야당과 손잡고 정권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정권에 충격을 주었다. 金載圭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 뒤 한국 정치 변동의 결정적 역할이 도시 중산층의 손으로 넘어간다.
·釜馬사태의 원인: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 민주화 운동,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고와 부가가치세 징수, 金泳三 의원직 제명.
·10.26 사건의 의미: 「朴正熙는 봉건적 잔재 및 사대주의와 싸우다가 戰死했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그의 죽음은 適期에 피로한 旗手를 교체하여 한국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인간 朴正熙: 인정과 눈물이 많은 鐵人·哲人·超人. 『난 괜찮아』

7. 신군부의 재집권 과정-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서···

·12·12 군사변란의 성격: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朴正熙 친위세력의 군내 헤게모니 장악기도가 유혈사태를 촉발하여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집권으로 매진하게 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朴正熙의 지도이념을 신념화하지 않은 권력기생 체질이 강해 朴正熙가 사라지자 지리멸렬하여 주도권을 상실했다.
·중산층의 중립-군부 재집권: 1980년 봄 정치자유화를 계기로 야당은 분열하고 사북사태 등 혼란이 발생했으며 제2차 석유위기의 여파로 경제는 不況 국면이었다. 중산층의 불안이 증대했고 학생시위에 대해 냉담한 중립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탄 신군부의 집권 시도는 광주에서 국지적 저항에 직면하였으나 다수 국민들의 非호의적 묵인하에 성공했다. 10·26사건의 한 동기가 되었던, 부마사태 때의 중산층과 학생들의 합세는 이때에는 이뤄지지 않아 야당, 학생 등 민주화 운동 세력은 고립되었다.
·미국의 중립: 미국은 정권 교체기에 있었고 카터는 이란 인질 사건에 매달려 신군부의 집권을 저지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8. 全斗煥 정권-유혈 집권, 경제의 안정적 발전, 單任 실천

·3低시대의 경제약진: 박정희 시대 말기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 부작용을 정리. 국제 석유가 안정에 힘입어 엘리트 경제관료들의 일관된 정책수행을 대통령이 뒷받침하여 물가를 잡고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등 견실한 성장세 지속. 경제호조가 민주화의 충격과 혼란을 흡수함으로써 평화적 민주화 과정이 가능해졌다.
·정보통신과 전자산업의 전략적 추진: 1990년대의 IT 붐을 예약하였다.
·한미관계의 안정: 레이건 행정부가 對蘇압박정책을 쓰면서 일본의 나카소네, 영국의 대처, 한국의 全斗煥 정권을 필요하게 되어 朴正熙 후반기와 같은 큰 갈등이 사라졌다.
·서울 올림픽의 전략적 추진: 한국 사회 선진화, 對北우위 확보, 對공산권 접근, 한국의 국제 이미지 提高라는 당초 목표 달성. 동시에 국내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부측의 강력 대응은 올림픽 반납을 각오해야 하는 등 민주화 과정의 한 안전판이 되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한 북한정권과의 대결에서 승리: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 폭파사건 등을 일으킨 북한은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고 대응카드로 써먹은 평양 세계청년축전 개최는 예산 낭비를 가져와 경제위기의 단초가 되었다.

·학생운동권에 친북 좌익 이념 확산: 민주화 운동의 흐름속에서 북한세력과 연계되거나 자생적인 좌익이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위장하여 당국의 단속을 탄압으로 몰아갔고 언론과 여론도 호의적이었다. 여론과 야당에 밀린 정부도 적실한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좌익 이념의 젊은층 침투는 大勢가 되었다.
·1985년 2·12총선과 민주화 운동의 대세화: 이 흐름은 1987년6월 대시위로 폭발했고 全斗煥-盧泰愚세력은 6·29민주화 선언으로 대응하여 정면충돌 위기를 평화적인 민주화 과정으로 전환시켰으며 兩金의 분열로 盧泰愚 대통령이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全斗煥 정권은 유혈사태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7년간 대내외적으로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한국 사회를 긴장과 갈등과 성장이 교차하는 역동적 사회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9. 盧泰愚에서 盧武鉉까지: 민주화의 진통과 文民좌파정권 등장

·대중조직의 시대: 1988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언론 집회 시위의 자유가 확대되는 가운데 각종 대중운동조직이 강력한 조직력과 활동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공권력과 기성세력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들 조직중에서는 친북적인 성격을 가진 단체도 많아 체제 불안 요인이 되었다.
·노사문제의 결정적 중요성: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기업이 정권의 보호 아래 노조운동을 누르고 생산과 판매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고 노조의 경영에 대한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노사문제가 경제발전의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었다.
·위선적 문민정치의 폐해: 1993년 소위 문민 정부의 재등장은 한국 정치가 예외의 시대(군인 주도 시대)가 끝나고 正常의 시대(문민 우위)로 복귀했다는 의미였다. 한국 정치의 정상복귀란 조선조 정치생리의 재현으로서 정치인, 언론인, 학자, 법조인, 사회단체가 주도하는 위선적 명분론의 부패한 파당정치이며 경제와 안보 및 국제정세에 대한 無知와 무능으로 나타난다.
·사회의 좌경화-좌파 권력의 등장: 1980년대에 좌경화되었던 운동권 세력이 사회 중심부로 진입함에 따라 한국 사회의 권력구조도 좌경화되고 이런 바탕에서 金大中, 盧武鉉 좌파 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
·세계화속에서 좌초: 국내의 권력투쟁에 함몰하여 전통적으로 세계대세에 무지,무관심한 문민정부는 세계화에 한국 경제를 제대로 적응시키지 못해 1997-98년의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그 뒤에도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정경유착, 전투적 노조 등 문제점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치부패의 深化: 정치권력의 부패는 민주화에 따른 잇단 선거로 해서 오히려 더 악화되었고 이는 심각한 정치불신을 야기하여 정치 리더십의 약화를 초래했다.
·북한의 大飢饉과 北核문제: 흡수통일에 따른 책임과 부담을 두려워한 한국 정부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통일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1998년 이후 좌파정권이 등장하여 굴욕적 對北지원으로 金正日 정권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국론분열을 주도한 것은, 통일의 결정적 찬스를 놓치고 분단고착을 불러 북한동포의 고통을 연장한 민족사적 범죄가 될 가능성이 있다.
·국론분열: 金大中 좌파 정권이 추진한 햇볕정책은 위기에 빠진 金正日 체제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남한내 친북좌익 세력의 강화로 이어져 체제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한편 북한의 내부개혁은 요원한 실정이다. 이 정책을 둘러싼 살벌한 대립은 대한민국의 존립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
·남북한 친북반미 연합전선의 형성: 남북한에 걸쳐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관에 반감을 가진 親北反美 연합 전선이 형성되고 있고 일부 정권 내외의 인사들이 여기에 가담하고 있다. 親북한정권 세력은 「북한공작원+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세력+대한민국의 공권력으로부터 제재를 당한 경험에서 생긴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세력+前근대화 후진세력의 집합체」로 되어 있다.
·근대와 前近代의 대결: 한반도에선 지금 前근대 봉건 세력이 金正日 정권을 핵으로 하여 남북한에 통일전선을 형성중이며 이에 대해 대한민국이 지난 55년간 키워온 근대국민국가로서의 시스템(기업, 법치,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등등)과 중산층이 저항하고 있는 형국이다.
·중산층의 위기와 선동정치: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 변동기 때 결정적 역할을 했던 중산층이 외환위기를 계기로 자신감을 잃어 사회의 중심 균형자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사이 좌파 선동정치가들이 20, 30대를 움직여 정치변동의 원동력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먹혀 들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정통주류 세력의 위기: 1997년 및 2002년 선거에서 우파 세력이 분열하여 좌파 정권의 등장을 허용하였다. 두 차례 선거에서 국가와 역사와 과거의 챔피언이어야 할 우파 지도층은 대한민국 55년의 위대한 성취를 옹호하지 못하고 좌파선동에 변명 수세로 대응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상실했다. 우파 지도부는, 한반도 상황을 이념적으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戰略부재의 무기력을 보여주었다.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이념과 역사관이 가장 큰 전략이다.
·反美와 親中: 남북한의 좌파전선이 反美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는 사이 중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이고 때로는 굴종적인 자세가 굳어지고 있다. 중국의 거대한 경제적 팽창은 한국에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고, 과거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의 再現이 우려되고 있다.
·해양문화권에서 대륙문화권으로 복귀 가능성: 1945년 이후 지속되었던 한국의 해양화, 세계화 추세는 1993년 金泳三 정권의 등장을 계기로 하여 미국 일본과는 불화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쪽으로 기우는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한국 내 두 흐름-해양화와 대륙화-의 대결은 舊韓末의 재판이 되어 국가의 안전을 위협할 가능성도 있다.

10. 대한민국의 내일: 자유통일을 넘어서 조국 선진화로


*한국의 국력 지표: 국내총생산은 세계 12위(인구 10억인 인도와 비슷하다). 수출은 세계 12위, 수입은 14위. 에너지 총소비량은 세계 10위, 1인당 소비량은 16위. 粗鋼생산량은 세계 5위. 선박 건조량은 1위. 자동차 생산량은 세계 6위. 전자제품 생산량은 3위. 인터넷 이용자수는 세계 3위. 개인컴퓨터 보유율은 7위. 인구는 세계 26위.

*국력은 선진국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국력에 걸맞는 지도층의 교양과 능력,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신감, 반란집단인 북한정권에 대한 엄정한 자세와 북한동포들에 대한 동정심이 갖추어지면 자유통일도, 조국 선진화도 가능하다. 물질적 근대화 이후에 정신적 근대화(합리화, 과학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김정일 정권의 선동과 방해가 작동하고 있어 선진화가 늦추어지고 있다. 조국 선진화는 김정일 집단이란 방해물을 치우지 않고는 달성될 수 없다. 우리 민족사의 발전방향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복지 안전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國政에 참여하는 계층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북한의 오늘날 생활 수준은 조선조 500년에서도 최악이었던 철종 고종 시절보다 못하다. 민족사의 발전 원리는, 역사발전과 국민국가건설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2천만 북한동포들을 구출하고 이들을 역사만들기에 동참시키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꿈 꾸는 대한민국의 모습

히틀러는 국가주의자, 처칠은 애국자라고 구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국가주의자는 국가의 적을 증오하는 마음이 기본이다. 애국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다. 正義를 독점하는 위선자들에게서 사명감(왜곡된)은 느낄 수 있지만 사랑은 느낄 수 없다. 한국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경쟁하고, 남북대치상황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숙명을 갖고 나온 셈이다. 이 경쟁과 투쟁이 사랑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경쟁과 투쟁에 승리한 이후의 비전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관심, 북한동포에 대한 동정심과 김정일에 대한 분노,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따뜻한 마음, 그런 마음들이 모인 국가. 이와 같은 국가가 존재해본 적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가장 비슷한 국가를 우리 민족사에서 찾는다면 삼국통일기의 신라일 것이다. 唐將 蘇定方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한 다음 귀국하여 唐帝 고종에게 귀국신고를 하니 고종은 이렇게 물었다.

"왜 내친 김에 신라마저 정벌하지 않았는가."
蘇定方은 이렇게 답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감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신하, 즉 국가엘리트들이 충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나라(즉 헌법)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짐, 사랑, 忠義, 받듬, 섬김-위의 짧은 문장 속에 등장하는 이런 키 워드가 충만한 신라였기 때문에 삼국통일과 對唐결전으로써 한반도를 지켜내어 민족의 보금자리를 가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모습도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