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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학살은 북한군이 저지른 것

(시스템클럽 기사)

오늘 아침 11시부터 세실레스토랑에서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임천용씨가 내용이 충실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충격적인 내용만 요약하면 이렇다.

1. 남한의 모든 크고 작은 소요에는 빠짐 없이 북한의 공작이 개입돼 있다.

2. 5.18 때, 광주에 600명 정도의 특수군이 투입됐다. 제1진에는 300명, 제2진에는 400명, 모두 서해로 투입됐다. 서해안에 이르자 남조선 배가 마중 나와 길을 안내했다.

3. 남한에 있는 탈북자 중에는 5.18때 광주에 왔다가 돌아갔다가 탈북해온 사람이 현재 있다. 그가 오늘 기자회견장에 나오기로 돼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안 나왔다.

4. 광주 사태에 투입됐던 특수부대원 중 상당 부분이 지금도 남한에 남아 있다.

5. 광주 사태에 참여한 사람들 중 62명이 영웅으로 추대됐다.  

6. 죽은 사람 사진들(현장전시) 중에는 전기톱에 의해 얼굴이 가로로 잘려진 사진도 있고, 나체 여인이 둔부를 드러낸 채 목이 잘린 사진도 있고, 나체 여인의 등에다 뒤로부터 총을 쏜 흔적이 있는 사진들이 있다. 한국의 공수부대 요원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제주 4.3 시간 등에서 보듯이 공산당들은 공포감을 주기 위해 사람들을 가장 잔인하게 죽인다. 이 세개의 사진을 보더라도 광주 학살이 북한 특수군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7. 남파된 북 특수부대 요원들은 각 군단 소속 특수부대들에서 차출됐고, 반은 국방군 복장이었고, 반은 민간인 복장으로 내려갔다, 국방군 복장을 입은 특수부대 요원들은 진압군 행세를 했다.

8. 남한의 HID 등 특수부대 요원들도 장갑차를 몰지 못한다. 한국군 부대에서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도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한국 시민들만을 가지고는 장갑차를 몰거나, 무기고를 탈취하거나, 주요 시설에 대한 방화를 동시 다발적으로 지휘할 수 없다. 타 지역에서 발생한 시민 봉기에는 북한군이 개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장갑차를 빼앗거나, 무기고를 털거나 정부군을 상대로 일사분란하게 싸우지 못했다. 광주에서만 이런 것이 가능했다. 바로 북한 특수군이 개입됐다는 증거다.

9.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갔다 온 사실들은 북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남한 사람들만 이를 부정하는가?

10. 김일성은 "광주에서 우리 사람들이 많이 죽어 손해를 봤지만, 얻은 것도 많다. 앞으로 김대중이 잘 될거다"라고 말했고, 김정일은 "아버지 수령에게 드리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말햇다.



이하 데일리안 뉴스를 전재한다. 기자회견 자료는 방대한데다 오늘은 자료를 얻을 수가 없어서 후에 입수되는 대로 올릴 것이며, 동영상은 아날로그로 찍었기 때문에 며칠 걸릴 것입니다.

                                            이하 데일리안 기사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됐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자유북한군인연합´ 기자회견
"5.18 광주사태는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 증명시키주는 현장"
2006-12-20 15:15:13  

◇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들이 20일 광주민주화항쟁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데일리안 윤경원 기자

광주5.18민주화항쟁에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는 주장이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에 의해 제기돼 충격이 예상된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자들로 구성된 자유북한군인연합은 20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세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8광주사태는 (북한의)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밝혔다.

그는 그 증거로 ▲당시 봉기상황이 북한으로 실시간 생중계된 것 ▲봉기자들이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 ▲현재까지 미해명으로 남아있는 신원 미상자 ▲전기톱에 의해 두개골이 파괴된 시체 ▲봉기군이 봉기군을 사살한 것 ▲봉기군의 아지트와 봉기군이 탈취한 탱크·장갑차·윤전기재 안에서 대량 발견된 술병의 진의 ▲방위산업체·감옥·방송국 등 국가기관 점거와 군 능력을 초월해 전면전을 불사한 것 등을 언급했다.

그는 또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광주사건과 관련한 발언을 했다며 입수내용을 밝히기도 했다.

임 대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김 주석이 1986년 1월 6일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을 위한 군사정치일군 상학(수업)에서 발언한 내용이며 전 인민군에 배포된 정치상학 자료에서 출처를 얻었다고 임 대표는 밝혔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는 김 위원장이 1982년 3월 북한특전여단들이 북부지구에서 벌린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발언한 것이며 출처는 교도지도국 각 여단 참모부 및 대대참모부라고 밝혔다.

임 대표는 당시 현장에 투입됐다 북한으로 귀대한 참가자들의 증언을 확보했다며 그들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A씨:<내가 참가했던 조는 시위대 쪽에 편입되어 행동했다. 반반씩 나뉘어 절반은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고 절반은 계엄군 쪽에서 활동했다…우리 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 중에 창석이(당시 중대장), 광만이(정치지도원)를 포함해 세 명만 돌아왔다…생사람 죽이는 일을 처음 해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도망가는 여자들 등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우리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남조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서 지원세력이 몰려오면 될 수 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체는 조직적인 단합이 없고 동내패거리 싸움식이었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일이 커지게 돼 있고 봉기의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다.>

B씨: <우리도 죽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총알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다. 양쪽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시위대들이 많이 죽이 않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기도 불가능했다. 괴뢰군이건 시위대건 양쪽에 피해가 생겨서 서로의 마찰이 커져야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다.>

C씨: <우리도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행동과 좀 다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우리가 갈 때는 공해상에 그쪽 애들 두 척의 뜨락선이 마중 나왔는데 사복을 입었고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임 대표는 “허울을 쓴 민주화 인사들이 북한정권과 입을 맞추며 광주의 희생을 자시들의 정치적 자신으로 역이용하고 특정집단의 상징적인 업보로 선동하고 있다”며 “파괴되는 국가사태 앞에서 더 이상 입을 다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자회견을 열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 김용화 씨는 “봉기 당시에 북한 인민군 중위로 있었고 황해북도 송림에 위치한 사회안전부 연봉부대에서 자동차를 관리하며 인민군의 수송을 담당했었다”며 “그 당시 ‘너구리 작전’이라고 해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보총을 들고 나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밤 1, 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그 때 빠져나간 북한군들이 광주에 가기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북한교도지도국 대위출신의 최준일씨는 “북한특수부대출신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며 “그 당시 나는 완전 전투태세로 무장한 채 광주사건에 대한 24시간 긴급속보 전해 들으며 20여일간 출전명령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3분의 1이 희생되고 나머지 2는 귀대했다”고 말했다.

[윤경원 기자]


                                       조선일보 기사

"5.18 때 북한 특수부대 침투했다"

서울=뉴시스
입력 : 2006.12.20 15:25 / 수정 : 2006.12.20 15:27

5.18광주민주항쟁 당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북한의 현역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로 침투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모임인 자유북한군인연합은 20일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80년 5월 중앙당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말한 김일성의 비밀지령 전문 등을 인용, 광주사태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투입됐었다고 밝혔다.

자유북한군연합 최중현 참모장이 밝힌 비밀지령에 따르면 김일성은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유북한군연합은 "김일성의 비밀지령과 1980년 5월을 전후한 북한군의 움직임 등 제반 상황은 광주사태에 분명히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최 참모장은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속보를 전해 들으며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렸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당시 북한의 7군단 10사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며 "그 후로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았다"고 덧붙였다.

최 참모장은 "북한군 4군단 70정찰대대 전투원으로 복무했던 이덕선씨로부터 당시 정찰국 소속 정찰대대들의 광주 침투 상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며 "이씨에 따르면 광주사태 당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로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 가운데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만이 귀대했다"고 말했다.

http://www.systemclub.co.kr/bbs/zb4pl5/view.php?id=new_jee&no=3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