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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天下제일名文/答薛仁貴書

운영자 2007.03.15 22:47 조회 수 : 1639 추천: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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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이 담긴 글
天下제일名文/答薛仁貴書
趙甲濟   
 大國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唐의 체면을 세워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아야 하는 新羅의 고민을 담은 아주 무게 있는 외교문서이기도 하다.
 
 
  *三國史記 文武王條에 실린, 唐將 薛仁貴의 편지에 대한 문무왕의 답서는 신라의 强首가 썼다고 추정된다. 이 문서는 唐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할 말을 다한 名文이다. 그 내용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라 史料로서 가치가 높다. 신라는 세계 최대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면서 唐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도 國魂과 國益을 잃지 않아야 했다. 져서도 안되고 전쟁을 확대시키셔도 안되는 新羅의 고민을 담은 아주 무게 있는 외교문서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사의 최고문장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특히 "유인원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新羅의 育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국가(당)의 은택은 비록 무한하나 신라의 충성도 또한 애닮다 할 것이오"라고 쓴 대목이 가슴을 친다. 민족혼이 살아 숨쉬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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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의 답서에 이르기를, “선왕이 정관(貞觀) 22년에 당에 입조하고 태종 문황제(太宗 文皇帝)의 은칙(恩勅)을 받았을 때 ‘짐(朕)이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너희 신라가 양국에 끼어 매양 침략을 당하여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엾게 여겨서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고 옥백과 자녀는 나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하고 계책과 군기(軍期)를 정해 주었소. 신라의 백성이 이 은칙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사를 끝내지 못한 채 문제(당 태종)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의 황제(고종)가 즉위하여, 다시 전은(前恩)을 계속하고 자주 애호를 입히니 오히려 지난날보다 더하여 형제 및 아이들이 보물과 관작을 받게 되었소. 영총(榮寵)이 지극하여 옛날에도 없었던 일인지라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진다 해도 사역의 용무에 다함을 바라며, 간과 뇌를 땅에 발려서라도 만분의 일이나마 갚으려고 하였던 것이라오.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성상께서 선왕의 뜻을 마치지 못한 것을 느끼시고, 지난날의 유업을 달성코자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띄우고 수군을 크게 일으켰는데 선왕이 나이 늙고 힘이 약하여 행군하기 매우 어려웠으나, 전은에 감격하여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모(某: 문무왕)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그리하여) 동서(東西)가 향응하고 수육(水陸)이 함께 나아가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양군이 함께 왕도(王都)에 이르러 한나라를 평정하였던 것인데, 평정 이후에 선왕은 소(정방) 대총관과 함께 평정하여 한병(漢兵) 1만 명을 머물게 하고, 신라 역시 왕제(王弟) 인태(人泰)를 보내어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던 것이오. 대군(大軍)이 돌아간 뒤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강서(江西)에서 일어나 패잔병을 모아서 부성(府城)을 포위하면서 먼저 바깥 기지를 깨뜨려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부성을 공격하니 거의 함락 지경에 놓여 있었으며, 또 부성과 가까운 사방에 성을 만들어 지키므로 부성에 출입할 수 없었소. 모(某)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적 성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 명의 한병(漢兵)으로 하여금 호구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차츰 많아져 강동의 땅을 침범하여 빼앗으므로, 웅진의 한병 1000명이 적을 치다가 적에게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패배한 이래로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병마(兵馬)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실하고 이득 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소속되고, 복신은 승세를 타서 다시 부성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 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6월에 이르러 선왕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칙지에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돌아오라하였고 함자도 총관 유덕민(劉德敏) 등이 와서 칙지를 받들고 신라를 보내어 평양으로 군량을 공급케 하였소. 이때 웅진의 사인(使人)이 와서 부성의 위급함을 알리니, 유 총관은 모(某)와 더불어 상의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만약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한병이 곧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였소. 유 총관은 드디어 모와 함께 먼저 태산성을 치고 옹(?)산성이 함락되자 이내 웅진에 성을 쌓아서 웅진의 도로를 개통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먼저 웅진으로 운송한다면 칙지를 어길까 두려웠고 만약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굳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정병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노상에서 눈을 만나 인마(人馬)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용삭(龍朔) 2년 정월에 이르러 유 총관은 신라의 양하도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에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月〕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행군(行軍)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자 고구려 병마가 얼마 후 쫓아와 언덕위에 진을 치므로, 신라 병사는 오랫동안 피로하였으나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 것이 두려워 적이 물을 건너기 전에 먼저 건너가 선봉과 잠깐 교전하였는데, 적병이 무너지니 드디어 군사를 거두고 돌아왔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되어 웅진 부성에서 자주 곡식 종자를 청하므로 전후에 보낸 것이 수만여 가마였소. 남으로 웅진에 보내고 북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우마(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한병은 양식의 여유가 있었소. 또 머물러 지키는 한병은 집을 떠난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에게 권과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주었소. 도호(都護) 유인원이 멀리 와서 외로운 성을 지키자니 사면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한병이 4년을 신라에게 의식하였으니, 인원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한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국가(당)의 은택은 비록 무한하나 신라의 충성도 또한 애닮다 할 것이오.

  용삭 3년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부성을 구원하러 올 때 신라의 병마 또한 함께 치기로 하여 주류성(周留城) 아래 당도하였소. 이때 왜국의 해군이 백제를 원조하여 왜선 1000척이 백사(白沙)에 정박하고 백제의 정기병은 언덕 위에서 배를 지켰으므로, 신라의 날랜 기병이 한(漢)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부수니 주류성은 용기를 잃고 드디어 항복하였소.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이켜 북을 치자 임존성(任存城) 하나만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기에 양군이 협력하여서 하나의 성을 쳤으나 굳게 지키어 항거하니 깨뜨리지 못하였소. 신라가 곧 돌아가려는데 두대부(杜大夫)가 말하기를, ‘칙명에, 평정된 후에는 함께 회맹하라 하였으니 임존성만이 비록 항복하지 않았다 해도 함께 맹세해야 한다.’ 하였으나, 신라는 말하기를, ‘칙지에, 평정된 후에 서로 회맹하라 하였는데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으니 이미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백제는 간사하여 반복이 무상하니 지금 서로 회맹한다 해도 뒤에 후회할 것이다.’하여 맹세를 정지할 것을 주청하였소.

  인덕(麟德) 원년에 이르러 다시 엄한 칙지를 내려 맹세치 않은 것을 책망하므로 곧 웅령(熊嶺)으로 사람을 보내어 단을 쌓아 서로 회맹하고 회맹한 곳을 양국의 경계선으로 삼았소. 회맹의 일은 비록 원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감히 칙지를 어길 수 없었소. 또 취리산(就利山)에 단을 쌓고 칙사 유인원을 상대로 삽혈로써 맹세하고 산하(山河)로써 서약한 후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길이 강계를 정하니 백성들이 거주하여 제각기 산업을 영위하였던 것이오.

  건봉(乾封) 2년에 이르러 대총관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요동(고구려)을 친다는 말을 듣고 모(某)는 한성주로 가서 군사를 보내어 국경으로 모집하였소. 신라 병마만이 홀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먼저 정탐을 세 차례나 배를 태워 보내고 대군의 동정을 살피니, 정탐이 돌아와 알리기를,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지 않았습니다.’ 하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도로를 개통하고 대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소. 그 성이 차츰 함락할 때 영공의 사인(使人) 강심(江深: 신라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의 병마는 성을 치지 말고 빨리 평양으로 달려가 군량을 공급하라.’ 하여 영으로써 달려가 모이게 하였는데,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러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의 병마도 드디어 철수하였던 것이오.

  건봉(乾封) 3년에 이르러 대감(大監) 김보가(金寶嘉)를 보내어 바닷길로 (요동에) 들어가 영공의 진지(進止)를 살펴 처분을 받드니, 신라의 병마는 평양으로 집합하라는 것이었소. 5월에 이르러 유우상(劉右相: 유인궤)이 와서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고 함께 평양으로 달려가자, 모(某)도 역시 한성주로 가서 병마를 검교(檢校)하였던 것이오. 이때 번·한(蕃漢)의 모든 군사가 사수(死守)에 총집합하니 남건(男建)은 군사를 내어 한 번 싸움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 하였소. 신라의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대부대를 부수니, 평양 성중은 사기가 꺾이고 기운이 빠졌소. 후에 영공은 다시 신라의 날랜 기병 500명을 취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부수고 큰 공을 이루게 된 것이오. 이에 신라의 병사가 말하기를, ‘싸움이 이미 9년을 경과하여 인력이 탄진되었지만 끝내 양국을 평정하여 누대의 숙망이 오늘 이루어졌으니, 반드시 나라는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을 것이며, 개인은 힘을 바친 상을 받을 것이다.’ 하였는데 영공(英公)은 말하기를, ‘신라가 전에 군기(軍期)를 위반하였으니 또한 모름지기 계산해서 정할 것이다.’ 하니, 신라의 병사는 이 말을 듣고 다시 공포심이 더한 것이오. 또 공을 세운 군장(軍裝)들은 기록되어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서울에 도착하자 말하기를, ‘지금 신라는 공 있는 자가 없습니다.’ 하여 군장들이 귀국하게 되니 백성은 다시 공포심이 더한 것이오. 또 비열성은 본래 신라의 땅인데 고(구)려가 빼앗아 30여 년이 되었으니 신라는 이성을 되찾아서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지만 (당이) 다시 이 성을 빼앗아 고(구)려에게 주었으며, 신라가 백제의 평정으로부터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국가를 저버린 일이 없었는데 무슨 죄로 일조에 버림을 받는지 알 수 없소.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하나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던 것이오.

  총장(總長) 원년에 이르러 백제는 회맹하던 곳에서 봉(封)을 옮기고 푯말을 바꾸어 전지(田地)를 침탈하며 우리 노비(奴婢)를 꾀고 우리 백성을 유인하여 내지에 숨겨두니, 자주 구해도 결국 돌려보내지 않았소. 또 소식을 통하여 말하기를, ‘국가가 선박을 수리함은 밖의 왜국(倭國)을 치기 위해서라고 하나 실은 신라를 치려는 것이다.’ 하니, 백성이 듣고 놀라 불안해 하고, 또 백제의 부녀자를 신라 한성도독(漢城都督) 박도유(朴都儒)에게 시집보내고 공모하여 신라의 병기를 빼내어 한 고을 땅을 습격하기로 하였는데, 다행히 사전에 발각되어 곧 도유를 베어 죽였으므로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이오.

  함형(咸亨) 원년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모반을 하여서 한(漢)의 관원을 모두 죽였으므로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먼저 웅진(熊津)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이미 배반하였으니 치지 않을 수 없다. 피차가 황제의 신하이므로 함께 흉적을 치는 것이 도리에 맞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상의가 있어야 할 것이니 청컨대 관인을 여기로 보내어 서로 계획을 하자.’ 하였더니 백제의 사마이군이 이곳에 와서 상의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후에 피차간에 의심이 생길 염려가 있으니 마땅히 쌍방의 관인으로 하여금 볼모를 교환하도록 하자.’하므로, 곧 김유돈(金儒敦)과 부성의 백제 주부(主簿) 수미(首彌)·장귀(長貴) 등을 부(府)로 보내어 교질의 일을 의논하게 하니, 백제는 교질을 허락하면서도 성중에는 병마를 집합시키고 그 성 아래 이르기만 하면 밤에 나와 치곤 하였소. 7월에 이르러 입조사(入朝使) 김흠순 등이 이르러 경계를 그으려는데 지도를 검사하여 백제의 옛 땅은 모두 나누어 되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지 않고 태산이 아직 숫돌과 같지 않은 3, 4년 동안에 한 번 주고 한 번 빼앗으므로, 신라 백성은 모두 실망하여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누대(累代)의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형상을 보면 따로 한 나라로 자립할 모양이니 100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탄멸(呑滅)될 것이다. 신라가 이미 국가의 주(州)인 이상 두 나라로 나눌 수 없는 일이니 원컨대 한 집안이 되어서 길이 후환이 없도록 해달라.’하였소. 지난 해 9월에 이 사실을 기록하고 사신을 보내어 아뢰게 하였으나, 중도에서 표류당하여 되돌아온 것이오.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역시 도달하지 못하였으며, 그 후에는 찬바람과 풍랑으로 아뢰지 못하고 말았소. 백제는 꾸며서 말하기를, ‘신라가 배반한다.’ 하였으니 신라는 앞으로 귀신(貴臣)의 뜻을 잃고, 뒤로는 백제의 참소를 입어 나아가나 물러가나 허물만 보이고 충성(忠誠)을 펴지 못하고 그럴듯한 참소가 날로 성청(聖聽)을 거치니, 두 마음 없는 충성이 한 번도 통하지 못한 것이오. 사인 임윤이 서한을 전달하여, 총관이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로 온 것을 알았으니, 도리상 사신으로 하여금 교외에서 맞아들이고 술과 고기를 대접하는 것이 이치인데 멀리 이역에 있어서 예를 다하지 못하고 때로는 영접조차 하지 못한 것을 청컨대 괴이히 여기지 마시오. 총관의 서한을 읽어보니 신라를 반역이라 하였는데 본심이 아니므로 척연히 놀랄 따름이오. 자신의 공로를 헤아린다면 사욕(斯辱)의 꾸지람을 당할까 두려우나 함봉하고 책망을 받자니 또한 불행한 운수에 빠지므로 이제 억울함을 대략 열거하여 배반함이 없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오.
  국가가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어 사유를 묻지도 않고 곧 수만의 군사로 하여금 소혈(巢穴)을 엎으려 하여 군사의 배가 창해를 덮고 배의 꼬리가 강어귀에 이어졌으며 저 웅진을 핍박하여 이 신라를 치니 오호라! 양국이 평정되지 않아서는 구치(驅馳: 남을 위해 바삐 뛰는 것, 즉 사역)를 맡고 야수(적)가 지금 다하니 도리어 팽재(요리사)의 침핍을 보게 되었으며, 백제의 잔적은 옹치(雍齒)의 상을 받고, 한(漢)에 희생된 신라는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한 것이오. (그러나) 태양(太陽)이 비록 빛을 주지 않을망정 규곽(葵藿: 해바라기·콩잎)의 본심은 오히려 해를 생각하는 것이오. 총관은 영웅(英雄)의 빼어난 기운을 받고 장상(將相)의 고재(高材)를 지니고 칠덕(七德)을 겸비하고 구류(九流)를 통한 분으로서 천벌(天罰)을 대행함에 있어 어찌 함부로 죄 아닌 죄를 더하리까? 천병(天兵)이 출동하기 전에 먼저 이유를 물어 이 글로 인하여 감히 배반하지 않았음을 진술하는 것이니 청컨대 총관은 자세히 헤아려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말씀드리시오. 계림주대도독 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신라 왕 김법민(金法敏) 백.”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