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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불교

운영자 2009.11.23 14:32 조회 수 : 5704 추천: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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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불교

호국불교만이 불교중흥 있다
 
운영자

대불총 2009년 4월 법회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은 2009년 4월 26일 대한불교 조계종 한강수상법당에서 김덕수 대불총 대전지회 지도법사님과 이주영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님을 모시고 다음과 같이 4월 법회를 봉행하였다.

대전 생활불교 이사장 김덕수 박사(재원스님)은 "호국불교사상과 대불총'을 주제로 법문하셨다.

(보기 흉하고 망측하여 그림 잘라냄)

▲호국불교로 돌아가야 한국불교 중흥이 있을 수 있다고 법문하시는 재원큰스님


2부에는 전 건국대 부총장 이주영 교수님께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불교”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김덕수 지도법사의 법문은 상기 동영상으로 대체하고, 다음은 이주영교수의 주제발표를 발췌 요악한 것이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불교”



오늘날의 위기를 흔히 ‘가치관의 위기’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해졌어도 자유, 인권, 민주주의 등에 대한 개념 혼란으로 정치, 사회 또한 교육 현장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 탄신 134주년을 맞아 이 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 이념을 심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이승만 그를 통해 우리는 현재를 진단하고, 나아가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그림 잘라냄)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어머니의 감화를 받아 이승만은 남달리 불교에 애정을 갖었다고 소개하는 이주영교수.



지난 2월말 출간된 ‘이승만 동문 서한집(유영익 엮음. 연세대출판부)’의 내용과 16일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우남이승만연구회 주최 제4차 학술대회 ‘이승만의 독립노선과 독립운동’의 내용도 함께 소개한다.

이승만 서한집은 이승만이 1899년부터 1945년까지 주요 인물들과 주고받은 666통의 동문(東文·국문·국한문·한문) 서한을 정리해 펴낸 것으로 근대한국사 연구를 위한 획기적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승만은 일본이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 1875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전주 이씨 양녕대군의 17대손 왕족으로 태어났다.

소년 이승만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 영어학부에 들어갔다가 ‘서양문명’과 만나게 된다. 일찍이 조선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조선의 정치체제 개혁에 앞장서면서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했고, ‘조선 최초의 근대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하고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시위 연설에 나서는 등 맹렬한 정치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박영효와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돼 1898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감옥에서는 조선 최초의 한영사전을 집필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정신’을 탈고해 원고를 옥 밖으로 내보내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조선의 기독교화를 평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고종의 배려로 5년 8개월만에 석방된 그는 석방직후인 1904년 고종의 측근인 친미파 민영환, 한규설의 밀서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10여분간 면담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신의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자 이듬해인 1905년 워싱턴의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해 2년만에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 진학해 석사와 박사과정을 3년만에 끝마쳤다. 자신은 미국에서 편안히 공부를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 하루빨리 공부를 마치고 조국에 돌아가 독립을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며 미 대학당국을 설득했다. 그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을 주제로 논문을 써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프린스턴대 총장으로부터 학위를 수여 받았다.

이후에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내각제 국무총리직을 통보 받고 그해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함께 최초의 한국의회를 소집하고 국가건설의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하는 등 일제시대 하에서 활발한 독립·외교 활동을 펼쳤다.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의 후예인 하와이 동포들이 건국 60년에 느끼는 감회는 다른 지역 동포들보다 더 각별하다. 1920년대까지 하와이 한인들은 해외 동포들의 주축이었고 독립운동 자금도 대부분 이곳에서 담당했다.

한 시간도 서 있기 어려운 뜨거운 태양 아래 중노동에 시달렸던 이민선조들이 쥐꼬리보다 적은 수입에서 떼어내어 건국의 씨앗을 뿌렸는데 그 후예인 우리가 어찌 건국 60주년의 의미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곳은 이승만박사를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이끌고 건국될 나라의 미래를 설계했던, 대한민국 건국의 꿈과 이상이 싹트고 설계되어 마침내 본국에서 뿌리내리고 꽃피우고 열매 맺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60년을 우리가 앞장서 경축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이한 이때 한국일보 하와이지사의 요청이 있어 대한민국 60년을 뒤돌아보며 소박한 의견을 하와이 동포들과 나누고자 한다.

특히 건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과 관련된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려 한다. 많은 분들의 성원과 지도편달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건국

이승만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원칙과 소신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는 제정 러시아 시대 때부터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소련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소련이 주창하는 공산주의도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해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그의 소신은 소련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이승만은 해방 이후 소련이 참여하는 신탁통치, 좌우합작 통일노선 등에 모두 반대하며 73세 때인 1948년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국한다. 건국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기본 뼈대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는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름으로써 시작됐다. 선거인 명부에 기록된 사람의 92.5%가 투표해 5월 31일 이승만을 포함한 198명의 당선자들이 국회를 구성했다.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독립을 찾은 것이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북한에서 월남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또한 새 정부가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이승만은 동년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고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식을 가졌다. 취임사에서 이승만은 제일 먼저 북한 지역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후 그는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에 있는 우리 민족도 소련의 공산주의로부터 해방돼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통일의 방향을 언급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탁월한 외교업적

건국 이후 이승만은 국민을 교육하고 잘 살게 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꽃 필수 있기 때문이다.

농지개혁을 적극 추진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 인구의 73%가 농민이고 그 가운데 절반이 소작농이었다. 농지개혁은 지주 계급을 몰락시키고 자작농을 키우는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은 불평등한 봉건적 신분제를 빨리 무너뜨리는 수단이 되었다. 농지개혁은 6.25전쟁 때 농민들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선동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다.

의무 교육제를 통해 국민을 교육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모든 개인이 선거에서 현명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받은 국민이 있어야 했다. 이승만은 1949년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 교육제를 도입했다. 나라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는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했다. 이들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공업화에 투입돼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다. 한국의 MIT격인 인하공과대학의 설립, 원자력 기술의 도입도 이승만 정부 때 이루어졌다.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 한국이 안보를 보장받고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온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도 이승만 정부 때 이루어졌다. 1945년 북한이 공산화되고 1949년 중국 대륙 전체가 공산화되는 위기 상황에서 한국은 1950년 6.25전쟁을 맞았다. 이승만은 미국이 요구한 휴전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한미동맹의 체결을 요구했고 미국으로부터 경제부흥에 필요한 장기적인 원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약소국의 지도자였지만 이승만은 “한국을 공산세계에 대한 자유세계의 싸움을 같이 수행하는 대등한 동반자로 도우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또 그는 한민적의 정신적.도덕적 자질을 바꾸어 놓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 기독교 장려 등의 문화적 개혁도 단행했다. 여성이 제대로 교육받고 남녀 공학 학교가 처음 생긴 것도 이승만 정부 시대 때 이루어 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조계종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인이지만 불교에 대하여 남달리 애정이 깊었다. 이승만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소년 이승만은 어머니로 부터 불전에 바치는 공양미 한 말을 들고 20리 길을 걸으면서 어머니의 당부대로 쌀자루를 절대 땅에 놓고 쉬지 않은 것을 훗날 대통령이 되어 술회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독립을 하기위해서는 선진국인 미국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사회는 기독교가 대부분이다. 이승만은 기독교를 선택했다.

그러나 해방후 그의 행보를 보면 어머니의 영향인지 불교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을 표현하였다. 이승만은 어머니가 다니든 삼각산 문수사를 곧잘 찾았다. 어머니가 삼각산 문수사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한 끝에 용꿈을 꾸고 이승만을 잉태한 것이다.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전통불교인 비구불교가 일제의 대처불교로부터 실종될 위기에 처한 것을 몇 안되는 비구승으로부터 듣고, 깜짝 놀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려 8차례에 걸쳐 불교에 대한 유시를 발표, 일제불교의 잔재인 대처승이 장악한 전국의 모든 전통사찰은 한국의 전통불교인 비구승들에게 넘기라고 맹촉하였다.

몇 안되는 비구승들이 어떻게 수만명의 대처승을 정화할 수 있겠는가? 이승만 대통령은 비구승이 대처승이 장악한 사찰을 접수하기 위해서 각급 법원과 군, 검, 경을 총동원하여 비구승을 도와주었다. 예컨대 협천 해인사도 대처측이 장악해 있었다. 이승만은 군,경을 동원하여 해인사에 비구승들의 시대를 열게 하였다.

훗날 비구승이 해인사를 장악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해인사를 방문했다. 그는 해인사가 비구승의 수도장으로서 영원할 것을 기원하면서 큰붓글씨로 '해인대도량(海印大道場)'이라고 써주었다. 그 현판은 지금도 해인사 경내 입구에 내걸려 있다.

또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할 때 사찰의 논밭을 승려들이 직접 경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화로 사찰 농지를 몰수하듯 하려는 농지정책 보고를 듣고, 대노하였다. 그는 각 일간지와 방송에 "사찰의 논과 밭은 불량답(佛糧畓)으로서 그곳에서 나온 곡식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수행자들이 공양해야 한다"며 사찰농지를 문제삼지 말기를 유시하였다.

이승만은 그외에 비구불교에 대하여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해 비구승측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애로사항을 경청하였다. 오늘의 조계종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공덕이다. 바꿔말해 조계종은 이승만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계종에 몸담아 있는 일부 몰지각한 승려들은 불교정화에 동참하지도 않고 상황도 전혀 모르면서 "이승만이 불교를 망쳤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승만을 맹비난 하는 승려의 부류는 첫째, 비구승에게 사찰을 빼앗긴 대처승과 그 후예들이요, 둘째, 이승만 때문에 대남적화에 실패한 김일성, 김정일집단의 분풀이식 허위 날조, 모략, 비방하는 붉은 전사들이다. 보은을 아는 조계종의 비구승이라면, 이승만 대통령의 공덕을 영세불망(永世不忘)으로 추억하고, 헌화하고, 분향하며 그 고마운 뜻을 기려야 마땅할 것이다. 

   
 이승만 업적, 공(功)과 과(過) 함께 봐야

물론 그의 공(功) 큰 만큼 과(過)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연구의 대표적인 권위자인 유영익 전 연세대 석좌교수는 “이 대통령이 건국 초 친일파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환을 남겼고 1954년에 ‘4사5입’이라는 억지 논리로써 개헌을 강행해 장기 집권을 도모하고 그 후 자유당과 경찰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자행 내지 묵과한 점은 실정(失政)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유영익 교수는 “지금까지의 이승만 연구가 비판일변도로 흘렀으며 그 결과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한 역사적 인물의 업적을 논할 때 그 인물이 처했던 특수한 상황과 입장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도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대한민국이 새로 도입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정부든 국민이든 운영이 서툴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또한 “이승만 정부가 국가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운동까지 허용할 수는 없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이 정지되거나 국회가 해산되거나 언론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훼손된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현재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연구는 앞서 언급된 ‘이승만 동문 서한집’이 새롭게 발간되면서 종전보다 훨씬 풍부해졌다. 이 책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가정생활, 국내외 연구에서 잘 밝혀지지 않은 1919년에서 1925년까지의 임시정부사, 이승만과 교신했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정치적 입장 내지 태도들을 조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국민의 대부분이 그를 평소에 ‘이 박사’로 부를 정도로 존경했고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경무대를 떠난 이승만 대통령이 5년만에 유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 박사를 추모하던 행렬이 고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 행렬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 134주년을 맞이하며 가난한 나라였지만 미국을 호령하던 강력한 지도자, 나라의 기틀을 세운 똑똑한 지도자, 국민의 가슴에 희망을 주었던 따뜻한 지도자 이승만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장재균/촬영/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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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은 조계종 출범을 적극 도운 국부이다"(월하스님) [2]
  • 하늘바람 mahar**** 하늘바람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184241 | 08.09.18 20:09 IP 125.12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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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잘라냄)
    당시 월하종정의 교시는 다음과 같다.







    교시(敎示)








    대저 진정한 국권(國權)은 국민의 공의(公議)에서 창출되듯이, 조계종의 진정한 종권(宗權)은 ‘전국승려대회’의 공의(公議)에서 창출되어야 한다. 본인은 조계종의 총체적 부패를 척결하기 위하여 ‘조계종의 거듭나기운동’의 유일한 대안으로 조계종에 제2정화를 실천하라는 교시아래 98년 조계사에서 개최된 ‘11,11 전국승려대회’에서 출범한 ‘조계종 정화개혁회의’가 조계종 종권의 적통(嫡統)임을 전국의 사부대중에게 천명하는 바이다.3)


    중략-주지하다시피 이승만 전 대통령은 비록 종교는 달랐지만,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한다는 대의(大義)에서 일제 36년간 뿌리내린 일제불교를 타파하고 우리 민족의 전통불교를 회복하는 것을 협조하기 위하여 수차 국민에게 유시(諭示)를 발표하여 오늘의 조계종 출범을 적극 도왔으니 역사의식이 있는 국부(國父)이다. 그러나 ‘12, 23법난’을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조계종의 종정인 본인에게 일언(一言)의 사전논의나 통고도 없이 본인을 무시하고 본인의 명령으로 제2정화불사를 시작하고 있는 정화개혁회의를 폭도로 몰아 전경의 폭력으로 내쫓고, 부패한 정화대상자들과 청와대 등에서 회동하며 “화합”을 당부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4)





    98년 불교계는 부패척결을 위해 제2불교정화를 운동하는 월하종정측과 불교정화를 반대하는 측이 대립, 분규가 벌어졌다. 불교계의 부패척결을 바라는 승려들이 총무원을 장악했다. 승가의 대세(大勢)에서 내쫓긴 반정화측은 사회법원으로 소송을 걸었고, 호남출신 승려들의 일부는 당시 호남출신 대통령 DJ이나 측근 참모들에게 구명도생(苟命徒生)을 시도했다. 당시 DJ는 TV를 위시한 언론에는 불교계의 분규에는 엄정히 중립을 지키겠다며 대국민홍보를 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는 자신은 편파가 없는 엄정중립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준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전경 50개중대, 6000여명은 무장하여 대형 포크레인 2대를 앞세우고, 물대포와 함께 새벽 4시경에 조계종 총무원과 조계사에 진입했다.5) 당시 한강 고수부지에는 물을 가득담은 헬기 2대가 출동대기중이었다고 한다. 당시 총무원은 78명의 승려들이 월하 종정의 교시를 봉행하여 지키고 있었다. 군사작전하듯 진입한 전경들은 총무원 승려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이어서 대형 포크레인은 총무원 1층을 무차별 찍어 박살냈다. 그 틈을 타고 백골단의 전경들 1백여명이 선봉으로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하면서 진입했다. 그 뒤를 일반 전경들이 진압봉과 도끼를 들고 총무원을 무차별 부시기 시작했다. 한국불교의 총본산이 위정자의 승인에 의해 부서지고, 같은 승려들이 유혈이 낭자하도록 구타당하며 언행되어 갈 때 반정화측의 승려들은 환호의 박수를 치고 있었다. 호남출신 위정자 덕으로 종권을 되찾는다는 탐욕에 미쳐버린 것이다
     











    ▲98년 12월 23일, 한국불교사 초유의 대형 포크레인으로 조계종 총무원을 부순후, 난입하는 DJ의 전경들
     
    불교는 1,700년 전통을 운운하지만 현대불교의 정체성은 100년으로 보아야 합니다.
    조선시대 때에는 조직적인 불교활동이 불가능했고 산속에 도피해서 개별 사찰 단위의 활동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일합방 이후 1911년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내려 일본 불교를 본따서 31개 본산을 중심으로 행정조직을 갖추면서가 현대 불교의 시작입니다.

    1941년 조선촏독부에서 "조선불교조계종"이란 종명을 확정지었고,  일제시대의 조계종은
    조선총독부에서 본산사찰 주지 뿐 아니라 말사 주지승까지 임명하는 예하행정기구였습니다.
    그래서 국유림을 사찰에 불하해 주었고, 이것을 근거로 지금 조계종은 매년 120억원 이상을
    등산객들에게 징수하고 있는데, 친일재산환수법에 따르면 모두 국고환수감인 토지들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임야의 사적소유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일제가 임야조사후 50%를 일본인에게 불하하고 나머지를 조선총독부가 국유지로
    관리하며서 예하관청이나 마찬지였던 사찰들에게 임야를 관리하게 한 거고,
    해방후 사찰들은 토지를 조계사 사찰임야로 보존등기를 한거죠.
    숭유억불정책을 펴며 사대문안에 승려의 출입을 금했던 조선시대에 국법을 어기면서
    사찰들에게 그많은 토지를 관리를 맡겼을리가 없으니 조계종의 사찰토지의 역사성
    운운은 허구이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색이 강한 불교계를 정화하기 위해 일본식 대처승이 아닌
    비주류인 비구승이 불교의 정통성을 이어야 한다고 3차례에 걸쳐 대통령 교시를 밝히고,
    경찰력까지 동원해서 분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찰 하나 번듯이 없던 현재 조계종의
    전신인 비구승들은 26개 본산 사찰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에 대처승들의 교단인 태고종과 조계종간에 재산권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겁니다.
     
    1998년 불교계의 부패상을 정화하고자 했던 월하 종정의 뜻은 DJ정권의 비호아래 거부당했고
    실천승가회등은 1999년 총무원장 선거에 자파 승려를 내보내면서 부패세력이라고 축출했었던직지사단 계열 승려들의 도움으로 조계종 불권을 장악합니다.
     
    지관 승려도 총무원장으로 당선시켰고, 종회의 81명중 과반수 이상을 실천승가회 계열인
    일승회 회원들입니다(4억쓰면 떨어지고 6억쓰면 붙는다는 종회 의원들이죠. 한겨례 2006년)
    재정을 장악해서, DJ,노무현 정부때 흘려준 수천억원의 세금으로 조계종 예하 사찰들의
    입이 떡 벌어지게 하면서 200명의 실천승가회 승려들이 13,700명의 조계종 승려들을 지휘하며
    현사태를 주도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고, 교육을 장악하면서 불자들을 기독교에 대한
    피해의식과 투쟁의식에 불타게 만들었지요.
     
    집착을 버려야 할 승려들이 원한과 집착을 만들고 있으니......
    현재 실천승가회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으로 국가인권위가 촛불시위 진압을
    인권탄압이라고 하는 이유가 뭔지를 보여줍니다. 승려들의 정치참여가 이뤄진 노무현정권....
    왕실불교의 폐해를 보여준 고려말 국정파행사태가 2008년 재현되고 있는 것 같은 마음입니다.
    이번 시위로 이명박 정부에게 추가로 수천억원의 지원을 받아내려는 것 같더군요.
     
    일제총독부에게 받은 땅의 재산권을 근거로 등산객들에게 징수하던 문화재관람료를여론에 밀려 폐지하려던 것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고... 정부가 대신 보상해 주라 그런 것 같습니다. 친일재산환수법에 걸어서 국고환수를 시키든가 해야지... 원.
     
    일제가 재건한 조계종.... 월하 스님처럼 솔직하게 이승만 대통령의 도움 때문에 왜색을 몰아낼
    수 있었다고 고백하면 보기 좋다. 386 승려들은 이승만이라면 이를 갈고, 불교를 탄압했다고
    몰아 붙이니.... 출생이 부정한 출생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것 자체를 부정하고 조계종의 출범에 도움을 준 이승만 대통령마저 매도하는현재의 조계종 승려들은 양심은 어디로 간건지....종교인 맞는지...
     
    돈에 대한 집착은 왜 그리 강한지....
    2008년 6월 지관 승려가 총무원장 직위를 이용해서 자기 사조직에 8천만원짜리, 30억짜리
    (세금을 타낸) 사업건을 넘겼다고 불교언론이 지적하자, 조계사 출입금지를 시키는
    조계종이 이명박 정부를 향해 집회와 자유의 표현 운운할 수 있는지 양심을 씻고 얘기할 일이다.

     
    장로대통령과 불교 2008-09-02 (화) 11:31  답글:0 추천:0 조회: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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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호택 칼럼]대통령의 목사들


            (사진 잘라냄)
    지구촌에서는 종교로 인한 분쟁과 테러가 그칠 날이 없다. 종교로 인한 전쟁은 보스니아 내전처럼 민족청소 강간센터 고문 같은 추악한 폭력을 동반한다. 이라크에서는 이슬람교 안에서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려 폭탄테러로 살육전을 벌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전통을 유지했다.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은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 “이 세상이 부처가 설파한 자비가 넘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조계종 총무원은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성탄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아기 예수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건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 들어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던 종교 간 화평이 깨지고 있어 걱정스럽다. 개신교 신자였던 이승만 김영삼 대통령 때도 불교계가 이렇게 들끓었던 적은 없었다. 지역갈등에다 종교 대립까지 일어난다면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악성 종양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헌법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 그리고 종교의 평등을 선언하고 있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첫째, 국교()를 부인한다. 둘째, 국가에 의한 종교 활동이 금지된다. 셋째, 국가에 의한 특정 종교의 우대 또는 차별이 금지된다(장영수 ‘헌법학’). 공직자들이 이러한 종교적 중립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면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 대립, 지역갈등보다 악성

    지난 대선에서 여론조사 분석가들은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여간해서 내려가지 않는 이유의 하나로 개신교 표심을 거론했다. 정치는 종교적으로 중립이어야 하지만 종교는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청와대에서 찬송가와 기도 소리가 들리게 해 달라’는 개신교 신자들의 소망은 성취됐다. 그런데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개신교의 신심()이 대통령 취임 후 국정과 인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종교의 평등을 해치게 된다.

    시중에서는 이 대통령이 다녔던 소망교회 인맥을 빗댄 ‘소망 대망()’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한다. 한나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나 청와대 비서관 중에 개신교 인맥에 줄을 대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대통령과 가까운 목사들에 관한 이야기는 근거 없는 괴담 수준으로 치부하기에는 상당히 구체성을 띠고 있다. 정부의 종교 편향에 반발하는 민심이 악화되면 불교계는 물론이고 세속의 비()신자들까지도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개신교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목사와 신도들도 이 대통령이 모든 종교인들로부터 고루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이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개신교 케이블 TV에서 만담식 설교로 인기를 끄는 장경동 목사가 석가모니와 스님들을 모독하는 설교를 해 파문을 일으켰다. 불교계를 격앙시킨 그의 설교 내용을 일일이 논박할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는 주장은 사실과도 배치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비롯해 몇 권의 저작을 통해 근면 성실 정직 같은 개신교 윤리와 신도들 사이의 결속력은 유럽과 미국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고 논증()했다. 그러나 종교적 문화가 경제발전에 필요한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수학 과학을 존중하는 합리주의, 교육제도, 법체계, 정치 지도자의 의지, 정부 행정과 기업가 정신 같은 요소가 경제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 기독교 인구는 전체의 1∼2%에 불과하고, 신도()와 불교 신자가 대부분이지만 세계 제2위 경제대국이다. 가톨릭 국가 중에서도 남미 국가들은 가난하지만, 아일랜드는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같은 종교인들끼리의 결속력이 도를 넘어서면 다른 종교와 비()신자에 대한 배타성으로 연결되기 쉽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그 신앙체계를 존중하는 것이 곧 내가 믿는 신앙을 약화시키는 일은 아니다.

    종교에 대한 배타성 버려야
    미국의 신학자 폴 니터는 종교의 관계가 ‘적자생존’에서 ‘협력자생존’의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의, 도덕적 쇠퇴, 생태계 파괴 등 인류가 당면한 위기 앞에서 모든 종교가 독선적 아집이나 환상에서 벗어나 난국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 산수가 아름다운 사찰마다 정부의 종교 편향을 규탄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6만(경찰 추산) 불자가 서울에서 집회를 연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다. 불심()이 화가 나 있다는 뜻이다. 불교계는 분명한 의사표시를 한 만큼 정부가 종교적 중립을 실천하는지 지켜보면서 청정도량()의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2008-08-30 동아일보 A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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