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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 이종석, “金日成은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

운영자 2006.01.03 14:42 조회 수 : 2160 추천: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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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金日成은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  
외교안보사령탑 이종석, 이념성향 분석      
<편집자주: 신임 통일부장관으로 이종석 NSC사무차장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李씨의 이념성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본지 김성욱 기자가 지난 해 7월호 월간조선에 기고했던 李씨 관련 기사를 다시 게재하기로 한다.

< 盧武鉉(노무현) 정부의 통일외교안보정책 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는 李鍾奭(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에 대한 盧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하다. 盧대통령은 私席에서 『李사무차장이 올리는 보고서가 최고』라고 극찬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李鍾奭의 생각이 곧 盧武鉉의 생각』이라고 한다.
  
  李차장의 독단을 거론했던 朴正圭(박정규) 前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은 지난 1월 경질됐고, 주요 외교 현안에 대해 NSC와 다른 시각의 보고서를 내던 朴南春(박남춘) 前 국정상황실장은 인사제도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李차장은 1958년생으로 성균관大 행정학과 78학번이다. 그는 졸업 후 일반 기업체에서 취직해 잠시 일하다가 29세 때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생 李鍾奭은 석사 2년차이던 1988년 8월 崔章集(최장집) 고려大 교수, 孫浩哲(손호철) 서강大 교수, 孫鶴圭(손학규) 당시 서강大 교수(現 경기지사) 등이 이끄는 「진보」 성향의 「한국정치연구회」에 가입했다. 그는 여기에서 당시로서는 금기시되던 계급론, 자본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鍾奭 차장은 북한연구를 시작한 후 宋斗律(송두율)의 「內在的 접근법」을 차용해서 「內在的 批判的(내재적 비판적) 접근방식」이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북한에 대한 反共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북한의 논리로 북한을 이해한 뒤 비판하자」는 주장이나 송두율의 「內在的 접근법」과 큰 차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李鍾奭 차장과 가깝게 교류하던 인물들은 金南植(김남식·북한연구가, 지난 1월 사망), 丁海龜(정해구·성공회大 교수), 金鍊鐵(김연철·정동영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 金根植(김근식·경남大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崔星(최성·열린당 국회의원)씨 등이다.
  
  李鍾奭 차장은 특히 金南植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씨와 함께 한국정치연구회 활동을 한 한 정치학자는 『李鍾奭씨는 대학원 시절부터 金南植의 자택을 수시로 방문하면서 북한 문제에 대해 배웠다』고 말했다.
    
  「金日成은 소련 지원 받았다」는 사실 부인
  
  李차장은 1989년 「金日成의 抗日빨치산운동에 대한 연구」로, 1993년 「金日成 주체사상과 조선로동당 연구」로 성균관大에서 각각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북한지도집단의 抗日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논문에서 李차장은 金日成을 가리켜 『군사지도자로서의 탁월성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며, 金日成의 「보천보전투」, 「조국광복회」 활동에 대해 각각 『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反日민족통일전선체였다』고 평가했다. 그의 석사논문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金日成의 명망성이야말로 당시 북한 전역에서 자율적으로 분출하고 있던 지방 인민정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지도자로 金日成을 선택하게 하는 제일의 요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당시 金日成은 일반 민중에게 「공산당의 영웅」이 아니라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있었다…. 요컨대 조국광복회에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실천적 경험자였던 金日成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의 抗日무장투쟁의 聲價(성가)로 담보된 정통성을 기반으로 해방 후 혼란했던 북한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李차장은 대학원 시절부터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 刊)과 「월간 말」誌 등에 왕성한 기고활동을 벌여 왔다.
  
  그는 1988년 9월 「역사비평」에 기고한 「북한사회주의 정권의 성립과정」에서 金日成이 소련의 지원과 조종을 받아 집권했다는 역사학계의 주장을 반박했다.
  
<소련이 左派의 다른 政派들을 제치고 계획적으로 金日成을 지원하고 조종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방 직후 북한의 각 지역에서 분출한 인민권력(인민위원회)도 소련의 조종에 의해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분출된 인민의 힘이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金日成은 抗日무장투쟁에서 얻은 그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해방 직후 북한사회에서 통일전선의 모색과 군중노선의 추구, 그리고 현지지도 등을 실천하였다>
  
  「친소파·남로계·연안파 『숙청』에 대한 最初의 연구」라는 副題(부제)가 붙어 있는 「金日成의 『反宗派 투쟁』과 북한권력구조의 형성」(1989년 8월 「역사비평」)이라는 논문에서 李차장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金日成은 소련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남한과 미국의 많은 학자들이 金日成 지도집단 형성과정을 단순한 파벌싸움이나 피의 숙청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金日成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도집단의 형성과정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金日成과 그의 동료들을 소련의 조정에 의해서 움직인 꼭두각시로 파악하며 그들의 성공과정을 정치적 사리사욕에 눈 먼 일개 파벌의 피의 숙청을 통한 독재권력장악으로 이해하려는 그릇된 관점을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굴절의 한국 현대사가 낳은 원한과 증오의 체현자들이 우리의 북한 연구를 독점해 옴으로써 더욱 위력을 떨치게 되었다…. 비과학적이고 이데올로기 지향적인 「꼭두각시-파벌투쟁론」은 불식되어야 한다>
  
  그는 이어 『소련의 규정력 속에서도 자율을 추구하였으며, 그것이 결국은 규정력의 극복으로 이어졌다면 「꼭두각시론」은 마땅히 폐기돼야 할 것』이라며 『우리가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金日成과 그의 동료들이 소련의 조종을 받은 꼭두각시가 아니었음은 명확히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그는 過去와 現在 북한지도집단의 성격에 대해 각각 『북한지도집단 성원들의 면면을 세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지도성원들의 대부분이 이른바 「抗日혁명전통」의 직·간접적 관련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만경대학원 출신을 중심으로 抗日유격대 관련자의 후예들이 성장하여 오늘날 북한지도집단의 人的충원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李차장은 金日成·金正日 父子세습 체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필자의 분석이 옳다면 오늘날 북한의 후계자가 공식화되어 있는 金正日이 권력을 승계할 때 북한 지도집단의 내부동요는 미미할 것이다. 그것은 金正日과 북한 지도집단內 핵심성원들 간의 공감대는 물리적 공포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抗日 혁명전통」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사상적·인간적 결속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林東源씨와의 인연
  
  李씨는 1993년 「조선로동당의 지도사상과 구조변화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4년 林東源(임동원) 前 국정원장의 도움으로 세종연구소에 들어갔다. 『지금도 李차장이 林東源 前 실장의 그늘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그는 박사논문에서 『주체사상이 북한에 적용된 것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결과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李鍾奭 차장과 교분이 있는 한 대학교수는 『박사논문을 포함한 그의 각종 저술에는 주체사상의 현실적 실패가 지적될 뿐 인권탄압 등 북한정권에 대한 본질적 비판은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1995년 李鍾奭 차장이 저술한 「현대북한의 이해 사상·체제·지도자」(역사비평사刊)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思想은 명백히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소련과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자주성을 획득하기 위한 金日成 지도부의 노력과 자력갱생적 삶의 추구, 그리고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주체사상의 기치를 내걸면서 金日成은 북한 주민들에게 자주시대의 개척자로서 그리고 자신들에게 자주적 삶을 안겨 준 은인으로 각인되었다>  
  
『어버이 수령은 北 논리로 자연스런 호칭』
  
  李차장이 2000년 발간한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에서는 『북한의 남조선혁명론이 좌절됐다』면서 『북한의 통일방안은 (연방제가 아닌) 국가연합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러한 수령은 북한에서 어버이 수령으로도 호칭된다. 부모 이외에 어버이가 있을 수 없는 우리에게는 낯설고 우스꽝스러운 호칭이지만 북한의 논리에서는 자연스러운 호칭이다…. 관찰자들이 전하는 천부적인 사교력과 판단력은 金日成이 상당한 수준의 외교가였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국가에서 수령과 인민대중이 하나가 되는 일심단결이 강조되고, 최고의 윤리로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과 효성이 강조된다...  
수령이 대중으로부터 충성과 효성을 맹세받는 대신에 以民爲天(이민위천)의 정신으로 인민을 대하고 「인민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정치」, 즉 仁德(인덕)정치를 공언한다. 이 인덕정치야말로 현대와 봉건의 착종으로 특징지어지는 金日成 카리스마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李鍾奭의 북한 이해는 북한식 논리가 파고든 것』
  
李鍾奭 NSC 사무차장의 對北觀은 宋斗律의「내재적 접근론」과 대동소이하다.

李차장은 여러 논문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벗어난 객관적인 관찰만이 변화의 역사의 참모습을 밝혀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金日成 빨치산활동을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할 만한 「抗日혁명투쟁」으로 평가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정통 역사학계의 지적이다.
  
李炫熙(이현희) 성신女大 명예교수는 『전체적인 독립운동사에서 金日成의 抗日투쟁은 미미하다』고 말했다.
  
『金日成의 日帝시대 抗日투쟁은 1937년 보천보 전투와 1939년 무산 전투 정도였습니다. 金日成이 지휘한 보천보 전투는 보천보라는 里단위 마을을 야습해서 하루 동안 분탕질한 것이었고, 무산전투 역시 무산의 일본주재소를 습격했던 유사한 사건이었습니다.
金日成은 중국 공산군인 동북항일연군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이 섞여 있는 30여 명을 이끌고 얕은 압록강을 넘어 인근 보천보와 무산을 잠깐 왔다 간 것입니다. 우리 측 자료는 물론 중국·일본 측 자료를 종합해 볼 때, 金日成이 抗日의식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를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李교수는 『金日成의 抗日빨치산활동은 李承晩 등 대한민국 건국세력의 독립운동은 물론, 광복 전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을 벌였던 무정, 허가이, 현준혁 등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고 지적했다.
  
主思派 출신인 李東湖 북한민주화포럼 간사(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는 李鍾奭 流의 북한이해에 대해 『남한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취약한 틈을 타 북한식 논리가 파고든 것』이라고 말했다.
  
『舊세대는 6·25를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체험했던 세대였습니다. 左派의 논리에 대응한 연구의 필요성 자체가 적었죠. 당연한 얘기를 굳이 연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틈을 비집고 소위 修正主義 이론이 직수입됩니다. 「金日成 장군의 抗日투쟁이 冷戰논리로 폄하됐다」는 식이죠. 이런 논리는 「反帝·反봉건 혁명론」으로 연결됩니다. 북한은 抗日투사들에 의해 식민지 해방을 이룬 정당성 있는 나라지만, 남한은 親日派와 그 후예들에 의해 아직도 美帝의 식민지 상태에 있으므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金正日의 눈으로 북한을 보는 사람』李鍾奭 NSC 사무차장의 후견인 林東源 前 국정원장.
  
李鍾奭씨가 반박하고 있는 「金日成 꼭두각시론」 역시 史料를 통해 입증된 객관적 사실이다.

예컨대 북한의 토지개혁案(1946년 3월5일)과 20개 정강(1946년 3월23일) 原案은 소련군정청 로마네코 정치사령관의 러시아 원문案을 번역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연구한 후 「북한의 토지개혁과 농업협동화」(연세大 박사학위논문, 1990년)를 쓴 金聖甫(김성보)씨는 토지개혁案의 원안이 소련군案의 번역임을 밝혀 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 兪成哲(유성철)씨는 「진실과 증언(김철범 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소련은 이어 그해 5월 북한에 파견한 군사고문단을 전쟁경험이 풍부한 인물로 전원교체했다. 수석 군사고문은 스미로노프 소장에서 獨蘇전쟁의 영웅 바실리예프 중장으로 바뀌었다. 이 소련 군사고문단이 직접 초안을 작성한 것이다』
  
申一澈 고려大 명예교수는 『金日成은 연설문도 로마넨코 사령부의 러시아語 원문을 번역한 것을 읽었다』며 『金日成의 정치는 로마넨코 정부의 번역정치이자 통역정치였다』고 평가했다 (「북한주체사상의 형성과 쇠퇴」)
  
李鍾奭식의 북한 이해에 대해 탈북자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최근 북한에서 脫北한 한 조선노동당 간부는 『李鍾奭씨는 북한의 현실을 자기식대로 「가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남한에 내려와 內在的으로 북한을 이해하고 있다는 30여 편의 논문과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건 1차 현실을 2차화, 3차화시킨 것입니다. 事實 그대로 보자고 하지만 자신들의 기준으로 북한을 보는 것입니다. 가공하는 것이죠』
  
對南부서에서 근무했던 또 다른 脫北者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있는 그대로 보자고 하지만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 북한 주민의 시각에서 보면 북한 정권은 독재요, 反민족국가지만, 金正日 정권 차원에서 보면 그들 나름대로의 체제와 제도를 가지고 있는 셈이죠. 李鍾奭씨는 金日成과 金正日의 시각으로 북한을 보고 있는 겁니다』●  

이종석 사무차장의 각종 저술 중 인용

▲“북침인가 남침인가의 문제는 한국전쟁을 살펴보는 데 무의하다고 할 수 있다” <90년 3월5일 한국정치연구회가 펴낸 북한정치론에서 이종석씨가 집필한 부분>

▲“북한의 거주이전*여행자유제한은 사회주의 특성과 남북군사 대치 하에서 택한 방어적 조치이다”<90년 2월 사상문화운동>

▲“통일의 제1요건은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는 자주성확립과 평등의 존중이다”<90년 3월 성균관대 학보>  

▲“문민정부는 반공반북에 의존했던 수구냉전세력과 결별해야 하며 정권안보수단으로 이용돼 온 국가보안법 등 구시대적 반공반북관계법안은 폐기돼야 한다”<94년 실천문학 봄호>

▲“김정일은 오케스트라 연주 중 특정 연주자의 반음착오까지 알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종자론이라는 영화예술론까지 내놓을 정도로 문예이론도 상당한 수준이다.” <94년 7월12일자 한겨레신문. 이 부분은 이후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등에서 다시 반복된다.>

▲“휴전 이후 반세기 간 계속되는 긴장과 대립, 그리고 사건의 연속 속에서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한국정부나 미국이 잘해서가 아니다. 그 해답의 반은 김일성과 북한사회가 가지고 있다. 즉 그는 우리에게 무모하리만치 음모적이고 저돌적이며 강경해 보이지만 실은 전쟁을 두려워하며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분명한 것은 김일성에게는 상당한 외교적 수완과 역량이 있었다는 점이다.”

▲“광폭정치는 인민을 위한 정치는 그릇이 커야 하며 그릇이 크지 못하면 대중을 다 담아내지 못하며 대중이 정치를 외면하게 된다거나 로동계급의 당의 정치는 전체인민을 정치의 주인으로 되게 하여야 하는 것인 만큼 어디까지나 정치의 폭이 넓어야 한다는 논리에 기초한다. 오늘날 김정일의 광폭정치는 대내적으로 주민단결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경제위기 속에서 북한이 남한기업인들은 물론 교포실업가들과 종교인 등을 북한으로 불러들이는 논리적 발판이 되고 있다.

▲“김정일이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권력핵심부 내에서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는 인사정책을 써왔다고 할 수 있다...아마 이러한 안정성은 그의 조직관리능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관련 기사 >
 李鍾奭이 사사한 金南植...남파간첩, 1980년대 후반 이후 親北논리 전파
김성욱기자  2006-01-02 오전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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