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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숭배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한겨레 21> 기사

운영자 2004.12.10 14:40 조회 수 : 1303 추천: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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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무덤에 침을 뱉어라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야스쿠니신사는 왜 문제인가…전범으로 사형당한 조선인 23명은 천황의 품에서 평화로울까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외국의 국가원수가 다른 나라를 공식 방문하게 되면 그 나라의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의 국가원수들은 이런 의전행사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 일본에는 국립묘지 형태의 국가 위령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말 많고 탈 많은 야스쿠니신사가 도쿄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얼마나 말이 많냐 하면 자국 일본의 총리가 1년에 한번 참배하는데도 주변국에서는 참지 못하고, 일본 국내에서도 비판과 옹호의 소리가 높다. 지난 11월21일 칠레에서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향해 “두 나라 정치 관계가 정체와 곤란을 겪게 된 최대 장애요인은 일본 지도자의 야스쿠니 참배”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 야스쿠니신사의 전쟁기념관인 류슈칸의 전시실에는 '야스쿠니의 신들' 이란 제목 아래 전사자들의 인물사진 3천여장이 전시돼 있다.

천황 위해 목숨 바쳤다면 신이 되는 곳

편 자민당의 온건세력과 경제계에서 고이즈미에 대해 야스쿠니신사 참배 중단 요구가 제기되자, 일본의 우익들은 한목소리로 고이즈미가 계속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의 한 사람인 자민당 간사장 대리 아베 신조는 후진타오의 발언이 중국의 패권주의의 발로라면서, “다음, 그 다음 지도자도 고이즈미의 뜻을 이어받아 야스쿠니 참배를 계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전사자들 사진 중엔 조선 출신의 가미카제 다케야마 히로시도 포함돼 있다.

도대체 야스쿠니신사가 어떤 곳이기에 거의 매년 이런 논란이 되풀이될까? 야스쿠니신사가 처음 건립된 것은 1869년이었다. 도쿄 초혼사(招魂社)로 문을 연 이 신사는 10년 뒤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로 이름을 바꿨다. 야스쿠니신사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신사가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제국 일본의 국가신도 체계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는 ‘천황의 신사’인 동시에 일본 군국주의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군사시설이기 때문이다. 야스쿠니가 차라리 실제 전몰자들의 유해가 묻힌 묘지였다면 이곳의 참배 행위를 두고 그토록 심한 논란이 벌어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야스쿠니에 봉안된 것은 전몰자들의 유골이 아니라 사망자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영새부’(靈璽簿)라는 명부이다. 이 영새부를 ‘어우차’(御羽車)라 불리는 가마에 싣고 야스쿠니신사의 합사하는 의식을 ‘초혼식’(招魂式)이라 하는데, 1933년부터는 매년 일본방송협회에서 이 의식을 전국에 라디오로 생중계하기도 했다.

야스쿠니신사가 일반적인 전몰장병 묘지와 다른 점은 이곳에 봉안되면 전사자가 아니라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살아생전에 어떤 인물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전에 아무리 부도덕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가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야스쿠니신사에서는 신으로 대접받게 되는 것이다. 야스쿠니쪽에 따르면 초혼식이 거행될 때 초빙받는 전사자의 혼령은 인령(人靈), 즉 사람의 혼령이지만, 합사제를 지내고 신사에 안치되면 비로소 신령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혼식은 “고인의 영을 개인의 영으로서, 또는 유족의 혈연의 영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신도하의 국가 제사의 대상으로서 신령으로 전화시키는 의식”인 것이다.

야스쿠니에서 죽음은 슬픔이나 상실감의 대상이 아니다.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이 여러 시간에 걸친 초혼식을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까지 한 것은 이런 의식이 군국 일본의 전쟁 동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지하에서 천황의 은혜를 경건히 떠받들고, 유족은 자신의 아들이나 형제를 야스쿠니에서 신으로 모셔주는 천황의 은혜를 입은 광영에 감읍하여 부형의 전사를 기뻐하고, 일반 국민은 또 다른 전쟁에 천황과 제국 일본을 위해 죽기를 기약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야스쿠니신사를 통해 제국 일본의 지도자들이 끌어내려 한 분위기였다.

 

일본의 ‘어령신앙’ 전통과 거리 멀어

야스쿠니신사는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군인들을 고무하는 장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국신민들을 통합하는 터전이었다. 야스쿠니신사가 군부의 관할을 받았으며, 최고책임자인 궁사(宮司)도 현역 육군대장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야스쿠니신사는 천황이 직접 참배하는 신사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부터 천황은 대일본제국 육해군 대원수의 자격으로 군복을 입고 봄 가을로 야스쿠니신사에 나아가 전국의 유족을 초대하여 전사자의 공적을 찬양하고, 영령을 위령하는 대제전을 거행했다.


△ "그들은 평화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야스쿠니신사의 류슈칸에 전시된 칼을 든 평화의 여신.

일본의 우익들은 야스쿠니신사가 고대 일본 이래 일본의 고유한 정신을 살리는 공간이라 주장하지만, 사실 국가신도, 특히 그 핵심인 야스쿠니신사는 근대에 들어와 출현한 ‘만들어진 전통’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둘러싼 위헌 소송에 자주 위헌론쪽 증언자로 등장하는 오에 시노부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전장에서 죽은 자를 적군이든 아군이든 불문하고 함께 제사를 지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패전한 쪽의 망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정신적인 안정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점이 전승자의 마음을 괴롭히는 중요한 전후 대책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는 고래의 민간신앙인 ‘어령신앙’(御靈信仰)이 반영된 것인데, 어령신앙이란 생전에 원한을 가진 채로 죽은 사람의 원령이 역병을 비롯해 여러 가지 재앙을 불러온다고 하여 두려워하는 신앙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관우 장군이나 최영 장군처럼 현세에서 깊은 원한을 품은 분들이 무당들이 즐겨 모시는 신이 되듯이, 일본의 어령신앙에서도 원한이 깊어야 영력의 효험도 크다고 믿었다. 그런데 야스쿠니신사에 봉안되는 영혼, 즉 초혼제에 초대받은 영혼이란 현세에 큰 공을 세워 한을 남길 여지가 없는 영혼이었다는 점에서 이미 전통적인 어령신앙의 계승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야스쿠니신사는 위령 공간에 그치지 않고 국가에 의해 공을 기리고 현창하는 장소였다는 점에서 민간신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다. 시노부 교수는 특히 “패전한 적군의 전사자의 영혼을 내팽개쳐 돌보지 않고 전승의 영광에 싸인 승리자인 아군의 전사자만을 제사 지낸다는 생각”이야말로 일본의 전통에서 비춰볼 때 대단히 이례적인 사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논란이 될 때면 제일 먼저 제기되는 문제가 A급 전범 14명이 이곳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이다.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이 야스쿠니신사에 비밀리에 합사된 것은 1978년 10월17일로 일본 후생성이 이들의 명단을 야스쿠니신사로 보낸 지 12년 만의 일이었다. 이들 14명 중 사형된 자는 7명이고, 옥중에서 병사하는 등 다른 이유로 사망한 자는 7명이다. 그러나 이곳에 합사된 전범은 이들만이 아니다. 이른바 B·C급 전범으로 처형된 사람과 살아 있었으면 틀림없이 전범으로 처벌 대상이 되었겠지만, 패전시 자결한 사람 등 1천여명도 이곳에서 신이 되어 있는데, 야스쿠니신사쪽은 이들 전범과 자살자를 ‘쇼와순난자’(昭和殉難者)라 부른다.

1985년 패전일인 8월15일에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A급 전범의 명부를 야스쿠니에서 삭제하는 분사(分祀)를 추진한 적이 있는데, 야스쿠니신사쪽은 “일단 합사된 혼을 다른 곳에 움직이는 일은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강경 우파인 나카소네쪽이 왜 A급 전범의 분사를 추진했을까?

1999년 내각 관방장관 노나가가 “누군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A급 전범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지게 하고, 그들을 분사한다”는 발언을 보면,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우려하는 대로 “A급 전범 분사는 일본쪽으로서는 A급 전범에게 전쟁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천황의 신사 야스쿠니의 시스템은 불문에 부치는” 정치적 타협을 가져올 수도 있다. A급 전범들이 중대한 전쟁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역으로 그들을 분사하여 논란의 소지를 줄인 뒤에 야스쿠니신사에 천황이 참배하는 것을 상상해본다면 문제점은 명백하다는 것이다.

“살아서는 강제징용, 죽어서는 강제수용”

사실 고이즈미 등이 이웃 나라들의 엄청난 반발에도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것은 단순히 당장의 선거에서 우익의 표를 좀더 얻자는 얄팍한 계산에 근거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천황의 뜻으로 만들어진 천황의 신사에 천황이 친림하여 제국 일본의 수호신들에게 천황이 술 한잔 바치는 것으로 상징되는 과거로의 회귀이다.

일본의 다른 신사와는 달리 야스쿠니신사에는 제신(祭神)이 엄청나게 많다. 메이지유신 관련 7751위, 청일전쟁 1만3619위, 러일전쟁 8만8429위, ‘만주사변’ 1만7175위, 중일전쟁 19만1238위, ‘대동아전쟁’ 213만3823위 등 모두 246만6427위가 봉안돼 있는데, 이들이 모두 주신(主神)으로 대접받는다.

이 중 압도적인 다수가 대동아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천황 폐하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죽어 야스쿠니신사에서 신이 되었다는 자들 중에는 현재 대만 출신자 2만8천명, 조선 출신자 2만1천명이 합사돼 있다. 이들 중에는 B·C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조선인 23명, 대만인 26명도 포함돼 있다. 조선이나 대만 출신 유족들의 대부분은 일본 정부로부터 제대로 전사 통지도 받지 못했고, 유골도 반환받지 못했으며, 더더욱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다는 것을 통보받지도 못했으며, 이에 동의한 바도 없다. 1979년에 대만의 유족들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 철회를 요구했을 때, 신사쪽은 “일본인으로 싸움에 참가한 이상, 야스쿠니에 모셔지는 것은 당연”하다며, 합사는 “천황의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유족이 철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황당한 논리로 거절했다. 2001년 6월 한국의 유족 55명이 합사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원고 중 한분인 어떤 유족은 “야스쿠니 합사는 살아서는 강제 징병이고, 죽어서는 강제 수용인 이중의 강제 연행”이라고 기막힌 심경을 토로했다.

일본인 유족의 ‘합사철회’요구도 거부

일본인 유족들 중에서도 종교적인 이유에서, 혹은 평화주의의 신념에 따라 합사 철회 요구가 나오고 있다. 현재의 야스쿠니신사는 1952년 발효된 종교법인법에 따라 같은해 9월 도쿄 도지사의 인가를 받은 단일 종교법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사쪽은 아직도 “야스쿠니신사는 헌법에서 말하는 종교가 아니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라도 존경해야 하는 도(道)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논리는 바로 일본제국주의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논리였는데, 일본의 우익들에게 “야스쿠니는 여전히 사실상의 국가신도이며 초종교적인 천황교”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국립묘지가 죽은 병사들에게 계속 군복을 입혀 국가를 위해 복무하도록 하는 기능을 하지만, 유가족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가족묘지로 안장돼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 오에 시노부 교수의 <야스쿠니신사>의 후기는 기막힌 사연을 전한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른바 국민가요로 널리 불린 노래 중 하나가 <야스쿠니궁>이었는데, 이 노래의 가사에는 “야스쿠니궁에 영혼은 진좌되어도 틈나는 대로 돌아가라, 어머니의 꿈길로”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다름 아닌 오에 교수의 아버지였다. 군인이었던 오에 교수의 아버지는 출전한 지 3주 만에 전사한 친구의 피 묻은 군복에 고이 간직한 어머니의 사진을 보고 노래를 지었는데, 사진 뒷면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라고 24번이나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친구를 기리며 지은 노래를 들으며 오에 교수는 “온몸을 천황을 위해 바쳤던 전사자의 영혼만이라도 왜 유족의 품안으로 돌려보내지 않는가, 왜 죽은 자의 영혼까지도 천황의 국가가 독점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의문을 던졌다. ‘영령’이 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어머니가 멀리 도쿄의 야스쿠니신사로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던 그런 시대, 그 시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일까?


△ 일본인 관광객들이 야스쿠니신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곳을 두고 일본에서도 매년 비판과 옹호의 논란이 되풀이된다. (사진 / 박승화 기자)

야스쿠니신사의 전쟁기념관인 류슈칸(遊就館)에 가면 칼을 든 평화의 여신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고 “일본 전사들은 전쟁을 싫어했다”라고 쓴 쇼와 천황의 시가 걸려 있다. 일본군이 다른 나라로 가면 ‘진출’이고 다른 나라 군대가 일본 땅을 밟으면 ‘침략’이다.

만주국 건국에 관한 설명을 보면 만주는 원래 만주족의 땅이고, 그 증거로 만주족이 건국한 고대국가로 고구려와 발해를 들고 있다. 중국에 ‘동북공정’이 있다면, 일본 우익들은 더 역사가 깊은 ‘만주공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모두 20여개의 전시실을 갖고 있는 류슈칸의 마지막 전시실들에는 ‘야스쿠니의 신들’이란 제목하에 전사자들의 인물사진 3천여장이 전시돼 있다. 여기에는 “우리들의 현재는 선인의 죽음 위에 건설된 것”이라며,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달려 있다.

240여만에 달한다는 야스쿠니의 신들 중에서 어떤 기준으로 3천장의 사진을 골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잘 보면 도조 히데키 같이 A급 전범으로 처형당한 자가 법무사(法務死)라는 죽음의 원인에 대한 희한한 설명을 달고 숨어 있다. 이 사진에 포함된 인물들은 지배층이나 장군들만이 아니라 영관, 위관, 오장, 사병, 군속 등 다양한 계층이 망라돼 있는데, 모든 일본인이 일치단결하여 자발적으로 싸웠다는 것이다. 영문해설에는 이들을 ‘야스쿠니의 신들’이라 하지 않고 전쟁영웅이라 해놓았다.

이들 가해자의 인해전술 속에서 우리는 두명의 조선인을 만날 수 있다. 가미가제 특공대가 되어 죽어간 조선인 탁경현(卓庚鉉, 창씨명 光山博文)과 역시 조선 출신의 가미가제 다케야마 히로시(武山隆). 이들을 포함해 야스쿠니신사가 전시한 제국 일본의 수호신들이 진실로 침략전쟁을 찬양하며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간 것일까?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와 만난다

야스쿠니신사는 전쟁에 의한 희생자를 국민들이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명예나 영광이라는 도착된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다. 침략국가가 일으킨 잘못된 전쟁에 가해자로 동원돼 죽음을 강요당한 전사자들을 ‘영령’으로 칭송하는 일은 고이즈미 총리 야스쿠니신사 참배 위헌 아시아소송 원고단 단장 스가하라 류겐이 잘 지적한 것처럼 국가의 전쟁범죄를 정당화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전사자를 이용하는 일로서 전사자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이곳에서 신이 되어버린 죽음은 자연스럽지 않다. 슬픔도 상실감도,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다짐도 ‘죽음을 죽여버린 공간’인 야스쿠니신사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일본은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했다. 국가를 위해 죽는다는 일은 이제 가까운 장래에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일본보다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한 한국도 피해갈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죽은 이의 죽음을 비극으로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가치로 현창하는 일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의 공통된 수법이다. ‘사의 찬미’는 윤심덕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