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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관계 냉전 ‘봉쇄정책’ 창안 조지 케넌

운영자 2004.04.04 05:25 조회 수 : 4224 추천:682

extra_vars1 http://weekly.chosun.com/wdata/html/news/200403/20040323000029.html 

냉전 ‘봉쇄정책’ 창안 조지 케넌

한반도 운명 두 번 바꿨다

어떤 사람은 역사의 목격자로, 어떤 사람은 역사의 창조자로, 또 어떤 사람은 역사 통찰과 해석으로 명성과 영예를 얻었지만 그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진 사람이다.”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2월 20일 뉴저지주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열린 조지 케넌(Kennan) 100세 기념 강연회에서 케넌의 역사적 역할을 극구 칭송했다. 케넌은 1946년 구(舊)소련 주재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면서 국무부에 ‘장문의 전보(Long Telegram)’를 보내 대소(對蘇) 봉쇄정책을 입안토록 주창했던 인물. 모교인 프린스턴대가 2월 16일로 100세를 맞이한 케넌의 과거 업적을 기리는 자리였다.

파월은 “내가 현역 장교로 근무했던 독일 베를린의 장벽과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에서, 그리고 직접 참전했던 베트남에서 봉쇄정책이 가장 확실한 세계 전략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을 이었다.

미국의 소련 봉쇄정책을 입안해 냉전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케넌은 자의든 타의든 한반도의 운명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훗날 ‘세기말의 회고(At A Century’s Ending)’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은 맥아더 장군의 의도처럼 일본의 영구 비무장중립을 구상했었다고 밝혔다. 일본을 군사기지로 삼지 않으면, 소련도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타결에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1949년 말부터 갑자기 소련의 3차대전 도발이 임박했다는 근거 모를 위기론과 미군의 무기한 일본 주둔설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의 미국 기지화를 우려한 소련은 지정학적 보상으로 한반도 입지를 강화하려 했고, 공교롭게도 미국은 한반도에 관심 없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한국의 미 극동방위선 변경에 영향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1950년 1월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미국의 대공산권 방위는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 류큐 제도를 거쳐 필리핀을 잇는 선”이라면서, “이 방위선 밖에 위치한 나라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하여 아무런 보장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은 결국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됨을 시사한 것으로, 결국 북한의 남침 의도를 굳히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이 케넌이 보는 한국전쟁의 기원이다.

케넌은 또 한 번 역설적으로 한반도 운명에 간여하게 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戰勢)를 역전시킨 뒤 10월에는 압록강까지 진격,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10월 말 기습과 11월 말 대공세에 직면하면서 워싱턴은 돌연 공황상태에 빠진다.

트루먼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키는 계획을 심각하게 검토한다. 영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방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 미국 측에 휴전을 제의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이런 혼란상태에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애치슨 장관에게 1950년 12월 4일 케넌은 한 장의 메모를 전달한다.

“친애하는 장관께: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일어난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해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국민과 우방들에 우리가 직면한 불행한 사태를 숨기거나 고함을 지르고 신경질을 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위기는 우리의 자신감과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위상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해치는 방향으로 악화될 것입니다. 조지 케넌.”

애치슨라인 선언으로 한반도 공산화 위기를 자초했던 애치슨 당시 미 국무장관은 케넌의 메모를 받아들고 “한국을 적화(赤化)시킬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이는 곧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을 유도해 오늘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케넌이 소련 주재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1946년, 8000단어에 이르는 ‘전보’를 통해 소련 봉쇄전략을 촉구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소련은 공산주의의 존립을 위해서는 미국 민주주의를 파괴해야만 한다는 신념을 가진 광신도들의 정치세력”이라고 경고했다.

100세 맞은 미국 최고 러시아 전문가

▲ 1961년5월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과 환담 중인 조지 케넌(왼쪽)
프린스턴대에서 러시아를 공부한 케넌은 미국이 1933년 소련과 수교하기 이전부터 베를린과 라트비아에서 소련 정세를 분석하는 임무를 수행해온 미국 최고의 러시아 전문가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소련이 공산주의 이념을 침투시켜 세계적 영향력을 확대할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이념적 토대가 다른 미국의 주도를 따를 리 없다는 판단 아래 서유럽·일본의 경제와 자신감을 회생시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고, 소련의 무모함을 인식시켜 전후 문제 타협을 유도하는 정치적 봉쇄가 불가피하다고 제안했다.

봉쇄이론은 공산주의 전복을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소련 체제가 내부분열로 인해 자체 붕괴되도록 사방을 차단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당시 소련은 대외정책에 있어 2대 기조를 견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동유럽과 중유럽을 지정학적으로 합병하고, 서유럽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제3세계의 국민해방 운동, 쿠바·베트남·중국의 공산세력과 중동·북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세력을 적극 지원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세계전략’ 정당화하려는 네오콘 못마땅

케넌이 긴급 타전한 ‘전보’는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 정부의 내부문건으로 회람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정세분석 전보’를 보충·부연한 논문을 ‘Mr. X’라는 필명으로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1947년 7월호)에 기고했고, 종전(終戰) 이후 미·소간 갈등이 고조되던 시점에 등장한 그의 ‘X 논문’은 미국 정책결정 집단의 구미에 딱 맞아떨어졌다. 이후 양극 체제하에서 구소련과 체제 대결을 벌이게 된 미국 대외정책은 그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갔다.

케넌은 곧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으로 발탁됐고, 국가안전보장법(National Security Act) 제정으로 중앙정보국(CIA)과 백악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속속 창설됐다. 그 과정에서 그의 제안은 전후 유럽 재건계획 ‘마셜 플랜’으로 구현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소련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공산주의 세력 또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항, 그 직접적인 위협에 처해 있던 그리스·터키 등 모든 나라에 군사 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트루먼 독트린으로 발현됐다.

하지만 ‘봉쇄’는 애초부터 소련과의 대화와 협상을 무의미한 것으로 전제했고, 미국의 무차별적인 개입주의를 정당화함으로써 후세의 비판을 받을 여지를 남겼다. 마침내 미국 행정부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과장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결성하는 등 점차 군사적 봉쇄에 치중하게 됐고, 서독을 나토 동맹에 편입시키면 독일 분단이 고착화할 수 있다는 케넌의 주장은 묵살되고 만다.

그는 결국 갈등 끝에 1952년 모스크바 주재 대사에서 학계로 돌아갔다. 이후 자신의 구상을 벗어난 미 행정부의 군사적 봉쇄정책이 냉전 대결을 부당하게 장기화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 탓에 케넌은 생의 후반 50년을 워싱턴 주류사회에서 소외돼 살았다.

케넌으로선 자신의 역사적 혜안과 예지를 높이 평가해준 파월 장관의 연설이 굳이 달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신(新)보수주의자(네오콘·Neo-Conservative)들이 대(對)테러 전쟁을 명분으로 한 세계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파는 것은 못마땅해 해야할 입장이다.


◈조지 케넌

1904년 출생

1925년 프린스턴대학 졸업

1927~47년 미국 외교관으로 유럽에서 활동

1947년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1949~50년 국무장관 고문

1952년 소련 주재 미국 대사

1956~74년 프린스턴대학 역사학 교수

1961~63년 유고슬라비아 주재 미국 대사

 

윤희영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hy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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