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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_vars1 http://www.futurekorea.co.kr/article/article_frame.asp?go=content&section=역사를움직이는기도&id=5438 


아이젠하워 장군과 노르망디 상륙작전

역사를 움직인 기도-세계편 11.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루전인 1944년 6월 5일 美 제101공정사단 506연대 2대대 `이지 중대`(Easy Company)소속의 대원들을 격려하는 아이젠하워의 모습.

기도로 시작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는 바이다”

“연합 원정군의 육해공군 장병 여러분, 여러분들은 바야흐로 위대한 십자군 원정에 나서려 하고 있다. 여러 달 동안 우리는 이 과업을 준비하기 위해 땀 흘렸다. 지금 세계의 시선은 여러분들에게 쏠려 있다. 나는 여러분들의 용기, 임무에 대한 헌신성, 그리고 전투역량에 무한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완전한 승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행운을 빈다! 그리고 이 위대하고 고귀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는 바이다.(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의 노르망디 상륙일 연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장군은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자 미국의 34대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아이젠하워는 1891년 10월 14일 텍사스의 테니슨(Tennyson)에서 데이비드 제이콥 아이젠하워(David Jacob Eisenhower)와 아이다 엘리자베스  스토버(Ida Elizabeth Stover)의 일곱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드와이트(Dwight)라는 그의 이름은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그의 부모가 19세기 최고의 복음전도자이자 대설교가인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이젠하워 장군


아이젠하워의 아버지는 크림 공장에서 일했고, 집안형편은 매우 궁핍했다. 때문에 아이젠하워와 그의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심한 노동을 해야 했고, 또 강한 신앙심을 가지게 됐다. 아이젠하워는 어린시절부터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매일 가정 예배를 드렸다. 그의 가정생활은 교회 생활과 일치가 되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의 믿음은 삶 가운데서 온전히 실천 될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어린시절부터 반드시 매주 한 번씩 ‘메이플라워 공약(Mayflower Compact)’을 읽었다고 한다. 이 공약은 미국의 선조인 청교도들에 의해 1620년에 체결된 것으로 미국을 건국한 취지를 밝힌 것이다. 그 취지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경의 진리를 퍼뜨리는 것이다. 이는 나라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일관성 있는 기독교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순전한 신앙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청년 시기에 다리의 질병이 무척 심했다. 의사는 곧 수술을 해서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기도를 한 후, 하나님께서 반드시 치료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 그는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잠든 사이 의사가 강제로 마취를 시키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의 형제에게 방문을 지켜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수술로 다리를 잃는 것을 면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믿음이 없어 먼저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아이젠하워는 불구가 되어 훗날 세계의 역사를 뒤바꿀 만한 공헌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안이 넉넉지 못했던 그는 美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로의 입학을 선택했으며 1915년 졸업 후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맥아더 장군과 달리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했던 그는 47살이 되도록 만년 소령으로 제자리걸음을 하는 바람에 적은 군대 월급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실제로는 당시 그의 상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품성 좋은 아이젠하워가 언젠가는 큰 인물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7년씩이나 놓아주지 않고 있었던 것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는 5성 장군으로 도약,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맡게 됐다. 아이젠하워는 2 차 대전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됐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수립과 집행을 1943년 지중해의 말타(Malta) 섬에서 비밀리에 준비했다. 상륙작전이 있기 며칠 전 그는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올라 작전수행을 준비하고 있는 군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이젠하워는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를 지켜보던 지휘관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친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훈련받은 것을 동원할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손에 모든 것을 맡겼으니 우리는 행동으로 들어갑시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전개도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 밤인 1944년 6월 6일은 폭우 안개 등으로 도저히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이었다. 악천후를 고민하던 연합군 지도자들은 이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각각 기도했다고 한다. 루스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 아이젠하워 사령관도 모두 전쟁의 승리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17시간이나 기도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한편 기상 예보자인 스태그(Stag) 대령의 정확한 일기예보를 확신했던 연합군 수뇌부는 결단을 내리게 되고 역사상 가장 큰 군사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다. D-데이 하루 동안 연합군은 병력 8만 7000명, 각종차량 7000량, 보급물자 3,500만 톤을 상륙시켰고 7월말까지 그 수량은 156만 7000명, 33만 3000량, 160만 톤에 달했다. 특히 상륙 후 첫 3주 동안 연합군의 손실은 막대했다. 공식적으로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1,796명에 달했고 작전 과정에서 독일군 41,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아이젠하워를 포함한 연합군 수뇌부가 1년 넘도록 전략을 수립한 이 작전은 결국 나치 독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결국 패배를 인정한 히틀러가 1945년 4월 29일 총통관저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그 이튿날 함께 자살함으로써 전쟁은 막을 내렸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직후의 미군 모습


전쟁이 끝난 후 알려진 사실이지만 연합군의 판단과는 달리 당시 독일군 기상장교는 6일에도 악천후가 계속될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에 독일군의 경계는 소홀해져 결과적으로 상륙작전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됐다. 실제로 상륙작전이 끝난 후 아이젠하워 장군은 스태그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메모를 보냈다고 한다. “고맙소.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신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전후 고국으로 돌아온 아이젠하워는 줄곧 그의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워싱턴 장로교회(The Washington Presbyterian Church)`에 나가 예배를 드렸으며, 반드시 왼편에서 여섯째 줄의 중앙 통로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이유는 그는 늘 군복무 관계로 일이 많았으므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26차례에 걸쳐 거처를 옮기면서 살았는데 1952년 공화당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야 게티즈버그에 고정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특별히 1955년 11월 14일 그의 담임 목사인 엘슨(Dr. Elson)목사에게, 추수 감사절 후에 ‘새로운 처소 축복 감사 집회’를 열자고 제의했다. 추수 감사절의 다음날인 11월 25일이 되자, 엘슨 목사 부부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새집의 거실에서 크고 작은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새 집 봉헌 감사 예배를 거행했다. 먼저 아이젠하워는 연설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한편 엘슨 목사가 기도를 인도할 때에, 그의 손자와 손녀들은 아이젠하워와 절친한 사이였던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증정한 향나무로 만든 탁자 곁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된 후 세계 정상들과 만날 때에도 주일을 꼭 지켰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소련의 후르시초프가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할 때에도 주일에는 일정을 비워 두곤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날은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사사로운 일은 하지 않았다.

대통령 재직기간 동안 아이젠하워는 소련의 팽창을 막았으며 공산주의에 의해 정복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매우 과감한 정책을 추진했다. 한편 그는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끝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에게 국군과 미군이 함께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수 많은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을 종결시키겠다는 선거 공약을 지켜야만 했던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그러나 전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피폐해진 한국 경제를 복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美 의회에 국방 예산 절약분을 이용해 한국에 원조 할 수 있도록  우선 2억 달러를 사용케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특별법의 형식으로 의회를 통과했으며 결과적으로 북한과 대치상태인 한국 경제를 최단기간내 6.25 직전의 수준으로 회복시키는데 사용됐다.

1969년 아이젠하워가 월터리드( Walter Reed)육군병원에서 별세하기 며칠 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심방을 와서 30분 동안 대화를 했다. 이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아이젠하워는 조금 더 이야기하며 함께 있기를 원했다고 한다. 목사가 그 이유를 묻자 아이젠하워는 아직 하나님을 만날 확신이 없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목사는 “죄 사함과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그때 아이젠하워는 눈물을 흘리면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으며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며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  1969년 3월 28일 아이젠하워는 기쁜 마음을 간직한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둠으로써 늘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의 ‘거대한 생애’는 막을 내렸다.

김필재 기자/spooner1@  


아이젠하워 재임시 소련 수상이었단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 궤휼사상이니 참조하라!

http://headstone.pe.kr/02_redHorse/evil_thought/peaceful_coexistenc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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