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스룹바벨선교회

이스라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유대인` 이야기

운영자 2004.12.29 15:16 조회 수 : 2339 추천:903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유대인` 이야기
1163년, 개봉에 최초로 유대 사원 건립

유대인들은 지난 2000년 동안의 유랑생활 중 모든 박해를 감수하면서도 단 한번의 좌절을 하지 않았다. 한 때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여러 민족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두 쇠퇴했다. 그러나 유대인만은 여전히 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고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아시아에 정착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이에 本紙는 고대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정착한 ‘중국의 유대인들’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주>

유대인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며 많은 민족과 혼혈되어 국가에 따라 얼굴 모습이나 피부색이 달라졌다. 이 때문에 순수 셈족의 유대인을 골라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현재 전 세계 유대인의 숫자는 약 1,500만~1,8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가변성이 많아 최소 2,300만 명은 되리라 보는 견해도 있다.

1918년 중국을 방문한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토마스 토렌스(Thomas Torrance*사진 左)가 당시 중국 남서부 쓰촨성(四川省)에서 만난 유대계 중국인과 함께 찍은 사진


전문가들은 오늘날의 유대인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눈다. 바로 ‘아쉬케나지’(Ashkenazim)와 ‘세파라딤’(Sepharadim), 그리고 ‘단’(Dan) 지파(支派)의 후손으로 알려진 이디오피아계 ‘팔라샤’(Falasha: BC. 722년경 이디오피아에 정착한 유대인들로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 사이에 태어난 자손들로 알려져 있다.)이다.

현재 아쉬케나지는 미국, 이스라엘, 유럽, 대양주 남아공에 약 1,200만 명(세계 유대 인구의70%차지), 세파라딤은 이스라엘,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 약 450만 명, 팔라샤는 이스라엘, 이디오피아, 예멘 지역을 합쳐 약 2만 명 정도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최근에도 계속 그들이 속한 땅에서 자기들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있다. 실제로 과거 구소련 내에 거주하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고향 땅으로 돌아갔고 지금도 돌아가는 중이다. 돌아가는 유대인 가운데는 동양계 유대인도 상당하다. 실제로 2차대전 이후 아랍과 인도, 인도차이나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갔고 이 가운데에는 중국의 유대인도 끼여 있었다.

유대인, 기원전부터 중국으로 유입


최근 들어 중국은 이스라엘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중국 내 유대인들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시키고 있다. 그 결과 오랫동안 묻혀왔던 초기 중국 유대인에 대한 기록들이 비교적 많이 발굴되고 있다. 현재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중국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유대민족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바빌론 유수*BC 586~536)을 할 때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유대백과사전’(Jewish Encyclopedia)에는 유대인들의 중국 유입 경로를 다양한 경로와 시기로 나누고 있다. 유대 구전(口傳)에 따르면 기원전 206년~221년 중국의 한(漢)나라 시대 처음으로 유대인들이 중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대 유대인 무역상이 히브리어로 쓴 편지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그 밖의 중국 측 사료에서는 유대인들이 인도와 페르시아를 거쳐 1127년 처음으로 중국에 정착한 것으로 씌어있다.  

성경의 이사야서에는 유대 민족이 열국에서 피하여 고토로 돌아올 것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Sinim) 땅에서 오리라."고 되어 있다. (이사야서 49장 10~12절) 현재 성경 연구가들은 이사야서의 ‘시님’을 중국을 지칭하는 것이라는데 일치하고 있다.  

1163년, 개봉에 최초로 유대 사원 건립

1163년 송(宋)나라의 효종(孝宗)황제는 수도를 현재의 개봉(開封*Kaifeng)으로 옮기고 그곳에 정착해 사는 유대인들의 도움을 얻고자 유대사원(Kaifeng Synagogue)의 건립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 해에 공사를 시작하여 약 2년간 사원건립을 계속했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개봉지역의 유대인들은 계속 번창하여 1279년에는 보다 훌륭한 사원재건 하였다. 초기의 사원이 왜 완성을 보지 못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너무 큰 사원을 지우려던 계획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편 유대인의 중국 유입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AD 1230년경으로 수많은 유태인들이 육로를 통해 중국 북경까지 진출했다. 이 시기는 몽고족이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로 역사상 동서양이 처음 만나는 시기였다. 당시 원나라는 유대인들의 뛰어난 장사 능력과 행정, 수리, 재정능력으로 오랫동안 제국의 제정관리 등의 요직을 유대인에게 맡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의 법관이자 학자로서 30년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빈 ‘이븐바투타’(Ibn Batutah, 1304~1368)는 1346년에 숫자가 확실치는 않으나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항주(杭州)에 들어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외몽고 왕조의 실록(實錄)에는 당시 제국내 유대인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몽고사에는 조정의 주요관리 명단에 중국이나 몽고사람이 아닌 수많은 외국인(한문표기)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유대인들이 몽고인 들에 붙어 큰 세력을 형성하자 중국인들의 원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1354년에는 수도에서 큰 폭동이 일어나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교도와 함께 유대인들이 북경에 소집된 기록이 있는데 소집된 장졸만 4만에 가까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유대인들이 1163년 개봉(開封*Kaifeng)에 처음으로 건립한 유대사원의 모습.


원나라 멸망 후, 대륙 곳곳에서 유대인 박해

이 반란은 진압되어 많은 중국인 주모자들과 백성들이 피살되었고 변방으로의 추방과 함께 약 20만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 대륙 곳곳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의 숫자는 격감하였고 일부는 외몽고와 만주로 쫓겨 가기도 했다. 한편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朱元璋*1328~1398)은 몽고족을 비롯한 유대인등 외국인을 내쫓아야 한다는 구호로 중국민족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몽고족의 원나라를 패망시키고 명나라를 건국했다.

이 때부터 유대인들은 중국인들과 혼인하기 시작했으며 살아남기 위해 중국에 동화되었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탄압을 계속해 왔던 명나라도 당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던 유대인 세력을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고 집중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송나라 이후 유대인들이 많이 살던 개봉으로 유대인들을 모으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개봉으로 모여들었다.

1421년 “먼 곳의 이방인들에게 덕을 베풀라”는 명을 내린 영락제(永樂帝 1360∼1424)는 유대인들에게 개봉의 유대인 사원을 송대에 만들어진 것 보다 크게 건축하도록 했다. 유대인들은 그의 명령대로 큰 사원을 건축했으며 황제는 사원에 피울 향료까지 기증했다. 그러나 1461년 중국대륙을 덮친 역사상 최대의 폭우로 인해 건물과 함께 사원에 보관했던 모든 성서들이 없어지는 재앙을 입게 됐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와도 접촉

그 후 1600년대 개봉에는 조그마한 유대 사원이 재 건립됐으며 광동의 유대인들로부터 성서를 사들여 다시 이곳에 안장하게 되었다. 한편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어 수년간 중국에 머물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는 1605년 6월 어느 날 일신교 신자로서 예수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남자를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방문자는 마테오 리치를 유대인으로 생각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당시 대화에 대해 마테오 리치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남자가 말하기를 호남성의 수도 개봉에는 10~12가구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데 유대 사원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다. 사원의 중앙에는 모세의 율법을 중요하게 소장하고 있으며 그의 성전(聖典)은 양피지에 쓴 5개의 두루마리로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양은 1713년 칙령에 의해 예수회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기 때문에 상당기간 중국 내 유대인들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됐다. 이후 중국 내 유대인들은 급속히 중국인들과 동화됐으며 그 수도 해가 가면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유대교의 계율인 할례나 돼지고기 금식 등은 반드시 지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박재선 著*‘세계사의 주역 유태인’)

한편 19세기 들어서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중국의 상해와 홍콩으로 이주해왔다. 특히 중동으로부터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이주해왔으며 세파라딤 계열의 ‘사순’(Sassoons)가문의 경우 상해근방에서만 1,900여 채의 빌딩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1930년대 중국의 상해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들의 천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상해는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여권과 그 밖의 구비 서류가 필요 없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이 때문에 1945년에는 무려 1만5000여명의 피난 유태인이 상해에 거주하기도 했다. 상해의 유대인들은 1851년 황하의 범람으로 인해 파괴된 채로 방치된 개봉의 마지막 유대인 사원에 대한 복구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산적해있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개봉사원의 재건축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 결과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개봉의 유대 사원은 그 명맥이 끊기게 됐다.

1992년 ‘이스라엘-중국 우호 협회’(ICFS) 설립

개봉의 유대인 사원에서 발견된 비석의 모습. 유대 사원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중국 내 유대인들은 중국 대륙에서 완전히 멸망했을까? 모세의 규례와 모양새는 잃어버렸을 지라도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중국계 유대인으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왜 일찍부터 상해와 홍콩이 중국의 경제적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영국이 당시 아무 쓸모없는 버려진 땅이라고 여겨졌던 구룡반도와 홍콩을 그들의 조차(租借)지로서 요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중국의 유대역사를 모르고서는 잘 풀리지 않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광동지방이었다. 당나라 때는 외국인들이 많아 특별한 관리까지 두었던 곳이 광동지방이다. 두 번째로 유대인이 많았던 곳은 양자강 입구의 절강성의 수도인 항주였다. 세 번째는 송나라의 수도였던 개봉이었다. 개봉 등 중국내륙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은 대부분이 중국에 동화되어 멸절됐지만 해안지방에 정착했던 항주와 광동지방의 유대인들은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의 2대 관문인 상해가 광주(Guangzhou)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던가 홍콩이 광동지방의 관문이라는 점은 우연한 것으로 넘기기는 어렵다. 지난 1992년 5월 중국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중국 우호 협회’(Israel-China Friendship Society*ICFS)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양국의 유대인들 사이의 상호교류를 그 설립목적으로 하고 있다. ICFS는 현재 파괴된 중국 내 유대인 유적지 복원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난 2002년 5월에는 단체 설립 10주년 기념행사를 갖기도 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


김필재기자  2004-12-28 오후 5:5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