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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룹바벨선교회

세대주의 종말론의 오류 (3月 30日)

운영자 2005.04.01 22:01 조회 수 : 3013 추천: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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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4장에서 '기독교회'는 휴거되어, 4장 이후에는 교회가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과 4장 이후의 계시가 오로지 '육적 이스라엘'을 위한 계시라는 세대주의 학설에 대한 반론. (3月 30日자 변론)

 


 

 

 

 

 

 

 

 

1) 4장 이후에도 지상에 '기독교회'는 존재한다.

계 22:16절에 '교회들'이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결론 장에서 다시 한 번 '교회들'을 말씀하심으로써, 세대주의자들의 오류를 박살내주고 계신 것입니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이것들'이란 1~22장까지의 묵시 전체를 말씀한 것이고, '교회들'이란 1~3장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피로 산 교회'를 뜻합니다. 즉 계시록 전체를 '이것들'이라 표현하시며 이것들을 '교회들을 위하여' 증거했다 하셨으니 4장 이후의 묵시가 교회와 상관없다는 세대주의의 학설은 "교회를 위하여 증거했노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22:16)과 정면 충돌을 빚게 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증거하셨다고 말씀한 스물 두 장의 '계시들'을 1, 2, 3장의 내용만으로 제한하는 오류를 범코 있는 것입니다.   


 

 

 

 

 

 

 

 

 

 

2) 4장 이후의 기독교는 총 세 부류로 나뉘어진다.


ㄱ) 계 12:11절은 기독교인 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러운 자들로 이루어진 순교노선의 '교회'입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 교회란 건물이나 교파가 아니라, 예수 피로 거듭난 사람의 모임이므로 12:11절의 '여러 형제들'은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ㄴ) 계 12:6,14절은 144,000명에 의해 인도된 '예비처' 교회(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땅에서 대환란이 진행되는 동안 - 전3년반에 순교(계 12:11)의 제물이 되진 못하였으나 대환란에 노출(계 12:17)되지 않고 - '예비처'라는 안전지대로 인도받는 교회(여자)입니다. '이 여자'가 '철장 든 아들'(144,000)을 해산하고 도망가는 모습으로 계시된 것은 144,000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던 촛대교회들의 피신을 뜻한 것입니다(계 7:9~17). 144,000명이 "많은 백성 곧 열국과 여러 백성' 중에서 나온다는 말씀이나(미 5:7~9), 흰 무리가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다는 말씀(계 7:9)은 각 민족의 기독교파에서 추려진 144,000명이 세계적으로 회개하는 무리를 양산해 낸다는 뜻입니다. 이것 하나만 진실로 믿어도 144,000명이 육적 유대인 '한 민족'에게서 나온다는 억지 주장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만 지상에 남아 7년 대환란을 통과하는 것이 맞다면 흰 무리가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나온다는 말씀도 해석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숫자적인 상고를 통해서만 보아도 세대주의자들의 오해는 더욱 분명하게 고발됩니다(큰 3번에서 변론합니다).


ㄷ) 계 12:17절에도 '교회'가 나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 여자의 남은 자손이란 144,000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기독교 백성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지만, 계시록과 예언의 등불을 좇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거듭났어도 12:11절처럼 계시록을 들고 용과 싸우지도 못했고, 12:6,14절과 같이 '대환란'을 피하여 예비처로 도피하지도 못한 성도들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져 놓고도 위 두 부류에 들지 못하고 '후 3년 반'에 빠져 용과 부딪혀야 하기 때문에 '미련한 다섯 처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위 세 부류가 '교회'가 아닌 '육적 이스라엘'이라면 저 세 부류의 인구 총합은 육적 이스라엘 인구 수를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세대주의에서는 4장에서 기독교가 휴거되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불신자와 이스라엘 민족만 남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 주장에 의해 "어린양의 피" 내지 "예수의 증거"를 갖고 있는 저들은 불신자 계통이 아닌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 세 부류를 합한 숫자가 이스라엘 총 인구 수를 초과할 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상고해 봅시다.
 

• 첫째 부류의 수 (144,000) --- 죽기까지 용과 싸워 순교하는 자들(계 12:11).

이들은 순교로 생을 마감하는 '첫째 부활자'이며(왕권), 세 부류 중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 하게 됩니다(한 이레의 절반에 순교). 그 숫자는 144,000명입니다. 이들이 바로 '두 증인'이며(계 11장), 3일 반 죽었다가 공중 재림 때 순교자와 함께 '첫째 부활'에 참예할 변화성도입니다. 42달이 지나면 아마겟돈에서 예수님과 지상에 강림하여 66 악의 세력을 심판할 백마인 것입니다(계 19장). 이들은 이기고 또 이기는 흰말 용사(계 6:2) 144,000명입니다. 


• 둘째 부류의 수 (수억~십수억) --- 계 12:6절과 14절처럼 용의 핍박을 피해 '예비처'로 한때 두때 반때(1260일) 동안 피신하는 자들.

이들은 새 시대(천년왕국)의 백성으로서, 이들의 수(數)를 말할 때 "능히 셀 수가 없다"고 증거돼 있므로(계 7:9) 엄청난 수임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144,000을 여유롭게 계수했고(계 7:3~), 심지어 마병대의 수인 2억(=이만만)까지도 능히 세었습니다(계 9:16). 이것으로 볼 때, "능히 셀 수 없다" 한 '예비처 백성'의 수(數)는 2억을 훨씬 능가하는 엄청 큰 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1~10까지는 능히 셉니다. 그러나 11부터는 쉽게 세지 못합니다. 이러한 생활계시를 참고해 볼 때 2억을 센 천사가 같은 자릿수 3억이나 4억을 못세어 "능히 셀 수 없다"고 말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고로 셀 수 없는 최소한의 자릿수는 많게는 10억대 이상, 적게 잡아도 족히 7~8억은 된다고 보아야 (추론상) 자연스러울 듯합니다. 

그럼 이 셀 수 없이 많은 '흰 무리'는 어디서 나오느냐? 바로 회개하는 기독교 신자들과 양심이 깨끗한 이방종교인들과, 중심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불신자들 세계에서 나옵니다. 144,000의 증인권세 역사를 보고 크게 깨달아 자기의 과거행적을 처분하고 급히 예수를 믿어 중생받는 것입니다(계 7:14). 이들의 수가 그토록 많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에서 크게 된다는 뜻이요(말 1:11), 처음 사랑을 찾지 못하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의미입니다(계 2:5). 처음 사랑에서 떨어져 촛대교회가 되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다음의 부류로 전락하게 됩니다. 


• 셋째 부류의 수 (수억~십수억) --- 앞의 두 부류에 들지 못한 자들, 즉 계 12:17절처럼 용의 핍박(싸움)에 말려 든 성도('후 3년 반'에 떨어진 자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도 지키고 "예수의 증거"도 가진 기독교 성도들이지만 5개월 환란 끝, 즉 '전 3년 반' 끝 날까지 회개치 못하였으므로 순교자 반열에도, '예비처'에도 들어가지 못한 불운한 자들입니다. 바로 '미련한 다섯 처녀'입니다. 현재 신구교 총 신자수는 20억입니다. 여기서 144,000명과 5개월에 회개하는 성도의 숫자(소수)를 제외하면 약 수 억에서 십수억의 성도가 '후 3년 반'으로 넘겨진다는 결론입니다. 이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인 고로 '후 3년 반'에 떨어져도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습니다. 매매를 할 수 있는 표는 경배를 해야 주기 때문에, 경제권도 박탈됩니다. 고로 이들은 경배하지 않다가 짐승(적그리스도)에게 붙들려 죽거나, 짐승을 피해 이리저리 유리방황하다가 굶어죽게 됩니다. 구약 성민이 당한 '예레미야 애가'서의 예언이 바로 이 때(후 3년 반) 이루어질 예언입니다. 


 

 

 

 

 

 

4) 세대주의자들에게 묻는 질문.

육적 이스라엘 영토의 현재 인구는 647만 3000명입니다(2003년 자료). 이중 100만은 아랍인입니다. 해외파 유대인의 분포는 북미에 600만, 구소련에 120만, 프랑스에 70만, 영국에 33만, 아르헨티나에 35만, 뉴욕에만 200만 명이라 합니다. 그러면 현재 지구상에 생존하는 유대인의 총수는 약 1,600만명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10년 뒤에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저들의 인구는 2,000만을 웃돌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4장 이후에 등장하는 성도의 수를 보면 위에서 상고한 바와 같이 예비처 인구만 10억을 뛰어 넘습니다. '후 3년 반'에 빠진 기독교인 숫자까지 합치면 20억은 넘을 것입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여! 4장 이후에 기독교인들이 휴거되고 없다면, '2,000만명'이라는 소수의 이스라엘 인구 수로 어찌 위의 ㄱ), ㄴ), ㄷ)에 나타난 20억 이상의 인구에 관한 예언을 이룰 수가 있단 말입니까?



 

5) 세 부류의 성도(교회)에 대해 세대주의 스스로가 가져 볼 질문들.

세대주의자들은 깊이 묵상해 보고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위 세 부류는 "예수의 증거"를 가진 거듭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4장에서 휴거되지 못한 것인가? / 어떻게 4장 이후에서 <어린 양의 피>를 갖고도 휴거받지 못한 성도가 존재할 수 있는가? / 이들은 중생받은 자가 휴거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 즉시 회개하여 예수를 영접한 자들인가? / 과연 그렇게 급하게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용과 싸워" 순교하는게 가능한가?(계 12:11) / 가능치 않다면 혹 저들은 휴거 전에 중생 받아놓은 휴거 대상자가 확실했으나, 4장 이후에서 전개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이 일부러 휴거대상에서 제외시킨 자들이라 주장할 것인가?

어떤 설정을 하여도 다 석연치 않고 합당치 않은 억지 해석이 될 것입니다. 율법이 은혜로 개혁된 이래로는(히 9:10. 롬 2:28~)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의 몸이 성전이고 그들의 몸이 교회(예루살렘)이므로 기독교의 거듭난 자와 이스라엘의 거듭난 자를 구분한다는 것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주님은 두 개의 잣대로 사물을 판단치 않으십니다. 


 

 

 

 

 

 

6) 사도요한을 '거듭 난 성도'의 예표로 설정한 것이 큰 잘못!

세대주의자들이 속았다는 것은 4:1절의 요한을 휴거받을 교회의 예표로 설정한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말이 옳다면 4장 이후에서는 요한이 교회로 예표된 묵시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계 10:8~11을 보면 요한이 작은 책 계시록을 꿀같이 받아 먹고 배가 쓴 것(핍박)을 당하며,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해야 하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 일을 육적 이스라엘이 행할 것이라는게 세대주의의 주장인데, 그렇다면 요한이라는 동일 인물이 '휴거 받을 교회'와 '지상에 남을 이스라엘'을 동시에 예표했다는 주장이 됩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요한이 계시를 받으며 겪는 모든 일은 종말에 나타날 "다른 천사"의 사명이며, 그것은 곧 '두 증인'의 사명이고, 그 열매가 바로 144,000 명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4:1절의 요한이 기독교를 예표한 인물이면, 계 14장의 144,000도 기독교의 열매여야 합니다. 그래야 전체 묵시가 조직적으로 탄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교회가 주님 오시기 전 휴거되야 된다는 결론을 지어 놓고 계시록을 분해하기 때문에 짜임새 있는 계시록이 난도질을 당하며, 4장 이후의 해석에 억지를 가져 온 것입니다. 첫째로 계 6장의 '흰 말'을 적그리스도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으며, 둘째로 계 7장의 이스라엘 12지파를 육적 유대인으로 해석하는 우맹을 범했습니다. 이 두 가지 실수로 그들은 스스로 마귀의 신학적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선교회의 변론으로 인하여(또한 우리와 같은 해석으로 전도해 주시는 종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세대주의 안에 갇힌 많은 종과 양떼들이 바른 다림줄의 진리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7)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여! 수로보니게 여인을 본받으십시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 여자로서 "나(예수)는 너(개=이방)를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하신 그 말씀을 듣고도 "개도 주인집 자녀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얘기하여 주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세대주의는 예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서 "읽고 듣고 지키라"(계 1:3) 하신 주님의 명령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며, "꿀같이 먹고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라 하리라"(계 10:8~11) 하신 예언적 명령을 가감하는 것입니까?

내 것이 아니어도 달라고 졸라야 할 판에, 내게 준 축복을 발로 찬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내게 온 편지를 남에게 준 편지로 착각하고 교만에 취해 동무 종들을 때리고 외식하는 못되고 게으른 종들! 바로 세대주의 신학자와 그 가르침을 좇는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인 것입니다.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기독인들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크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8) "이리로 올라오라"에 대한 올바른 해석

4장의 천국 보좌는 "장차 될 일"을 보여 주시려고 불러 올리신 공간일 뿐입니다. 진짜로 장차 될 일에 대한 계시는 6장의 '일곱 인'으로부터 풀려져 나옵니다. 그런데 세대주의에서는 6장부터 전개될 "장차 될 일"을 보이시기 위해 요한을 불러 올리신 사건, 즉 "이리로 올라오라" 하신 말씀을 종말의 '휴거' 사건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순복음 조용기 목사님도 이러한 해석을 취하시더군요. "이리로 올라오라"가 종말에 일어날 교회의 휴거사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부터 변론해 보겠습니다.

"장차 될 일이 왜 6장부터냐?" 묻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3장도 장차 될 일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장차 될 일은 6장부터가 맞습니다. 1~3장은 실제로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존재했던 형편입니다. 그에 맞게 성령께서 편지를 쓰도록 지시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종말에 와서 확장된 기독교 현실에 영계적으로 부합되도록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고로 1~3장은 2중적 계시입니다). 그러나 6장부터는 아직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실질적인 미래 사건입니다. 1~3장과는 다르죠. 1~3장은 그당시 7교회의 영적 상황을 책망, 또는 칭찬하시면서 미래 기독교 각 교파의 형편을 축약해 놓으신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만이 쓰실 수 있는 모략과 경륜의 기법입니다. 즉, 1~3장은 "이제 있는 일"에 해당하고(1:19), 6장 이후는 "장차 될 일"(1:19)과 "이후에 마땅히 될 일"(4:1)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4장과 5장은 "네 본 것"에 불과합니다. 결코 미래의 어떤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는 세대주의자들을 속였습니다. "네 본 것"(1:19)을 "미래 사건에 대한 계시"로 오해케 만든 것입니다.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보이리라" 하심은 6장부터 보여주겠다는 것이죠. 요한은 다만 보여주시는 장소인 천국 교회와, 어린양이 봉인된 심판책을 넘겨 받아 그 인을 떼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4~5장에 나누어 "본 대로" 기록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4~5장은 절대 "장차 될 일"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어떻습니까? 4:1절의 "이리로 올라오라"를 종말의 휴거 사건을 예언한 구절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고 있습니다. 속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은 종말의 기독교(중생받은 무리)를 예표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작은 책을 받아 먹고 "다시 예언할 자"를 예표하며, 지팡이 같은 갈대를 들고 성전을 척량할 "두 증인"을 예표하며,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싸울 "144,000"을 예표합니다. 절대로 거듭난 기독성도 전체를 예표하지 않습니다.


 

 

 

 

 

 

9) 계시록과 다니엘서는 결코 유대인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다니엘서는 결코 유대인만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해석을 올곧게 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다니엘서는 유대민족만을 위한 계시라고 주장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니엘서의 "한 이레"(9:27)와 "일곱 때"(4:16,25,32)는 계시록에 나타난 "1260일+42달"과 같은 뜻이고, 다니엘서의 "한때 두때 반때"(7:25)는 계시록의 "한때 두때 반때"(12:14)와 같습니다.

다니엘서의 "작은 뿔"(7:8,11)은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에 속한 여덟째 왕"(17:11)을 뜻하며, 다니엘서의 "네 짐승"(7:1~8)은 곧 계시록의 "네 천사"입니다(7:1~2, 9:14~15). 계시록은 기독교를 위한, 다니엘서는 유대인을 위한 책이 아닌 증거들입니다. 두 책 다 공통적인 묵시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다 민족 중 다니엘 한 사람이 9장에서 "70년 회복"(9:2)의 비밀을 깨닫고 유대민족을 위해 중보기도 하였듯이, 기독교 종말에도 다니엘과 같은 한 사람이 나타나 영적 유다 한국의 "70년 회복"(슥 1:12)의 비밀을 깨닫고 대한민국부터 진리로 해방시킬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과 다니엘서의 관계를 말하다 난데없이 스가랴서를 언급하는 이유는 스가랴서의 '먹줄'(1:16)과 '척량줄'(2:1)과 '다림줄'(4:10)이 바로 계시록의 '지팡이 같은 갈대로 척량하는 역사'(11:1~2)와 동일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가랴서의 먹줄(1:16)은 에스겔이 받은 이마에 먹칠하는 묵시(9:2~4)와 같은 것이며, 이것은 곧 사도요한이 본 이마에 인치는 사건과 본질적으로 같게 되기 때문에(계 7:2~8 / 물론 먹칠과 인침은 선후의 차이가 있음), 성경 전체를 꿰뚫는 사명이 없고서는 다니엘서가 어떤 책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유대민족만을 위한 성경으로 본다는 것은 조직적으로 짜여저 있는 예언서들간의 긴밀성을 파괴하는 발언이 되므로 주님께 범죄하는 행위가 됩니다. 4대 대선지와 12소선지에 나타난 모든 묵시는 유기적으로 묶여 있으므로 어느 한 책만을 독립적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① 한 이레 ② 일곱 때 ③ 전3년반, 후3년반 ④ 작은 뿔 ⑤ 8째 왕 ⑥ 네 짐승 ⑦ 네 천사 ⑧ 먹줄, 척량줄, 다림줄, 지팡이 같은 갈대 등의 묵시는 인간 종말에 전 세계 인류가 맞딱드려 통과하게 될 적그리스도 문제와 핵무장을 갖춘 4대강국, 7년간의 환란기간, 환란을 이길 진리 등에 대한 묵시가 아닙니까? 계시록과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다니엘서를 구약 유대민족만을 위한 책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모순이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기독교인을 위한 책입니다. 물론 유대인에게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유대인만을 위한 책이라고 믿고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계시록도 기독인이 아닌 이스라엘을 위한 책이다", "다니엘서도 기독인이 아닌 이스라엘을 위한 책이다" 말하는 세대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말려 죽이려는 사탄의 말을 대변하고 있을 뿐입니다. 


 

 

 

 

 

 

10) 칠십 주(70이레) 예언 역시 유대인만이 아닌, 기독교를 위한 묵시이다

질의하신 70주에 대한 해석은 490년에 관한 묵시입니다. 7년이 7번 되는 49년을 지나 50년째가 되면 희년이 찾아와 그간 범죄하거나 사기당하여 빼앗겼던 모든 토지, 사정이 쪼들려 팔았던 토지가 원주인에게로 돌려지게 됩니다(레 25장). 이와 똑같은 원리로 스케일을 확대하면 아담, 하와가 뱀에게 빼앗겼던 에덴의 지상축복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찾아 주시는 해가 바로 490년이 지나 500년째에 이르러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이 묵시가 어찌 육적 유대인만을 위한 묵시이겠습니까? 전 지구상의 문제이고, 전 그리스도인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도 낙원에서 이 대희년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483년째에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아 끊겨지고, 여기에 종말의 '한 이레'(전3년반+후3년반)를 더하면 지상에 아마겟돈이 치러져 붉은 용과 함께 모든 악의 세력이 소탕되므로 490년이 성취되고 善만 남아 천년안식세계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사 7:15). 그런데 49일이 아니라 50일째가 희년이었던 것처럼, 490년이 되었다고 곧바로 새 시대가 아니라, 정비기간 10년을 더하여 500년이 되어야 새시대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마겟돈에서 죽은 시체를 장사하는 기간으로 7달이 계시되었고(겔 39:14), 전쟁에 쓰인 모든 무기덩어리와 그 잔해를 해체하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7년이 계시돼 있습니다(겔 39:9).

이것은 7년 7개월일 수도 있고, 7개월이 7년 속에 포함돼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일이 선행되어야 천년간 백성들이 살 집이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남은 약 3년의 기간은 조립식 주택이나 천년왕국에 필요한 기본적인 구조물들이 건설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흰무리들의 주거물 해결을 위하여 건축 기술자들을 많이 회개시켜 예비처에 들여 보내실 것입니다. 

70 주에 관한 묵시는 유대민족 하나만을 위한 작은 묵시가 아니라, 전 지구가 회복되는 중대한 묵시입니다. 새 천년 회복에 관한 묵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144,000과 순교자에게는 자기가 다스릴 고을이 할당되는 시기이며, 각 나라에서부터 예비처로 들어간 수많은 무리들에게는 자기가 살 새로운 보금자리가 결정되는 시기입니다. 이 세계적이고 거대한 중대사를 유대민족을 위한 묵시로 해석한다는 것에는 큰 모순이 있습니다.
 


계시록이라는 작은 책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천년왕국이라는 '땅'을 차지하라고 주신 책입니다. 계시록은 천국 가라는 4복음서와는 다릅니다. 4복음으로 거듭나 자녀권세 받은 자들에게 저주가 물러간 새 땅에 들어가 당당히 자녀노릇 하라는 겁니다. 에덴동산 때와 같은 영육간의 기쁨(안식)을 만끽하라는 소식이 담긴 완전구원의 책이 바로 자랑스런 <요한계시록>입니다. 아멘...

2005년 3월 30일 <스룹바벨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