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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史 발굴 1] 이승만은 하와이에 亡命하기 위해 간것이 아니다. 

연재① 조국은 그를 매정하게 버렸다

李東昱(前월간조선 기자)

제1부 망명 전야

취재 도중에 필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亡命(망명)’이란 단어였다.

우선 李박사의 生(생)이 마감된 마지막 하와이 생활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망명’이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국어사전의 정의에 의하면‘망명’이란 亡袂走(망명도주)의 준말로써‘정치적인 이유로 해서 제 나라에 있지 못하고 남의 나라로 피하는 일’이다. 물론 自動詞(자동사)에 속한다.

그런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梨花莊(이화장)엔 그의 전 재산과 모든 자료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亡袂走한 정치인의 뒷 자리로 보기에는 너무나 온전하다. 게다가 李박사의 하와이 생활은 항상 고국을 그리워했던 首丘初心(수구초심) 그 자체였다. 自意(자의)로 떠난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또한 하와이 체류 중 李承晩 박사의 입에서 ‘망명’이란 단어가 나왔다는 기록 역시 전무하다. 필자가 직접 확인한 당시 증인들에게서도 공통적인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하와이에 도착해서 李박사가 처음 한말도 “2~3주 쉬다 갈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5년 2개월간 하와이에 머물렀던 李박사의 望鄕(망향)은 망명자로서 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강제로 유폐된 심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李박사는 자신이 ‘망명객’이란 생각을 눈을 감을 때까지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망명설은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 당시 李承晩 박사의 망명길을 지켜 본 禹石根씨(우석근·경호원으로 근무. 이후 건축업)의 중앙일보 1986년 3월8일자 證言(증언)을 참조해 본다.

“한달 후에 올테니 집 잘 보게”

아침 7시 정각에 李박사는 예전과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산책을 좀 하시는 게 어떠냐고 하니 그동안 많이 했으니 됐다면서 “시간이 급하니 김포 공항으로 가세”하신다.

직원들이 모두 梨花莊 잔디밭에 도열해 있다고 하자, 그는 계단을 내려오며 “늦어도 한두 달 후면 돌아 올테니 집 잘 봐주게”하신다. 또 돌다리를 건너며 “내가 잠깐 떠나야만 국내가 조용해져”하신다.

차를 타고 梨花莊 문을 나서니 이미 신문사 차가 와 있었다. 김포지역에 들어서자마자 號外(호외)를 뿌리기 시작했다. ‘李박사 망명’호외였다.

 

“李박사님은 당시에 정치를 그만 둔 입장에서 말씀을 삼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주위에서 휴양삼아 하와이로 잠깐 가시도록 권고했고, 국내 정세도 계속해서 시끄러웠잖습니까? 프란체스카 女史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기자들이 자꾸 질문을 하니까 당신의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전부였을 겁니다.”

-당시 이런 상황을 기록해 둔 그 분들의 자료가 있습니까.

“상황 기록이라기보다는 회고록이라 해야 하겠지요. 프란체스카 女史의 ‘대통령의 건강’이란 책에 이 부분이 실려 있습니다.”

프란체스카 女史의 기록

필자가 구해 본 프란체스카 女史의 자전적인 책 ‘대통령의 건강’에 실려있는 하와이로 떠나는 날의 묘사는 확실히 경호원들이나 기자들이 본 것과 달랐다. 우선 그 부분을 발췌해보자.

<(대통령 직을 물러난 이후)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다.

梨花莊에서 대통령의 일상생활은 별 불편이 없었지만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한두 주일 쉬고 오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몹시 큰 타격을 받았던 노인의 건강을 위해서는 전지요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사의 제의가 있었다. 지금 여기서는 그 당시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5월24일 하와이 동지회장 崔伯烈(최백렬)씨로부터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휴양을 하실 수 있도록 체류비와 여비 일체를 부담해 드릴 테니 하와이를 다녀가시도록 하라는 내용의 초청 전보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2주일 내지 한 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

5월29일 상오 7시 우리는 梨花莊을 출발했는데 떠나기 앞서 대통령은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 달 후에 돌아올 테니 집을 봐줘”하고 부탁했다.

 

며느리 曺惠子씨에게 들려준 시어머니의 이야기

 

필자는 梨花莊을 몇 차례 오가면서 李仁秀 교수의 부인 曺惠子(조혜자)씨로부터 당시 상황에 관계된 시어머니 프란체스카 女史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괄목할 만한 이야기는 1986년에 실린 경호원 우석근씨의 증언과 관계된다. 우씨의 증언은 거두절미되어 실린 것이고 사실은 “아이젠하워가 올 때 내가 있으면 국내가 시끄러워져”라는 말이 빠진 것이라고 했다. 그 말 뒤에 이어서 “잠깐 다녀오겠다”고 했음은 프란체스카 女史가 며느리에게 단단히 일러 준 대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李박사는 아이젠하워의 訪韓(방한)을 피할 겸 휴양도 할 겸 하와이로 떠난 것이 된다. 망명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와이에 도착한 뒤 한 달 간의 생활을 회고한 프란체스카 女史의 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대목이 나온다.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독립운동 당시의 옛 동지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 대통령은 한결 즐거운 듯하였고 건강도 좋아지는 듯싶었다... (중략)...우리가 예정했던 하와이 체류가 한 달이 지나자 대통령은 한국에 돌아올 생각으로 崔佰烈씨 등 우리를 초청해 준 인사들과 상의를 했으나 모두가 아직은 요양을 더 하시도록 만류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3주가 지난 뒤에도 李박사의 귀국이 거부된 것은 당시 許政 정부가 거부했기 때문입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許政씨는 하와이 기독학원을 李박사가 운영하고 계셨을 때 선생으로 와 있었어요.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는데 그럴 수가 있을까요. 당시 여론 때문에 못들어가신 걸로 압니다.”

-그렇다면 李박사가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그 분이 살아생전에 귀국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있었습니까.

“아무도 몰랐지요. 우리도 그 후에 무척 노력했지만 허사였어요.”

-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어려웠으니까 그랬을 거라고 봐요. 여론도 그렇고...”

-하와이 계실 때 국가로부터 전직 대통령에 관한 예우 차원에서 돈이 지급되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지요. 그저 여기서 교포들이 조금씩 모은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셨어요.”

필자는 首班(수반)이었던 許政씨의 회고록‘내일을 위한 증언’을 살펴보았다. 다소 대화의 내용엔 차이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곧 돌아오겠소”였다. 당시 李박사의 하와이行에 관련된 모든 진행은 ‘휴양을 목적에 둔 外遊(외유)’에 초점이 맞춰져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언론과 정치권(민주당과 군사정부)이 창조한 ‘단어’로 말미암아 ‘망명’이 기정사실로 되어갔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부부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追放(추방)이나 幽閉(유폐)된 것은 아니었을까? 망명은 스스로 몸을 피하는 自動詞이고 追放과 幽閉는 他動詞(타동사)에 속한다. 그에 의해 建國(건국)된 祖國(조국)이 그를 매정하게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시각을 견지하면서 필자는 李承晩 박사의 하와이 생활을 재구성해 보았다.

제2부 孤島 하와이

호놀룰루 비행장, 대통령의 예우를 갖춘 환영

李박사 부부를 태운 전세기가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1960년 5월29일

오후 2시 30분. 공항에는 ‘하와이 한인 동지회’교포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하와이 총영사인 吳重政씨가 대표로 나갔다.

그 당시 李承晩 박사는 공식적으로 대통령이 아니어서 미국측과 의전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총영사 吳重政씨가 비공식적으로 미국측에 대통령의 예우를 간청했고, 미국측은 쉽게 응락해 주어 세관검색을 생략했다. 고국을 떠날 때 샅샅이 검색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내외를 환영하는 교민들

吳총영사는 美 육군과 태평양 사령부 당국을 통해 李박사 부부에 대한 警備(경비)문제를 의논했다. 그 결과 당시 한국에 파견된 해병대 부사령관 매기 중장을 경호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모든 것이 비공식 채널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서 하와이 교민측은 北韓(북한)의 암살공작에 대한 우려를 심각하게 제기했고, 미국측은 이 때문에 공항 옥상에 기관포를 거치시키기도 했다.

내·외신 기자 100여 명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간 총영사 吳重政씨가 맨 처음 본 광경은 텅 빈 기내의 맨 가운데 줄 좌석에 노 부부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吳重政씨가 인사를 드렸더니 반가워하면서 “내가 여기 좀 쉬러 왔어, 한 3주일 쉬고 갈 거야, 吳영사”라고 했다.

경호 관계자들은 트랩에서부터 출구까지 李박사 부부의 통로를 만들면서 환영인파와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안전선을 그어 놓았다.

그런데 트랩에서 내린 李박사는 “이게 무슨 말이야, 내 동포에게 내가 못 간다니”하면서 그냥 군중 속으로 파묻혀버렸다. 당시 미군 사령관과 총영사 吳重政씨 등 경호를 책임진 사람들은 이 때문에 아연실색하며 식은 땀을 흘렸다.

하와이에 도착한 날 당시 한국에서 만들어 낸 뉴스는 李박사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전해주고 있었다.

李박사가 하와이에 도착한 1960년 5월29일자 하와이 애드버타이저 紙(지)는 李承晩박사가 호놀룰루로 망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한국의 김용갑 재무부 차관이 李承晩 박사가 집권 12년 동안 1990만 달러를 유용했다는 내용으로 李承晩 박사를 기소했다는 사실를 보도하고 있었다. 모두 한국의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이었다.

애드버타이저 5월30일자 신문에는 당시 85세의 고령이었던 李박사가 한국 정부에서 주장하는 유용설과 망명설을 전면 부정하며 “난 단지 쉬러 왔을 뿐”이라고 주장한 내용이 실려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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