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스룹바벨선교회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바울 2002.12.17 09:00 조회 수 : 1843 추천:308

link  
내일 일은 난 몰라요- Ira Stanphill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예수 팔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붙드사 평탄한길 주옵소서

좁은 이길 진리의 길 주님가신 그 옛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성령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줍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말게 하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주신 소명 이루소서

만왕의 왕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만백성을 구속하니 참구주가 되시네
순교자의 본을받아 나의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따라 이 복음을 전하세
불과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가는 그날까지 주여 지켜주옵소서

며칠 전 아침, H형제가 허겁지겁 들렀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J형제 형님 일?" "아뇨! 전혀!" H형제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잘 아는 J형제의 형이 제대를 불과 며칠 앞두고 갑자기 심장 쇼크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날 12시에 발인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사고도 없이 그 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보다도 며칠 전, K자매가 울먹이며 금방 대전을 다녀오는 길인데 다가오는 주일부터 교회 나가시 겠다던, 친구의 아버지께서 역시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소천하셔서 지금 장례식을 급히 다녀오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셋째 삼촌께서도 그렇게 급작스럽게 우리곁을 더나셨고, 저의 숙모님 한 분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훌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두분 다 아직 젊으신 때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일"을 장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내일의 약속을 100%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한 자매님이 도서원을 개원했는데 제가 미처 방문을 못한 탓에 자매가 몹시 서운해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킨 김에 당장 한 번 다녀와야겠다고 밤늦은 통화를 통해 "지금은 너무늦어 곤란하지만 내일 목요찬양집회 가기전 꼭 들리겠습니다."라고 답했더니 자매가 "간사님, 내일이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우린 내일을 알 수 없잖아요. 그리고... 내일은 저희 도서원이 문을 닫는 날이예요"라고 했습니다.

이미 너무 많이 늦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계명대학교 건축과 교수님이신 K장로님께서 한달 일정으로 "유럽 건축답사여행"을 떠나셨는데 사모님께서 저를 붙잡고 "세상에...저희 장로님이 이번에 가시면서 유언장 다 써 놓으시고 깨끗이 정리 다 해놓고 떠나신 거 있죠? 혹 하나님 뜻이면 우리가 이 땅에서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K장로님의 삶의 자세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염세주의자나 절망주의자(?)의 자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사고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 하루를 살 뿐입니다. 오늘 이 하루 한순간을 살아가는 이는 바로 이 순 간, 이 하루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들은 원한과 분노를 내일까지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늘 이 하루를 빈둥거리며 소홀히 보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살아 가는 사람들은 결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허락된 생애 전체는 다른 이들의 애보다 훨씬 값지고 가치있는 것들로 충만케 됩니다. 그들은 화해와 용서의 기회를 내일로 미룰 수 없 기 때문에 오늘로 생애를 마감한다 하여도 그들의 영혼은 평안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루를 사는 이들은 그들에게 하루가 더 주어질 때마다 감격해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그들에겐 축복이요 은총인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루를 사는 이들은 다른 이들도 언제 그의 곁을 떠날지 알 수 없는 존재임을 늘 인식하 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습니다. 제가 대학 4학년때 K형제(대학 2학년), S간사님(C. C.C)을 잇달아 잃고 장례를 치루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생전에 그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들을 용서받지 못한 채 그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것에 대해 얼마나 원통해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두고두고 아픔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가까운 사람들(가족, 친구, 이웃)도 사실은 언제 우리곁을 떠나갈 지 알 수 없는 지체들입니다. 평균수명 정도는 다 누리리라고 기대하는 것 조차도 어쩌면 우리의 과욕일 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것 주위에서 우리곁을 떠난 분들이 6,70세 이상 되셔서 돌아가신 분에 비해 3,40 혹은 10대, 50대에 먼저 떠난 이들이 4배나 많았음을 기억합니다. 아무도 우리 서로의 장래에 대해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생존해 있을 때 서로가 사랑의 관게를 맺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로 오늘 말입니다. 천국에서의 참으로 반갑고 기쁜 재회를 준비하는 마지막 기회는 사실상 오늘 뿐입니다.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천국 백성이 되는 기회도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지만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브리서 9:27)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그 분을 영접하는 일은 우리 인생의 최대 과제입니다. 이웃과 제대 로 화해하지 못하고 피차 세상을 떠나는 것도 비참한 일이지만, 창조주이시자 심파자이신 하나님과 원수맺은 채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인생 최대의 비극입니다.

"여러분은...이 세상에서 희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 던 여러분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은...십 자가로(여러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에베소서 2:12∼1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원수맺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해 중재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따뜻이 기꺼이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오늘 그 화해자이신 주님을 우리 인생에 모셔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그분을 인정치 않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맺는 것이며(그것이 바로 죄이며) 그것의 결과는 완전히 절망적인 것입니다. 바로 영원한 멸망입니다.(로마서 6:23) 이것은 재미로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언이요 약속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심각하게 점검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과제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Ira Stanpill의 이 찬송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깨달음과 자기점검을 제공하는 훌륭한 고백찬송입니다. 그것은 "체념"이나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오늘 하루하루 순간을 우리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성실히 살아야 하는지를 권면해 주는 믿음의 설교입니다.

오늘밤 우리가 이 땅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은 재수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식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이 하루를 살기로 다짐하는 결의로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16-21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굳이 말씀하셔야 했던 주님...! 그 주님을 생각하며, 그 주님과 함께 살게 될 새 나라를 그리며 오늘 이 밤도 잠자리에 듭니다. 이땅에서의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채! 샬롬! 형제들이여 자매들이여!†

출처: "월간쪽지" hae-dal.com/old/199104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