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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사태 5.18 총상에 대하여

운영자 2008.11.10 21:42 조회 수 : 2912 추천: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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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의 계엄사 자료

M1, AR, 카빈소총은 무기고에 있는 것들로 난동자들만이 가지고 있었다. 총상에 의한 사망자 117명 가운데 80%에 해당하는 88명은 난동자들의 오발, 민가에 들어가 가족단위로 학살, 강온 양파간의 대립으로 인한 총격, 군을 모략하기 위한 학살 등으로 구성돼 있다.

타박상 사망자 18명은 탈취한 차량을 몰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고, 수류탄 파편상 12명은 난동자들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수류탄에 의한 것이었다. 계엄군은 수류탄을 소지하지 않았다. 11명의 자상은 계엄군을 모략하여 적개심을 일으키기 위해 잔인하게 저지른 것이었고, 화상에 의한 4명의 사망자는 난동자들이 지른 불에 타죽은 것으로 파악됐다.

계엄사는 이러한 사인을 의사, 변호사, 군수사기관, 시민대표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에 의거 소상히 규명하여 유가족들로 하여금 확인토록 공시함으로써 136명의 사망자 유족들은 위 사실을 시인하고 인수해 갔으나 26명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공원묘지에 가매장했다.    

                                                                1995년 검찰조사 결과

1995년 검찰 조사결과는 민간사망자 166명 중 165명에 대해 사인을 분류했다. 165명중 총상은 80%에 해당하는 131명, 자상 4, 타박사 18, 차량사 12로 단순화됐다. 총상 131명 중 74%가 M-16 총상, 나머지 26%에 해당하는 35명이 카빈총상(26명) 및 기타총상(9명)으로 분류돼 있다. 기타총들은 M1, AR, 기관총 등 시민군이 소유한 것이고 계엄군에게는 오직 M-16만 있었다. 광주에서 35명이 시민군 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5월21일, 가장 치열했던 두 격전장

광주사태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5월21일, 계엄군은 시민들을 행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많아 발생했는데 그 무차별 발포에는 반드시 발포 명령자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5.18측 주장이다. 그러나 검찰수사결과를 보면 5월21일의 총 사망자수는 61명, 이중 14명은 차량사고사, 자상, 타박상으로 인한 사망이고, M-16 사망자 32명, 카빈총 사망자 16명, 기타 총상 1명으로 구성돼 있다.

전투가 가장 차열했던 5월21일, M-16 사망자는 32명, 무기고에서 나온 무기에 의한 총상은 17명, 즉 66:34인 것이다. 파악된 것만 해도 이때까지 계엄군은 시위대에 7정의 M-16을 피탈당했고, 여기에 추가하여 전교조 초대위원장이었던 윤영규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7권 69-95쪽에 게재한 “살육의 낮과 밤"이라는 글에서 밝힌 36인 무장조가 보유한 36정의 M-16이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월21일 13시경까지 시민군이 확보한 총은 카빈 26정, M-16은 43정이다. 5월20일 23시경 광주 세무서를 방화할 때 지하실 무기고에서 17정의 카빈이 탈취됐고, 5월20일 13시경 광산 화남 파출소에서 9정의 카빈이 탈취됐다. 카빈보다 M-16 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5월21일 발생한 M-16 에 의한 사망자 32명은 무두가 다 계엄군의 총에 의해 사망한 것일까? 그 32명은 계엄군이 소지한 M-16과 시민군이 소지한 43정의 M-16이 공동으로 발생시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26정의 카빈으로 16명을 쏘았다면 43정의 M-16으로는 몇 명을 쏘았을까?

계엄사 발표에는 12명의 수류탄 파편사가 있다고 했지만 검찰 조사에는 그것이 없다.

                                                         화려한 휴가의 허구-과장

5월21일의 전투는 두 곳에서 발생했다. 전남대 전투와 도청 앞 전투다. 필자가 검찰 자료를 가지고 파악한 바에 의하면 전남대 전투가 도청 앞 전투보다 더욱 격렬했다. 5월20일 밤 3공수 5개 대대는 광주역 앞에서 수만 군중들에 포위되어 기관총, 소총 등을 격렬하게 공중으로 발사하면서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전남대 숙영지로 복귀했다. 그 시각부터 5월21일 오후 5시 전남대에서 쫓겨 퇴각하는 순간까지 3공수는 전남대 교정에서 5-6만의 극렬시위대로부터 차량 및 화염병에 의한 극렬한 공격을 받았고, 소총 사격도 받았다. 전남도청의 전투는 13시 경부터 순식간에 발생한 차량공격 대 위협사격 간의 한판 승부였지만 전남대에서는 참으로 피를 말리는 끈질긴 전투가 20-21일에 걸친 밤새내, 그리고 21일 낮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런데도 저들은 초점을 흐리지 않기 위해 도청 앞 발포만 문제 삼아왔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사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화려한 휴가를 보면 5월21일 도청 앞, 계엄군은 애국가를 막 끝낸 시위대들과 거리를 빼곡이 메워 도망갈 공간도 없는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한동안 했다. 그런 식의 발포였다면 수백 수천은 죽었을 것이라는 게 영화 관람자들의 직감일 것이다.

그러나 5월21일 M-16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32명. 이들이 사망한 장소도 도청 앞(6명), 전남대 부근(8명), 무등극장, 광주경찰서, 금남로, 광천주조장, 광주기독병원, 대인동중앙예식장, 자택, 중흥동 주거지, 광주교도소(4명), 송암동, 광주여고, 나주, 수미다방, 한일은행, 제일은행, 동구청 앞들이고, 나머지는 사망 장소가 불상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5월21일의 격전지였던 전남대 부근에서 사망한 사람은 겨우 8명, 도청 앞에서 사망한 사람은 그보다 적은 6명뿐이다. 결론적으로 화려한 휴가는 도창 앞에서 사망한 6명을 놓고 수백-수천이 죽은 것으로 과장한 것이다.    

                                                 매우 이상한 점: 해석을 부탁함

그런데 매우 희한한 사항들이 있다. 5월21일, 교도소 근방에서 죽은 4명은 카빈사 2명, 타박상 1명, 자상 1명이다. 계엄군이 죽인 것이 아닌 것이다.

5월21일, 카빈사를 당한 사람들의 피해장소를 보면 무등극장앞(1), 전남대(3), 광주기독병원(1) 교도소(2) 도청(1) 동구청앞(1)이고 나머지 7명은 피해장소가 불상으로 되어 있다.    

5월21일 M-16사 32명의 피해 장소를 보면 대안동 중앙예식장, 무등극장, 광주경찰서 부근 다방, 금남로, 자택, 중흥동 주거지, 수미다실, 제일은행, 한일은행, 기독병원, 전남대(2), 도청(3), 나머지 17명은 피해 장소 불상으로 되어 있다.  

5월21일의 전투는 오직 전남대와 도청 앞에서 있었고, 도청을 지키던 11공수 및 7공수 그리고 전남대에 있던 3공수는 몰래 또는 공포를 마구 쏘며 외곽으로 도망하기에 바빴다. 그러면 카빈사나 M-16사는 도청과 전남대 부근에 집중 돼 있어야 하지만 카빈으로 맞은 사람이나 M-16으로 맞은 사람이나 대부분 계엄군이 없던 잡다한 다른 지역들에서 사망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느라 쪼그려 앉아있는 여인에게 멀리서 조준 사격하여 사살한 경우도 있었고, 계엄군이 없는 지역의 건물 입구에 서있던 사람이 갑자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피해 장소가 불상인 것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계엄군이 없던 수많은 지역에서 카빈과 M-16소총으로 사망한 사람들은 계엄군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시민군이나 시민군을 가장한 이방인들에 의해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청 앞과 전남대 부근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도 극히 소수이고, 그 두 격전지에서 타박상과 자상 등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극히 소수이다. 대부분이 격전 지역 밖에서 사망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계엄군 소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광주세무서 지하에서 둔부, 가슴, 얼굴이 난자당해 있는 여인, 전기톱으로 잘린 듯 목이 잘린 나체 여인, 두개골이 으깨진 여인들은 계엄군이 살해한 여인들이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10명 1개조로 움직이는 계엄군 병사가 팀을 이탈 하여 이런 참혹한 행위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시 계엄군은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순간순간을 모면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목숨을 부지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떤 집단들이 특히 여인들만 골라 참혹하게 난자한 후 이를 계엄군 소행으로 모략하기 위해 저지른 살해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많은 해석들이 필요할 것이다.  

                                참혹하게 난자된 여인의 시신들은 누가 만들었나?
                                                
5월21일 전교조 초대위원장 윤영규는 이렇게 묘사했다. “광주세무서 지하에서 여학생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젖가슴과 음부가 칼로 난자된 시체였다. 얼굴 등이 칼에 찢겨져 알아볼 수 없어 교복에서 나온 학생증으로 신원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에 그을린 시체도 여러 구가 발견되었다.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공수대들이 있다는 것을 서방지역에 있는 시민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지만 화염방사기의 사용이 사실로 목격된 것이다.”

그런데 검찰의 사인 조사에는 그을린 시체들이 없다. 반면 계엄군은 불에 타죽은 시체가 4명이 있다 했다. 또한 전교조 초대위원장 윤영규가 거짓을 썼을 리 없다. 그을린 시체들은 누가 만든 시체일까? 공수부대에는 화염방사기가 없었다. 이는 검찰도 시인했다. 그을린 시체는 시민군이 지른 불에 타죽은 것이거나 제주 4.3사건에서처럼 북과 연계된 불순분자들이 저지른 소행일 수 있다.

광주세무서 지하에서 보았다는 “젖가슴과 음부가 칼로 난자되고 얼굴이 칼에 찢겨진 시체”는 누가 만든 시체일가? 일지들과 진술들을 종합해 보면 공수부대는 광주세무서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무서 지하에서 음부, 가슴, 얼굴이 칼로 난자된 시체는 누가 만들었는가? 이에 더해 계엄군은 민간 부상자를 보면 즉시 헬리 등으로 후송해 주었다. 상황일지들을 보면 헬기 공수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공수부대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광주에서 나온 다른 사진들 중에는 머리가 갈라지고 으깨진 잔혹한 시체들도 있고, 전기톱에 잘린 듯 목이 잘리고 음부가 드러난 여인의 시체도 있다.

                                        그래도 시위대가 시민에 총 쏜 것은 사실

계엄사의 조사결과와 검찰의 조사결과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총상부분이다. 계엄사는 총상이 117명, 그중 76%에 대당 하는 88명이 시민군에 의한 총상이라 한 반면 검찰은 총상 131명 중 74%에 해당하는 사망자가 M-16 총상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계엄사는 시민군 측에 의해 시민 88명이 사망했다고 한 반면, 검찰은 시민군 측 총에 시민 35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검찰 조사를 인정한다 해도 26%에 해당하는 35명은 시민군의 총에 맞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8명이든 35명이든 모두가 적은 수자가 아니다. 35명이라는 것은 오발로 인한 숫자가 아니라 조직적인 숫자다. 검찰조사와 전교조 초대위원장 윤영규의 진술에 의하면 시민군은 62정의 M-16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62명이 소지한 M-16은 몇 사람의 시민을 쏘았을까?        

      2008.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