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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사태 5.18 검찰조사에 대한 피고소인의 의견

운영자 2009.07.18 01:32 조회 수 : 2823 추천: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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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쓴 목적: 5.18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두 개 있습니다. 두 개의 판단은 정 반대입니다. 노론이 지배하면 노론의 역사가 되고 소론이 지배하면 소론의 역사가 되듯이 5.18에 대한 역사는 시대에 따라 뒤바뀌었습니다. 역사를 바꾼 주체는 학자가 아니라 정치인들과 법관들입니다. 문제의 ‘5.18 머리말’은 제가 쓴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1,720페이지) 머리말의 초안입니다. 저는 5년 동안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의 방대한 양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분석하고 역사를 바로 쓰자는 학문적 동기를 가지고 일생의 역작을 남기겠다는 순수한 의지를 가지고 책을 쓴 것이지, 5.18단체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범의를 가지고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총권 4권을 제출합니다.  

2. 책의 내용: 12.12. 5.18에 대한 수사기록, 두 시대의  사법 판단,  두 시대의 시대상황, 두 시대의 국가정보들을 광범위하게 총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역사 전반을 조명한 책입니다.  

3. 이 고소사건의 핵심쟁점: “수사 자료와 북한 자료들을 종합분석해보니 5.18에 북한이 간여했다는 데 대한 심증이 간다”는 한 구절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역사조명 차원에서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분석해보니 북한 개입의 심증이 간다는 것이지 확정하여 쓴 것이 아닙니다. 북한개입에 대해 5.18단체측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1) 북한 간첩 등이 간여했는지의 여부는 전문가 판단분야이자, 정보당국 및 군당국만이 판단할 수 있는 전문분야이지 광주시민이 판단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는 골수간첩이라는 김남식과 김락중을 여러 차례 만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 다녔지만 그들이 간첩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5.18 당시는 계엄시대였습니다. 계엄군의 정보판단과 법원의 판단에는 북한불순세력이 개입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한 전분가인 이명영 교수의 책, 전남출신으로 북에 가서 거물간첩이 된 김용규씨의 증언, 황장엽 선생의 증언, 탈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의 기자회견, 5.18에 참여했던 이재춘씨와 지역계엄사령관 전남출신 소준열 등의 한결같은 법정 진술은 북한이 깊이 개입돼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에 북한이 개임돼 있다는 정설에서 유독 5.18에서만은 북한 개입이 전혀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2) 북한의 개입과 광주시민의 명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광주시민은 북한의 개입 여부를 조사하고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한 북한을 초청한 것도 아닙니다. 광주시민에게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사항에 대해 어째서 북한의 개입이 광주시민의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3) 북한이 개입했다는 정황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개입이 전혀 없었다는 정황증거는 없으며, 있을 수도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4) 4.19까지도 간첩이 배후조종을 했다는 증언이 두 사람씩이나 있습니다. 10.1대구사태를 배후조종한 간첩 이석(김영명 교수)과 김용규(거물간첩)입니다. 김용규는 그의 저서 “소리 없는 전쟁”에서 남한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시위에는 예외 없이 북한이 개입됐다고 썼습니다. 개입하지 않았다면 남한에는 간첩이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유독 광주에서만은 간첩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5) 저는 아래 여러 가지 사실들을 분석하여 5.18에 북의 개입이 있었다는 심증이 간다고 표현했지 단언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역사책입니다. 5.18측이 여기에 이의가 있으면 공론의 장에서 다투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4. 5.18에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는 심증을 갖게 하는 상당한 이유들

1) 5.18 공로자들 중에는 윤기권, 김대중, 문익환, 서경원 등 20여명이 있습니다. 윤기권은 5.18당시 18세로 5.18에서 가장 혁혁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경찰 15명을 인질로 잡은 것입니다. 이런 공로로 그는 민주화 보상법으로 2억원이라는 높은 보상금을 받고 1991년 3월 월북하여 김일성 수령의 품안에 안겼다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합니다.(전남일보, 광주일보, 월간말) 북한의 공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가 혁혁한 공로를 이룩한 것을 북한이 어찌 알 것이며, 북한이 왜 그를 데려갔을 것을 것이며, 그를 내세워 대대적인 방송을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북한은 아무나 들락거릴 수 없는 곳입니다. 이래도 북한이 5.18에 전혀 간여한 바 없다 할 것인지요?  

2) 이정로(원명 백태웅) 윤상원, 박노해, 김종배 등은 5.18주도 세력이거나 열렬한 옹호자들입니다. 이들의 기록은 한결같이 “5.18은 국가를 전복하고 민중정부를 세우기 위한 무장 봉기”였다고 증언합니다. 5.18 주도세력들이 국가전복이 5.18의 목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왜 이런 일로 조사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마치 공산국가 같군요.  

3) 2006.12.20. 서울 세실레스토랑에서 북한 특수군 장교출신 임천용, 특수군 대위 출신 최준용 등 ‘자유북한군인연합’이 5.18에 특수군 수백명이 축차적으로 파견됐다는 정보를 발표했고, 광주에서 목을 자르고 두개골을 전기톱으로 가르고 나체 여인을 난자한 사진 등을 전시하면서 이는 북한특수군이 한국정부와 공수부대를 군으로부터 이간질시키려고 저지른 북한식 살해방법이라고 증언했습니다.

탈북자들 중에는 19세의 나이로 상관을 모시고 광주에 직접 왔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협박에 못 이겨 기자회견장에 나오기로 해놓고 나오지 않았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대대적으로 기사화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5.18단체측은 2006.12.21. “자유북한군인연합의 터무니없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왜곡에 대한 긴급성명서”라는 제하에 “기자회견 내용의 진위를 철저하게 가리고 불순한 의도에 대해 사법적으로 단죄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취지의 강력한 성명을 냈습니다.

이에 대해 자유북한군인연합은 2007/1/23.에 “5.18관련단체들은 김정일 정권을 광주의 민주화투사로 둔갑시키지 말라”는 제하의 반박문을 내고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증거 5가지에 대해 반박해 보라고 통첩하고 김정일이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을 어째서 5.18단체측이 비호하는가, 법으로 가려보자는 취지의 통고문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그 후 자유북한군인연합 회장 임천용은 여러 차례 5.18단체 측에 법정에서 다퉈보자는 글을 인터넷에 띄웠고 편지도 보냈지만 이상하게도 5.18단체 측은 일체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북한 특수군 출신 임천용의 판정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5.18단체측은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증거가 있다며 “5.18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단정적인 표현으로 확실한 결론을 발표한데 대해서는 일체 소송을 삼가고 있습니다. 같은 주장을 탈북특수군 장교들이 하면 3년이 넘게 침묵해오고, 유독 제가 여러 가지 장황증거들을 가지고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는 심증이 간다는 학술적 판단을 표현한 데 대해서는 고소를 하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5.18단체측은 기껏 임천용 회장의 말을 믿도록 해놓고 그걸 믿는 사람들을 고소합니다. 원인은 임회장의 말을 믿도록 한 5.18단체측의 행동에 있는 것입니다. 5.18단체 측이 임회장을 고소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향한 5.18단체측의 고소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더구나 5.18단체측은 “5.18은 폭동이다” “국가전복을 기도했던 무장폭동이었다”는 이정노(본명 백태웅), 윤상원(5.18 영웅) 박노해(사노맹) 같은 좌경인물들의 표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 유독 "북한개입"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이 개입했다면 이는 국제법을 어긴 북한의 불명예이고, 이를 지키지 못한 계엄군 당국의 불명예일 지언정, 간첩 식별 능력이 없는 광주시민의 불명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7.7사이버테러에 대대 국정원은 북한이 의심된다고 했습니다. 이때 민주당이 조건반사적으로 나서서 북한을 옹호했습니다. 7.7테러에 북한 개입이 의심된다는 정부기관의 발표에 민주당이 조건반사적으로 반발하는 것이 미스터리로 보이듯이 5.18에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는 심증이 간다는 표현에 5.18단체가 발끈하는 것에 대해서도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5.18광주에 북한의 개입이 확실해 보인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재춘: 5.18 시민군에서 열렬히 활동했던 당시 방위군, 그는 수기를 통해 북한방송을 들었다는 사실과 광주에서 발생한 일이 시시각각 생중계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현재 기동타격대 회장이며 암매장발굴 임무를 맡고 있다 합니다.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준열: 전남출신으로 5.18때 전라 지역 계엄분소장(중장), 이재춘의 증언과 동일 취지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중장), 이재춘 증언과 동일취지

김재명: 당시 계엄사령부 작전교육참모부장, 이재춘 증언과 동일취지

5) 북한측 증언자들은 북한군이 5.18에 개입한 것은 북한에서 상식이라 합니다.

황장엽 노동당비서, 최주활 상좌(조선일보), 강명도(저서를 통해. 김정일 집안, 북한 고위급), 임천용 외 탈북자군인연합 다수.

6) 임천용 회장은 30명에 달하는 탈북자들의 증언록을 생생하게 담은 책을 발간할 예정입니다. 탈고가 끝나고 인쇄 직전에  있습니다.

7)  5월21일, 4시간 대에 17개 시군,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것은 간첩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5월21일 아침 9시, 1시간 전인 오전 8시에 20사단으로부터 빼앗은 14대의 지휘차량 등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습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습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닙니다. 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무기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사람들은 오직 간첩이라는 것이 필자의 상식입니다. 시민들이라면 한 두 개의 무기고 위치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에 좌표를 찍어가지고 이러 저리 방황할 시간조차 없는 4시간대에 쏜살같이 17개 시군에 널려 있는 38개의 무기고로 달려간다는 것은 간첩으로 이루어진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불과 4시간 내에 38개 무기고가 피탈되었다는 것은 38개 팀 한팀 한팀 모두가 위치를 정확히 알고 떠났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특히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한 후,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한 자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자들이었습니다. (자료: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91-108쪽)

8) 지휘부 없이 지휘부 있는 것처럼 동시다발적인 작전수행

광주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계엄군이 5.21. 오후 외곽으로 쫓겨나갈 때까지의 4일 전투였습니다. 이때까지 광주사태에는 지휘부가 없었습니다. 시민군이 창설된 것은 5월25일이었습니다. 가장 험한 시위대의 공격은 대형차령을 지그재그로 몰아 계엄군을 깔아 죽이는 공격이었습니다. 이들 운전자들은 술에 취해있었고,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를 죽인다고 해서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당시 공수부대 대대장들의 증언) 수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행된 작전들에 북한 특수요원들의 개입이 없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북한 특수요원들의 개입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가지 사항들을 엮어 보면 통계학적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9) 무기고에서 탈취한 시민군들이 시민들을 사살

5.21은 충돌이 가장 치열했던 날입니다. 이날 전남도청 등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95년7월18일자, 검찰의“5.18관련사건수사결과”105-106쪽에 33명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계엄군은 오직 M-16소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 총상은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 아니라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꺼내온 총들입니다.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70%가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입니다. 계엄군에는 카빈소총이 일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북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0) 신원불상자 12명,

보상금이 매우 높아 시체를 유기하는 사람이 없다 합니다. 그런데 12명의 시체에는 주인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북한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11)시체난자는 모략용입니다. 시민도 군도 그렇게 혐오스럽게 시체를 난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난자된 시체의 사진은 북한에서 방영되었다 합니다.(탈북군인연합회 증언)

12) 유언비어는 광주시민의 작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필이면 유언비어의 주제가 거의 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의 지역감정이겠습니까?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령으로 전라도 사람 70%이상을 죽이러 내려왔다”, “여학생들을 발가벗긴 채 유방을 도래내고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는 등의 끔직한 유언비어들이 광주시에 확산됐고, 이에 분개한 시민들이 대거 거리로 나왔습니다. 탈북자 강명도는 “평양은 망명을 꿈꾸는가”에서  그의 친구가 광주에 내려와 유언비어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말을 들었다고 썼습니다.

13) 일본에서 발행된“찢어진 깃발”에는 공수부대원들이 여자들에 대해 했던 끔찍한 이야기들이 엮여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으로 들어와 1980년대의 대학가에 붉은 대자보로 소개돼 있었습니다. 이를 놓고 북한의 작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4) 5.18 직전 잡힌 간첩만 7건, 5월23일에는 광주로부터 상경하는 간첩 이창룡을 체포했고, 그의 자백으로부터 계엄군은 광주에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15) 북한 김일성은 간첩들에 남한에 전국민봉기(전민봉기)를 유도하라는 지시를 여러 차례 내렸습니다(계엄사, 산케이신문, 동아시아연구소). 그리고 당시 김대중은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 지휘부를 만들어 1980년 5월 22일 전국적 봉기를 일으키겠다고 선언했다가 5월17일 밤에 체포되었습니다.(수시기록)

16) "당시 정보기관에서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북괴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악화일로에 있으니 더욱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다"(육군본부 1982.3. 발간 ‘계엄사’ 157쪽 6-8줄).

17)위 계엄사 114p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1979년10월27일, 전군에 ‘전투태세강화“(폭풍5호)를 지시했고, 10월29일에는 동구를 방문 중인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이 급거 귀환하여 군사 회의를 소집했고, 12월18일에는 군-당 전원확대회의를 개최하면서 전군에 ’통일에 대비한 무장‘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80년2월에는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쟁물자동원훈련을 실시했고, 철도역에 비상열차를 24시간 대기시켰다. 1980년3월에는 남파돼 있는  간첩들에게 남한의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 기폭조”를 시위 군중에 잠입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총련에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하고,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18) 5월 21일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었습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습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습니다.(“5.18관련사건수사결과” 91-117) 교도소 습격은 광주시민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5.18의 최고 공로자 중에는 윤기권, 문익환, 서경원, 김대중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정체는 모두 친북용공입니다. 윤기권은 북으로 넘어갔고, 서경원은 북으로 가서 공작금을 받아왔다는 사실로 9년 이상 감옥살이를 했고, 문익환의 얼굴은 북한의 기념우표에 찍혀 있고, 김대중은 23세때 남노당에 가입하여 정장인 김정일에 국민 몰래 5억 달러의 뒷돈을 대준 인물입니다. 5.18에 북이 관련되지 않았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보시면 북한개입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2009.7.15.  지만원
http://systemclu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