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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핵으로 조국통일 총화할 것”,
 
극비입국한 탈북자 김대호씨 주장
 
김정일정권을 해부한다 ③ 북한 핵개발의 진실

김대호   前 북한 우라늄폐기물 직장 부직장장·당세포 비서

北, “핵으로 조국통일 총화할 것”

한국정부, 북핵관련 정보발설 저지 협박
“김정일이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

1994년 주중대사관을 통해 한국에 망명,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극비리에 인천항으로 입국했던 김대호 씨(45)가 최근 북한의 핵개발 과정과 그 내용을 폭로하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1984년 10월 창설된 황해북도 평산 핵개발부대에 배속된 이후 영변 핵단지내 우라늄 정련공장 기동예술 선전대 작가, 원자력 공업부 우라늄폐기물 직장 부직장장(부사장) 겸 부문당 부비서, 원자력 공업부 학습 강사 겸 당세포 비서, 핵 개발자금(710호)확보를 위한 외화벌이 상무 등을 역임하면서 북한 핵개발 사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1994년 주중대사관을 통해 한국에 망명,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극비리에 인천항으로 입국했던 김대호 씨(45)

그는 망명 이후 북한의 우라늄 생산기지 개발상황 및 작업환경과 핵개발자금 현황 등 핵개발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일반 국민에게 알려지지 못했다. 1994년 이후 10년간 한국정부가 북한 핵개발에 대한 그의 정보공개 노력을 일체 차단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내용요약.

- 어떻게 핵개발 사업에 관여하게 됐나

군복무를 하고 있던 1984년 10월, 김정일이 전방군단 1, 2, 5군단의 훈련된 사관들을 모집해 핵개발부대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차출된 2개 연대에 포함됐다. 황해북도 평산지방에서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하는 일에 참여했다. 한 개 연대는 우라늄 광산을 개발확장했고 또 한 개 연대는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했다. 85년 8월 제대할 때까지 그 일을 했다.

- 처음부터 핵개발 한다는 것을 알았나

처음엔 몰랐다. 평양시 상원군에 독일과 합작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려고 한다고 소문을 냈다. 평양에 간다고 들뜬 마음으로 갔는데 내린 곳이 평양시가 아닌 평산이라는 산간도시였다.

- 제대 후 어떤 일을 했나

민간인 신분으로 영변 핵단지에 배속됐다. 당시 제대한 300여 명 중 200여 명은 핵연료봉 생산공장으로 배치되고 107명은 우라늄 생산공장으로 배치됐는데 나는 107명에 속해 우라늄 폐수처리공장으로 갔다. 나는 우라늄 생산공장내 기동예술선전대에서 작가겸 연출가로 활동했다. 예술행위로써 핵개발에 대한 김일성, 김정일 의도를 선전하는 단체였다.

-어떤 활동을 했나

그 때 했던 작품 중 하나가 ‘핵으로 조국통일의 대문을 열자’라는 작품인데 합창시였다. 당시 김일성이 “북한의 핵개발에서 가장 큰 성과가 우라늄 농축기를 주체화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비밀문서에는 우라늄 농축기를 주체화해야 한다는 교시도 있었다. 나는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과 의도를 선별해 거기에 맞는 작품을 써야 했기 때문에 핵개발에 관한 당 위원 비밀문서를 볼 수 있었다.

김일성 얘기 중에는 “나에게는 세 가지 소원이 있다. 인민생활 향상, 조국통일, 핵개발 완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 김정일은 “수령님 대에 핵개발을 완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의 단호한 결심이다. 우리는 핵개발에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고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지시들을 인용해 작품을 썼다.

- 이후 임무는

1987년 다시 황해북도 평산으로 소환됐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제대를 시켜서 우리를 기능공으로 키운 것이었다. 85년부터 기능공학교, 통신대학을 통해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평산 우라늄 공장이 조업단계에 들어가니까 영변 핵단지에 배치되었던 우리를 옮긴 것이다. 나는 87년 작업반장 겸 부문단 부비서를 겸하다가 89년에 부직장장으로 승진했다. 맡은 일은 우라늄을 추출해내고 남은 폐기물에서 니켈, 라듐 등을 추출해내는 것이었다.

- 당시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나

89년도 초에 김일성과 김정일이 북한 핵개발에서 큰 성과를 이뤘다고 상당히 만족했다. 그때 원자력 공업부 산하에 간부대상 간부강연회가 있는데 그때 “무기급 핵물질 개발에 성공을 해서 위대한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상당히 만족했다. 우리가 큰 기쁨을 드렸다”는 얘기를 했다. 연구사들 얘기로는 무기급 핵물질이 히로시마 핵정도라고 했다.

- 안전시설 등 작업환경은 어땠는가

영변 핵단지에서 핵 연료봉에 의해서 원자로가 처음 가동된 게 86년이다. 87년에 영변 핵단지에서 핵실험을 하다가 맹독성 가스와 방사선에 의해 노출된 사고가 발생해 사람들이 평양시 고위관료를 치료하는 남산진료소로 실려간 일이 있었다. 그들은 다 식물인간이 됐다. 원자로를 가동하면서 재처리 실험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방사능 오염이라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라늄 탱크 속에 맨몸으로 들어가서 몸을 담그고 작업을 하기도 했다. 우라늄 액이 공장 구내로 시내가 돼 흘러나오기도 하고 건조해서 마르면 먼지로 떠다닌다. 우라늄액이 강물로 흘러 들어가서 물고기를 오염시키기도 한다. 처음에 접할 때는 모두들 경계를 하다가도 오래 지속되면 만성화된다. 더욱이 90년대부터는 굶주리기까지 하니까 환경이 더 나빠졌다. 생산도 제대로 못하지, 영양도 공급이 안 되지.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는 우라늄 설비 시설을 뜯어다가 강냉이를 바꿔먹고 돼지를 바꿔먹고 하는 일도 일어났다.

- 핵개발 자금은 어떻게 조달됐나

북한에는 ‘710호’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핵개발 자금이다. 그런데 92년에 들어오면서 그 자금이 거의 고갈됐다.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 핵 기술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핵기술과 물질을 유출시켰다. 그때 가격을 보면 플루토늄 1kg에 50만 달러, 농축우라늄 10만 달러 정도 였다. 북한은 핵 기술자들을 끌어오기 위해 러시아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원자력 공업부에서 러시아인들을 지나친 적도 있다. 핵 기술자들에게 총리급 주택을 내 주는 등 최고 대우를 해줬다.

지나친 투자와 경제악화가 맞물려 710호 자금이 바닥났다. 우라늄광석을 실어 날라야 할 트럭들이 타이어가 다 닳고, 디이젤 휘발유가 고갈돼 우라늄 광석을 운반할 수가 없었다. 우라늄을 추출할 때 쓰이는 항공석유도 공급되지 않아서 우라늄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있었다. 그때 김정일이 자체로 외화를 벌라고 지시를 한 것이다. 그 지시에 근거해 내가 외화벌이 상무로 파견됐다.

- 어떤 외화벌이 사업을 했나

서해지구 남포, 해주쪽에 파견됐다. 모든 당 행정, 기관, 기업소에서 710호 사업을 적극도와주라는 김정일 친필 지시문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이를 테면 함경남도 기계 공장에 가서 “도와주시오” 하면 해삼, 전복을 잡을 수 있는 배도 내주고 했다. 친필지시가 있는데 못하겠다고 하면 반역이 된다. 외화벌이를 하다보면 밀수도 하게 되는데 그때 관여한 것이 러시아에 있는 마피아 조직을 통해서 들어온 ‘붉은 수은’ 이었다. 묶음에 3만 달러 했는데 플루토늄을 축출하는 최종단계에서 쓰는 촉매제였다.

- 그러다가 어떻게 망명하게 됐나

1992년에 김정일이 자강도에 있던 국방대학을 평양부근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자금이 없다보니까 대학이전을 위해 자금 확보 일이 필요했다. 핵개발담당 중앙당비서 전병호가 그 일에 나를 소개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속해 있던 원자력공업부에서는 직무이탈이라고 나를 괘씸죄로 잡았다. 직무이탈죄, 당생활 기피죄, 외국인 불법면담죄로 건 것이다. 전병호 중앙당 비서와 국방대학학장은 원자력공업부 당 책임비서에게 ‘대호가 무역을 해서 이익이 생기면 같이 나눠먹을 수 있으니 잘 협상을 해보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듣지 않고 날 체포한 것이다.

이후 나는 강제노동집결소에서 4개월 있다가 배경이 있어서 아프다는 핑계로 나왔다. 나는 나라를 위해 능력껏 일하려고 했는데 무슨 죄냐는 생각으로 화가 났다. 그때 인민무력부 정치국 조직국장 이봉원을 삼촌으로 둔 친구가 평양으로 오라고 날 불렀다. 내 삼촌이 연변 무역공사 총경리로 있었는데 중국에서 무역회사를 차린다고 팩스를 보내면 김정일에게 제의서를 올려서 나를 풀어주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삼촌을 만나러 중국에 가게 된 것이었다.

- 중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

중국에서 개방된 현실을 보면서 완전히 쇼크를 받았다. 사업하면서는 무역면담을 국경에서만 해서 잘 몰랐다. 어려서부터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교육받았고 직업장에서 간부들을 대상으로 사상교육까지 실시했었는데….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너무도 속았다는 데 대한 배신감이 컸다. 북한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우라늄 생산공장에서 우라늄 통 탱크속에 알몸으로 뛰어들던 그런 야만적인 행위들이 떠올랐다.

심경변화를 편지에 적어서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국가보위부에 들어갔다. 내가 우라늄생산공장의 간부니까 김일성 명의로 중국정부에 체포령이 내려졌고 중국 공안에서 동북 3성에 수배가 떨어졌다. 나는 절망감 속에서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생기고 한국에 북한의 핵개발 정보 등 현실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도 생겨서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았다.

- 한국에 와서 정보기관이 활용할 유용한 정보가 많았을 텐데

들어올 때 한국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나를 입국시켰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여만철씨 가족이 함께 왔는데 여만철씨 가족만 기자회견시키고 나는 빼놓았다. 내가 고집을 피우니까 정보부에서는 그럼 기자회견 시킬테니까 내 신분을 밝히지 말고 핵문제에 대해서도 일체 말하지 못하게 했다.

안기부를 따돌리고 기자들을 불러서 기자회견을 한 적도 있는데 강연을 마치고 정보기관에 불려가 ‘내가 사회를 혼란시킬 목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다시 그럴 시에는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게 했다.

- 이후에도 정부의 압력이 계속 됐나

이번 주에도 KBS의 ‘남북의 창’에 나왔는데 핵무기 얘기는 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다. KBS측에선 작가에게도 두 번이나 핵문제는 질문하지 말라 했다.

언론이 침묵을 지키고 정부당국에서는 나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사이에 북한에서는 일본을 지나 미국까지 도달하는 사거리를 확보했다. 북한은 이제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국제사회에 협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현실이 이해가 안 간다.

- 어떤 심경인가. 왜 한국정부가 압력을 넣는다고 보나

한국사회가 적색화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한 움직임이 조직화되고 권력화되고 있는 듯하다. 지난해 일본에서 내 수기가 출판되고 일본언론에서 많이 보도됐는데 한국에서만은 한 마디도 보도가 안 됐다. 작년 4월 한국으로 나오면서 공항을 나오는데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어디선가 테러를 당할 것 같은 위기감 때문이었다. 핵 관련 정보를 막는 것도 김정일이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보나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그걸 감추고 핵포기를 한다고 하는 것은 눈감고 아옹하는 식이다.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  앞으로 계획은

북한의 핵개발 현실을 알리고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등 북한현실을 고발하는 인권영화를 만들고 싶다.

김범수 기자  bumsoo@


김대호씨가 밝힌 북한 핵의 진실

- 1945년 8·15 해방 후 소련 군대, 북한 전지역에 대한 지질탐사 진행. 북한에 질 좋은 우라늄 광맥이 매장돼 있음을 확인
- 김일성 6·25직전 인민군 5군단 정찰부장 이학문을 서울에 파견, 일본 교토대학 유학 시절 합성섬유1호를 완성한 화학자 이승기를 납북. 이승기는 이후 북한 핵개발의 중추적 역할 담당
- 김일성, 전후 복구 건설 직후인 1960년대 영변 분강 지구 핵 단지 조성, 원자력 연구소, 핵물리대학, 김일성 종합대학내 핵 물리학부 설치.
- 1980년대 핵개발 본격화, 1982년 핵 단지내 생산인력 대폭 증강, 1980년대 중반 중앙당 직속의 핵개발 부대 공병3국 조직
- 김정일, “3공병국은 나의 친위대이다”
- 1984년 황해북도 평산에 우라늄광산 확장공사 우라늄 생산공장 건설
- 1986년 영변 핵단지 시험 원자로 가동 성공
- 1987년 플루토늄 추출실험 사고로 관련 과학자와 기술자 식물인간 됨. 김일성 우라늄 농축기의 주체화 평가
- 1989년 초, 무기급 핵물질 개발 성공 선전. 고농축 우라늄으로 추정
- 1990년 황해북도 평산에 20만t 처리능력 갖춘 우라늄 생산 화학공장 건설
- 1991년 9월,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에 핵미사일 기지 건설 (이곳에서 일본으로 미사일 발사 실험)
- 1992년 5월, IAEA 한스 브릭스 총장 일행 북한 핵단지 방문, 영변 지하핵시설 은폐 위해 여러 달 전부터 모든 납판 공출. 관련 업무 중단
- 1993년 여름. 북한 낮은 저온에서 핵분열을 일으키는 저폭 뇌관실험 성공
- 1990년대 초, 710호 자금 완전 고갈









김범수기자  2004-02-28 오후 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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