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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 月刊 朝鮮 3월호에 실린 땅굴 이야기

운영자 2004.04.04 07:06 조회 수 : 1658 추천: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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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땅굴을 찾는 민간인들 이야기
민간인 땅굴 탐사의 선구자(鄭址龍씨)는 갔지만 그 후예들의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휴전선에서 60km나 떨어진 화성지역까지 남침 땅굴이 내려왔을까?
李弘 月刊朝鮮 편집위원 (hlee@chosun.com)
11년 전으로의 回歸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천천리 옥산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땅굴 찾기 작업 현장.>

지난 1월17일 月刊朝鮮 사무실로 한 인사가 찾아왔다. 자신을 산악인이라고 밝힌 우영부(63)씨는 『얼마 전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천천리 지역을 지나가다가 민간인들이 북한의 남침 땅굴을 찾는 현장을 목격했다』면서 『현장에 비치된 각종 증거물을 볼 때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데 왜 언론은 그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정부 당국은 대책 마련에 나서지 않느냐』고 항변하듯 말했다. 우씨의 말을 듣는 순간 11년전인 1992년 민간인들의 땅굴 탐사작업을 취재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당시 月刊朝鮮은 1992년 5월호를 시작으로 6, 7, 8, 12월호를 통해 북한의 남침 땅굴을 찾는 민간인들의 활동과 그 眞僞(진위)를 가리는 기사를 연재한 적이 있다. 보안사 준위 출신인 鄭址龍(정지용)씨의 제보를 계기로 시작된 취재는 상당히 강도높게 진행됐고 사회적 파문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결론은 없었다. 민간인 땅굴 탐사자들이 주장하는 지역에서 「땅굴 관통」이란 현상이 나오지 않은 이상 어떠한 결론도 내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취재에 참여해 상당한 心證(심증)을 갖고 있었던 기자로선 「기사로서 입증하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함께 「땅굴이 없을 수도 있다」는 안도감이 어울린 묘한 감정에 빠진 적이 있다. 지하 세계의 소리는 너무나 다양하고 인간의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서서히 마음의 정리를 한 적이 있다.

그 후 기자의 뇌리에선 땅굴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다. 1980년대 軍당국이 찾아낸 1, 2, 3, 4 땅굴 이후 추가로 확인된 땅굴이 없고 개인적으로도 당국과 벌이는 피곤한 「게임」에 더 이상 말려들고 싶지 않아 애써 기억에서 밀어낸 면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자의 마음속에는 항상 당시의 상황이 「未濟(미제)」로 남아 있었다.

우영부씨의 방문은 묻어 뒀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일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아니 아직도 그들은 땅굴 탐사 작업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동안 경기도 華城지역에서 장거리 땅굴 탐사작업을 민간인들이 해 오고 있다는 소문을 간간이 들어 오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이제는 본격적으로 의심 징후 지역을 절개까지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다시 살아났다. 반면 의구심도 들었다. 「華城이라면 휴전선에서 직선거리로 60km 이상 떨어져 있고 우회할 경우 100km가 넘는 땅굴을 파야 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한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덧없이 스러져 간 집념의 사나이

그가 전하는 현장의 분위기는 경청할 부분이 꽤 있었다. 「땅굴로 추정되는 지하 공동을 관통했고 그곳에서 끊어진 철제 와이어가 발견됐다」는 등 관심을 끄는 것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긴장」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그 땅굴을 찾는 민간인들이 누군지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월20일 아침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천천리 옥산마을에 있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이미 「유명지역」이 돼 있었다. 다섯 대가 넘는 포크레인이 굉음을 울리며 땅을 파내려가고 비닐 하우스와 컨테이너 하우스가 몇 개 보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현장 초입에 있는 비닐 하우스는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증거물의 전시장. 기자는 무심코 그 비닐 하우스에 들어서다가 鄭址龍씨의 影幀(영정)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이곳에 영정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10여 년 전 그와 몇 달간 동행하며 취재를 했고 그의 집에도 여러 차례 들러 지하음 테이프를 들었던 기자로선 콧날이 찡해 오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 12월5일 이곳 현장서 작업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유언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한 채 12월10일 수원의 한 병원에서 운명했다고 한다. 사망하기 한 달쯤 전에도 쓰러진 적이 있으나 별 치료 없이 며칠 만에 다시 현장에 나와 작업을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원래 고혈압氣가 있었던 그는 한겨울의 추위 속에 피로까지 누적되며 돌아설 수 없는 선을 넘고 만 것이다. 1988년 보안사 對北 관계자로 땅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14년간 휴전선과 경기도 일대의 山野를 떠돌며 「북한의 남침 땅굴을 찾아내겠다」는 一念으로 살아 온 한 사내의 삶은 빛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끝나 있었다.


『후회는 없다』

현장을 둘러보다가 기자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바로 李準(62)씨였다. 1992년 12월호의 「땅굴을 찾는 사람들, 그 이후」라는 기사를 쓸 때 만났던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경찰관 신분으로 땅굴 탐사에 깊숙이 빠져 있었는데 1996년 경찰에서 퇴직한 이후에도 이 작업에 계속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10여 년 만에 만난 반가움에 힘찬 악수를 나눴지만 뭔가 씁쓸한 뒷맛이 느껴졌다. 기자는 당시 그에게 『땅굴에 너무 빠지지 말라. 일단 빠져 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충고를 한 적이 있다.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오직 땅굴 찾기에만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기자는 이후 2월7일까지 다섯 번에 걸쳐 현장을 찾았다. 현장은 예전과 사뭇 달랐다. 예전에는 민간인들의 땅굴 탐사작업이 실시되는 곳에 시추업자, 인부 등 몇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민간인 땅굴 탐사자와 함께 목사 등 기독교 관계자들과 관람객 등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 상황이 많이 달라져 「땅굴 찾기」가 地下에서 地上으로 올라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민간인 탐사자들과 그들에 대한 동조자들을 중심으로 「남침 땅굴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약칭 남굴사)」이란 단체가 2001년 4월 창설됐다. 남굴사는 인터넷 홈페이지(www.ddanggul.org)를 개설해 對外 홍보작업도 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金漢植 목사가 이끄는 한사랑선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계도 이들의 활동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절개 작업도 金목사 측의 지원금으로 이뤄지고 있다. 2월10일 현재 땅굴이 지나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절개하는 작업은 폭 60m, 깊이 18m의 땅파기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땅굴이 있다고 확신하고 본격적인 절개작업에 나선 현장에선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동안의 작업 내용을 金喆熙(76) 남굴사 회장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정리해 본다.

―華城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2001년 봄 화성시 서쪽 끝부분 서해안에 있는 지화리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당시 한 업자가 우물 파는 작업을 하다가 지하 30m 지점에서 굴착장비가 뚝 떨어지고 에어를 넣는데 무한정 들어가는 현상이 나왔다. 그 소식을 몇 달 후 전해 듣고 그곳에서 네 구멍을 시추해서 녹음을 하니까 한 구멍에서 소리가 감지됐다. 3, 4분 정도 짧은 것인데 逆대책 작업하는 소리로 추정되는 기계음과 사람 목소리가 잡혔다. 우리는 화성 일대를 집중적으로 탐사하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이곳까지 땅굴이 와 있음을 확신하고 작업을 계속하게 됐다』

―현재 절개작업을 하고 있는 천천리 옥산마을 현장은 어떻게 선택한 것인가.

『우리가 추정한 땅굴 축선이 이곳을 지나고 있고 國有地인데다가 軍부대 앞이라 만일의 사태가 날 때 안전할 것이란 판단에서 이곳을 택했다』


지하에서 발견된 와이어의 正體

―그동안 현장서 어떤 결과가 나왔나.

『2002년 8월부터 26개공을 시추해 녹음을 했다. 11월 중순경 시추작업 중 두 군데서 로트(굴착장비의 앞부분)가 작업 중에 뚝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세 번째 시추작업 중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굴착작업 후 로트를 뽑는데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다음날 50t 크레인을 동원해 온갖 고생 끝에 로트를 끄집어냈다. 뭔가가 잡아당기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올라오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또 시추업자의 말로는 지하 18m 지점까진 시추할 때 가루가 나오는데 18~20m 지점에선 자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을 집중적으로 시추했다. 지름 40cm짜리 시추공을 한 군데 집중해서 일곱 개를 파 결국 지름 1.2m 정도 되는 우물 모양의 구멍을 지하 20m 지점까지 뚫었다. 그게 지난해 11월20일이다』

―관통 구멍을 통해 어떤 결과가 나왔나.

『그 다음날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남굴사 회원인 홍강락씨와 인부가 그 관통구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버럭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와이어가 발견됐다. 속은 끈으로 되고 겉은 철사로 감겨 있는 지름 7~8mm 정도의 이 와이어는 잡아당기다 끊어진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와이어가 세 번째 시추공 작업 중 로트가 잘 나오지 않았을 때 아래서 잡아맸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기사들 말로는 그 정도 와이어 하나면 10t 정도를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3개가 나왔다. 또 각진 돌이 아래서 나왔다. 그런 돌은 자연상태에선 나올 수 없는 것이라 逆대책용으로 채워 놓은 것이라고 추정한다』


왜 증거물을 남겼을까?

―그 와이어가 발견된 지점이 어딘가.

『지표에서 7~8m 정도 땅을 판 상태에서 시추작업을 했고 시추작업한 곳으로부터 10m 밑이 땅굴 천장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와이어는 시추작업을 한 곳부터 지하 8m 지점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그 와이어는 땅굴 천장보다 높은 곳에서 발견됐다는 얘기인데 어떻게 그런 현상이 가능한가. 만일 북한 측이 밑에서 역대책을 했다면 중요 증거인 와이어를 두고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왜 와이어의 발견지점이 천장보다 위이고 그들이 그런 증거품을 남겨 놓았는가는 우리도 해석이 잘 안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와이어로 잡아매는 등 지하에서 역대책을 할 때는 공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작업팀이 지하로 내려갔을 때는 공동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

『그동안의 현상을 볼 때 그들의 역대책 솜씨와 속도는 대단한 수준으로 판단된다. 우리가 내려가기 전에 되메우기 작업을 철저히 해 웬만한 사람의 눈으로는 그곳이 인공땅굴인지 아닌지 모르게 변형시켜 놓는다』

―이곳에 땅굴이 있다고 확신하나.

『소리, 와이어, 자갈 등 우리는 일곱 가지의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선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수 없다』

땅굴 찾기에 관한 한 99%의 心證이 있더라도 확실한 物證(땅굴 관통)이 나오지 않으면 「땅굴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그동안 軍당국이 보인 일관된 자세다. 땅굴 찾기에 관한 한 軍당국이 쌓은 노하우가 가장 많으며 징후에 대한 평가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번 화성 현장에서의 작업도 징후에 대한 논란 차원을 벗어나 땅굴 관통이란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쉽지 않다. 설령 지하 공동이 발견되더라도 자연동굴이 아니라 북한 측이 의도적으로 판 땅굴이란 점을, 작업 당사자들이 입증해야 한다. 게다가 천천리 일대는 예전에 아연광산이 있던 지역이라 지하 공동이 갱도인지 아닌지도 구분해야 한다.

「징후 발견-절개작업-지하 공동 관통-북한 측 땅굴이란 입증」을 민간인들이 일괄적으로 해야 하는데 이것은 실로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기」보다 어려운 과제다.

이번 화성 현장에서의 작업도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화성시 공무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초기부터 작업을 막았다. 2월10일에는 화성시청이 「공유지의 훼손 및 불법건축물에 대한 원상회복 조치」라는 공문을 남굴사 관계자들에게 보냈다. 내용은 「2월15일까지 모든 불법행위(토지굴착 및 시추작업)와 불법시설물(가설 건축물)을 자진 철거하고 원상복구하기 바라며 조치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관계법령에 따라 사법고발은 물론 행정대집행법 제반 규정에 따라 조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땅주인의 견제, 당국의 부정적인 시각, 「사기꾼」이란 주변의 비난 등 온갖 악조건 속에서 이제껏 버텨 왔다.


운명을 가른 사촌형의 제보

민간인들의 「남침 땅굴 찾기」 작업은 鄭址龍이란 한 개인의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1950년 5월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충남공고 광산과를 졸업했다. 1970년 軍에 입대, 보안사에서 1989년 7월까지 19년간 근무했다. 1988년 그에게 전달된 한 정보는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1992년 그가 기자에게 전달한 수기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나는 1970년 5월 방첩하사관으로 지원입대해 전후방 부대를 전전 근무하다가 1974년 4월부터 보안사 대공처에서 전역시까지 근무했다. 1988년 4월4일 고종사촌형인 최모씨가 찾아와서 『땅굴이 김포반도로 파고 내려오고 있다. 찾아내는 방법은 노량진 성당 임응승 신부가 알고 있다』고 알려 줌으로써 이 작업에 개입하게 됐다. 그 후 최씨와 김포반도 징후 현장을 몇 차례 답사한 후 땅굴 징후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보안사 지휘계통으로 보고했으나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처리되어 개인적으로 땅굴 찾기를 해 보기로 결심했다. 시추회사를 소개받아 1988년 4월15일 김포 후평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지하 100m까지 뚫었으나 땅굴을 찾지 못했다…(後略)…>

그의 파란만장한 땅굴 찾기 투쟁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김포 후평리에서 처음으로 自費로 땅굴 찾기에 나선 그는 시간과 자금이 부족하자 1989년 자진 전역해 민간인 신분으로 작업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초창기 작업은 주민신고 등으로 징후가 나타나는 지역에 시추공을 뚫은 후 자신이 고안해 낸 청음기로 녹취하고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후평리를 비롯, 연천군 구미리, 노곡리, 동두천, 의정부 등에서 이상징후가 보고되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작업을 했고 그 결과를 당국에 알려 줬다. 그러나 초반에 잠시 관심을 보였던 軍당국도 그의 끈질긴 진정과 제소에 지쳐 나중에는 완전히 적대적인 입장으로 변모한다. 鄭址龍씨가 月刊朝鮮 문을 노크한 1992년 초반은 바로 그런 시점이었다.

그는 1994년 정명환 예비역 소장과 함께 「서울 아르덴느의 공포」라는 책을 펴내기도 한다. 정명환씨는 1980년대 중반 사단장 시절 땅굴을 발견한 인물로 鄭址龍씨의 땅굴 추적을 높이 평가해 왔다. 1995년 金泳三 정권 시절에는 안기부와 함께 동두천, 의정부 등에서 탐사작업을 실시해 「징후」를 확인했으나 묵살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權寧海 안기부장을 이적죄로 고소했고 이후 안기부로부터 기피인물로 찍혀 압박을 받기도 했다.

1998년 9월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에서 땅굴 탐사작업을 실시해 지하 공동을 발견했다. 그러나 당국에 의해 이 지하 공동은 자연동굴이란 결론이 내려지며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1999년에는 수원 화성지구에서 「땅굴 징후」를 포착해 신고했고 당국이 아무런 조치가 없자. 당시 국정원장인 林東源씨를 직무유기, 이적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나 죽거든 조국산천에 유골을 뿌려달라』

땅굴 찾기 작업은 돈이 많이 든다. 그는 시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팔고 처갓집에서도 돈을 끌어다 썼다. 가정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결국 그의 부인도 10년 전 별거를 선언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그 후 그는 철저하게 피폐된 인생살이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땅굴 찾기에 대한 집념은 잃지 않고 버텨오다가 지난해 말 命을 달리한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그가 보여 준 인생살이를 살펴보면 정상인으로선 납득하기 힘든 면이 많다. 가정도 제쳐놓은 채 자신의 재산을 몽땅 털어 넣은 점, 자신의 일을 믿어 주지 않는 관계당국을 고소하면서 계속 관심을 촉구한 점, 쇠약해져 가는 몸을 돌보지 않고 현장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命을 단축한 점, 「사기꾼」, 「정신병자」 등 주변에서 끊임없이 퍼붓는 욕설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버틴 점 등은 보통인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11년 전에 만난 후 접촉이 없었던 기자로선 그의 그동안 행적을 잘 모른다. 그러나 그와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의 애국심, 순박함, 집념, 사심없는 자세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命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했음인지 몇 달 전에는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해서 사랑하는 조국 山川에 뿌려달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鄭址龍씨가 마지막에 살던 집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서울 강남의 어느 곳에서 사글세로 살아왔다는 것만 알 뿐이다.

다우징 방식으로 땅굴을 찾는 작업을 하면서 鄭씨와 오랫동안 지냈던 崔民龍씨는 그의 면모를 이렇게 전한다.

『그는 진짜 영웅이다. 그가 없었다면 땅굴의 심각함을 알릴 수 없었다. 그가 없었다면 나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私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누가 개인적으로 쓰라고 몇십만원을 주면 그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탐사를 계속했다. 한번은 점심을 먹으면서 여관비 2만5000원만 남겨 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오니까 밥을 사줬다. 결국 여관비가 없어서 우리는 그날 밤 남의 집 비닐 하우스에 몰래 들어가 잤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무서운 집념을 가진 사람이다』


鄭址龍씨의 후예들

鄭址龍씨의 집념어린 활동은 그 후 많은 동조자를 낳는다. 지하세계를 탐사하는 방법인 다우징을 사용하는 崔民龍, 金鍾又씨를 비롯, 중장비 업자로 현장에 나섰다가 지하음에 빠져 들며 아예 탐사자로 나선 姜井山씨, 파출소 경찰관으로 근무하다가 이상징후에 대한 주민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다가 본격 가담자로 나선 李準씨, 중앙정보부 시절 對北 과장을 지낸 金喆熙 남굴사 회장, 민간인들의 땅굴 탐사작업에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고 후원해 준 윤여길(前 국방부 장관 과학보좌관), 정명환, 지만원씨 같은 軍출신 관계자 등 많은 사람이 陰陽(음양)으로 도왔다. 최근에는 金漢植 목사 등 기독교 관계자들이 새로운 동조자로서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 몇 명은 중도에 하차했다. 그러나 崔民龍, 李準, 金喆熙씨 세 사람은 오랜 세월과 많은 돈을 쓰면서 「민간인 땅굴 탐사」의 脈(맥)을 이어오고 있어 이들을 집중취재했다.


지하 세계를 손금처럼 보는 사람

崔民龍(51)씨는 다우징 탐사의 전문가다. 「ㄱ 」자 모양의 철사를 양손에 들고 水脈(수맥)이나 지하 공동을 찾는 다우징 탐사는 외국에서도 이미 많이 이용되고 있다. 崔씨는 1980년대 이 기법을 배운 후 현재는 국내 정상급 실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1990년 鄭址龍씨와 인연을 맺은 후 탐사에 적극 나섰으나 그동안 전면에는 거의 나서지 않았다. 鄭址龍씨가 사망한 후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화성 작업현장서도 가장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다우징 기법은 언제 배웠나.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 건설공사에 나가서 일하다가 독일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웠다. 나는 건설장비 기사로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다. 그곳 건설현장에는 지하 圖面(도면)이 없어 작업하다가 지하에 매설된 전선이나 하수도관 등을 건드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만일 고압선을 건드릴 경우 당시 20만 달러를 물어내야 했다. 지하 매설물을 독일 친구가 다우징 방식으로 찾는 것을 보고 배우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 때 물질에 따라 나타나는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체험했다』

―鄭址龍씨와는 언제부터 같이 일을 했나.

『이라크에서 귀국한 직후인 1990년 鄭址龍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그때부터 땅굴 탐사작업에 관여했지만 항상 뒤에만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지하 공동을 찾을 수 있다고만 했지 지하에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숨겼다. 그것까지 밝히면 내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 화성에서 땅굴 찾는 작업에선 鄭址龍씨가 죽은 상태고 나의 마지막 작업이라고 생각했기에 내 신분을 밝히는 것이다. 이번에 안 하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땅굴 찾기에만 매달리게 됐나.

『나는 국내에 돌아와서 토목사업을 운영해 왔다. 鄭址龍씨가 도움을 요청할 때 수시로 현장에 나서곤 했는데 1998년 9월 경기도 연천군 구미리 현장에 간 후 사업을 완전히 집어치우게 됐다. 모르면 아무 일도 안 할 수 있지만 나의 경험상 땅굴이 확실한데 사업이 무슨 의미냐는 생각이 들었다』

―화성 절개지역에선 어떤 것을 감지했는가.

『이곳 地下에선 지난해 6월에 광케이블이 깔렸다. 전화, 인터넷까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전에는 고압선만 있었다. 8명이 탈 수 있는 4m짜리 갱차가 다니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 현재 이 지역에는 북한 측의 逆대책이 너무 완벽하게 돼 있다』


『진실을 아니까 발을 못 빼겠다』

―軍당국은 계속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데 왜 발을 빼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땅속에 있는 지형지물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구미리에 갔을 때 「이거 끝장내지 않으면 내가 끝나는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라가 없으면 나나 가정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다. 진실을 아니까 발을 못 빼게 됐다』

―그동안 이 작업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나.

『이익을 생각하면 이 짓 못한다. 그동안 투입한 돈은 내 사업자금과 빚까지 포함해 5억원이 넘을 것이다』

―가족들의 반응은.

『鄭址龍 선생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는데 나도 비슷한 처지였다. 아내와 이혼하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애들도 내가 家産을 탕진하면서 대학을 중퇴하는 상황까지 갔으니 괴롭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와 자식이 모두 이해를 한다. 몇년 전 한 터널에서 나의 능력을 실제로 보여 줬다. 식구들이 차를 타고 터널에 들어가게 한 후 형태나 위치를 다 맞췄다. 승용차에 탄 사람의 수, 몇 m 이동한 거리, 사람들이 있는 위치 등을 손금 들여다보듯 맞추니 식구들이 놀라면서 나의 능력을 믿게 됐다』

―다우징 방식은 어떤 것인가.

『원래는 水脈(수맥)을 찾는 데 많이 사용되던 방식이다. 다우징의 본질은 에너지를 느끼는 것이다. 쇠는 감이 오지만 나무는 감이 없다. 사람은 머리에서 氣가 나온다. 차나 쇠는 같은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크기와 움직임을 봐서 판단하게 된다』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 두렵지 않나.

『사실은 두렵다. 연천에서 작업할 때는 세 차례에 걸쳐 협박을 받았다. 그 이후 나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요즘 나는 한 곳에서 잠을 자지 않고 수시로 잠자리를 옮겨 다니는 실정이다.

이번 작업이 끝나면 조용한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자고 가족들과 약속을 한 게 있다. 그러나 나 혼자 모든 것을 잊고 살면 행복할지 의문이다. 위험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보상은 생각해 봤나.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다만 땅굴을 발견한다면 여기에 투입한 공사비용이나 우리가 직업을 포기하고 이 일에 매달린 기회비용을 정부가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뭘 바라고 했다면 이제까지 올 수가 없었다』

―기자로선 여기서 땅굴이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것이 다 틀리다면 진짜 좋겠다. 그러나 내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기에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땅굴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다. 실체가 발견된 후 우리 국민과 軍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주민 신고가 발목을 잡았다

李準(62)씨는 1970년 경찰에 들어가. 1996년 12월 경장으로 퇴직했다. 그가 땅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2년 6월 경기도 의정부 경찰서 남면 파출소에 근무할 때였다. 남면 한산리 공장지대 지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주민 신고를 받고 현장에 나간 것이 그 후 10년간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는 『첫 현장 검증에서 소리의 특성이나 분위기上 틀림없이 땅굴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 후 그는 鄭址龍, 金鍾又씨 등과 알게 되고 근무가 없는 날에는 연천 구미리, 노곡리, 학곡리 등에서 작업을 꾸준히 했다. 경찰에 있을 동안에도 집을 저당 잡히고 돈을 마련해 시추하는 데 투자, 식구들의 빈축을 많이 샀다.

경찰서 간부들도 그를 수시로 꾸짖었다. 그러나 그의 집념은 남달랐다.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지만 「진짜 땅굴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묵묵히 참았다. 그러다가 1996년 정년을 몇 년 앞두고 경찰을 떠났다. 오로지 「땅굴 찾기」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정년퇴직을 앞당겨 가면서 퇴직했는데 왜 그랬나.

『나는 비번일 때만 작업을 했지만 상관들이 뭐라고 해 부담이 많이 갔다. 그러나 위기가 절박하게 느껴지는데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땅굴 찾기에 승부를 걸 생각으로 퇴직을 앞당겼다』

―퇴직 후에는 어떤 활동을 했나.

『주로 연천, 철원, 의정부, 화성 등지에서 鄭址龍씨와 같이 또는 단독으로 땅굴 탐사 작업을 계속했다』

―그동안 땅굴 탐사에 얼마나 썼나. 집안에서 반발이 없었나.

『대충 1억5000만원 이상 쓴 것 같다. 물론 아내나 애들이나 이런 행태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두 땅굴의 존재는 인정한다. 그러기에 좋아하지는 않아도 반대는 안 한다』

―땅굴 탐사에 빠지게 된 이유는 뭔가.

『땅굴이 틀림없이 있다는 믿음이다. 내 스스로 청음기를 만들어 내가 포착한 지하음을 당국에서 조작이라며 몰아세우니까 더 열을 받아 「그래 내가 기필코 찾아내겠다」는 오기까지 생겼다』

―그동안 녹취한 지하음은 어떤 것이 있나.

『갱차음, 돌 깎는 소리, TBM으로 추정되는 기계음 등이 많다. 사람 목소리도 있었다. 화성 지화리에서도 「대감께서 사또 되십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청음기를 만들었고 내가 녹음했으니까 믿을 수밖에 없다』

―후회는 없는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사기꾼으로 몰고 보상금을 노린다고 하는데 자기 돈을 써 가면서 사기 치는 사람도 있나?』


정보부 對北과장 출신의 변신

남굴사 金喆熙(76) 회장은 평북 위원 출신이다. 6·25 때 소대장으로 참전했다가 김화 전투에서 중공군의 수류탄에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1961년 5·16혁명 이후 창설된 중앙정보부에 창설멤버로 차출돼 20년간 근무했다. 일본과 對北 관련부서에서 계속 근무하던 그는 對北과장으로 근무하던 1980년 신군부의 등장 후 옷을 벗었다. 현재는 아시아-태평양문제 연구소 이사로 일하는 등 근 40년간 對北문제를 다뤄 온 정보통이다. 그는 비교적 늦게 민간인 땅굴 찾기 작업에 합류했지만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남침용 땅굴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가졌나.

『1992년 月刊朝鮮에 나온 기사를 보고 틀림없다고 생각한 후부터이다』

―鄭址龍씨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

『그는 1995년 봄에 처음 만났다. 내가 對北문제 전문가인 것을 알고 그가 찾아왔는데 나도 그의 의견에 공감을 하게 되면서 그 후 1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 만났다. 땅굴 징후가 나타나는 지역을 함께 많이 돌아다녔다』

―남굴사는 어떻게 창설됐나.

『그전에는 鄭址龍씨의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땅굴 탐사가 이뤄져 왔다. 그러나 그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對外的인 영향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돼 관심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단체를 2001년 4월3일 만들게 됐다』.

―왜 이 작업을 하는가.

『정부에서 하면 좋겠지만 정부가 안 하니까 우리가 나선 것이다. 우리는 한시가 급하다는 위기감 속에 살고 있다. 그러니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동안 우리는 사기꾼, 정신병자 등 온갖 소리를 다 들어 왔다. 그러나 현상을 아는 이상 우리는 현장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 이 일에 얼마나 투자했나.

『이럭저럭 한 6000만원 이상 들어갔다. 이번에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도움을 주고 있지만 그동안은 대부분 남굴사 회원들의 주머니를 털어 작업을 했다』

―만일 땅굴을 발견한다면 국가에서 보상이 있나.

『모르겠다. 땅굴을 발견했을 때 국가서 보상해 주면 좋겠지만 우리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나라가 위급한 상황을 그대로 놓고 볼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지 보상과는 관계가 없다』


순진한 사람이 가진 확신은 무섭다

땅굴 찾기에 빠진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공통적인 것이 감지된다. 鄭址龍씨를 비롯해 모두 순박하다는 점이다. 주변에선 그들을 사기꾼, 정신병자로 질타하지만 자주 접해 본 기자는 그들에게서 「착한 人間群」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순진한 사람들이 재산까지 탕진해 가면서 「엉뚱한」 일에 강한 집념을 보여 주는 것이 기자로선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들의 행동양식에 대해 정신과 의사인 김영진(49·대전중앙신경과의원)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해타산이 밝은 사람은 절대로 헛돈 들이는 일을 하지 않는다. 반면 순진한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계기로 확신이 섰을 경우 무서운 집착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집착의 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黑心 있는 사람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더 강하게 집착한다.

보상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개인의 재산을 털어 넣을 정도가 되면 물론 家長으로선 실격이다. 그러나 땅굴 찾기가 우리 사회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소승적 이기심을 떠나 대승적 이기심으로 한 단계 넘어선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마치 독립투사가 온갖 박해가 주어져도 외롭지만 의로운 길을 가려는 것과 비슷하다. 순진, 확신, 공명심 같은 것이 어우러지면 무서운 힘이 생길 수 있다』


목사들의 헌신

화성에서 절개작업을 하고 있는 현장에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많이 눈에 띈다. 한사랑선교회 소속인 李瑛烈(42)-趙顯洙(37) 목사는 이곳에 상주하면서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 선교회 대표인 金漢植(58) 목사와 현장 인근에 있는 매송영락교회의 김진철(39) 목사도 매일 현장에 나타나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계에서 보수적 지도인물로 꼽히는 金漢植 목사는 이번 작업의 자금을 지원하며 「땅굴 관통」이란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한사랑선교회 소속은 아니지만 김진철 목사는 매일 작업 인부와 남굴사 관계자들에게 수십인분의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현장에는 거의 매일 교회 차량들이 드나들며 목회자들이 수시로 찾고 있다.

기독교계 인사들이 이곳 현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李瑛烈 목사의 활동 때문이었다. 李목사는 땅굴을 찾는 사람들에 대해 10년 전부터 관심을 가져 왔고 그동안 鄭止龍씨에게 성금을 보냈던 인물이다. 그러던 중 鄭止龍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현장을 방문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다음은 李瑛烈 목사와 가진 일문일답이다.

―화성 발굴 현장에 나온 지는 얼마나 됐나.

『1월 초부터 나왔으니 한 달이 좀 넘었다』

―왜 땅굴에 관심을 갖게 됐나.

『10여 년 전 月刊朝鮮 기사를 보면서 땅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990년대 중반부터 나는 鄭址龍씨의 활동에 공감해 개인적으로 성금을 보내곤 했다. 궁금한 일이 많아 鄭址龍씨에게 전화로 물어보기도 했다』

―화성 지역에 오게 된 이유는 뭔가.

『지난해 12월 중순 鄭址龍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학생들과 함께 이곳에 들렀다. 이 작업의 핵심인 鄭址龍씨가 없으니 근본이 흔들리며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그동안 꾸준히 후원해 준 사람이란 것을 남굴사 사람들이 알아보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많이 애썼구나. 땅굴 발견도 중요하지만 한 생명이 그 과정에서 사라져 간 것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에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그때 내가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생명이 그렇게 사라져 가다니…』

―한사랑선교회에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뭔가.

『당시 나는 자료를 챙겨서 金漢植 목사께 찾아가 화성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金목사께서 충격을 받았는지 현장을 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12월24일 새벽에 이곳에 왔다. 그날 목사님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후 어떻게 진행됐나.

『화성 현장서 나온 갖가지 증거를 보고 남굴사 관계자들이 조작한 것이 아니면 진짜 문제라는 것을 절실히 인식했다. 이것이 사실이면 목회만 하는 것은 문제고 어떤 방법으로라도 알려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올해 1월1일 신년기도회를 하는 곳에 남굴사에서 세 명이 찾아와 설명회를 가졌다. 당시 모여 있던 300여 명의 목회자들은 다우징으로 지하 탐사를 하는 崔씨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이 컸다. 그래서 서울 대치동 한사랑교회에서 직접 崔民龍씨의 능력에 대한 검증을 벌였다. 崔씨가 옥상(3층)으로 올라가서 2층에 있는 사람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방법이었다. 가운데 줄에 사람들을 배치했는데 첫줄은 비우고 둘째, 셋째, 넷째 줄에 세 사람씩 앉히고 중간을 비웠다. 그러다 가운데쯤 두 사람씩 두 줄을 앉히고 마지막 줄에 네 사람을 배치했다.

그런데 옥상에 있던 崔民龍씨가 아래의 배치된 상황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틀린 것은 마지막 줄의 네 사람을 세 사람으로 설명한 것밖에 없다. 이 현상을 목격한 당시 사역자 300여 명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남굴사 관계자들이 하는 작업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다. 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밀어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1월 초부터 현장을 지키게 됐다고 했는데 당시 상황은 어땠나.

『1월 초 절개작업을 시작할 때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다. 시청사람들이 수시로 나와서 작업중지를 요구했고 장비대여업자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자꾸 작업 방해를 하니까 우리가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신도 대학생들이 무더기로 머물면서 그들을 지켰다』

―목사께서 화성 현장을 지키고 있으면 교회 신도들은 어떻게 하나.

『우리 교회는 전도사 분들이 맡아 잘 운영하고 있다. 이곳 일이 진짜 중요하니 뜰 수가 없다는 사정을 신도들도 이해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 땅굴이 나올 것 같은가.

『우린 기술적 측면은 잘 모른다. 우리는 그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남굴사 관계자들이 탐사와 발굴에 바쁘기 때문에 우리가 주로 이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임무다』


『현재는 6·25보다 더 위기다』

현재 이 작업에 대해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金漢植 목사다. 金목사는 자금지원도 하고 있지만 한국의 위기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우려하며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땅굴 관통」이란 성과를 얻어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땅굴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

『15년 전쯤 이필섭 장군을 만났을 때 그로부터 「땅굴을 찾기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분은 땅굴이 핵무기보다 더 위험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 때마다 「땅굴을 찾게 해 달라」는 기원을 곁들였다』

―화성에서의 땅굴 발굴 작업은 金목사께서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동안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남굴사의 활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같이 사역하는 李瑛烈 목사가 화성 현장을 보고 온 후 심각성을 전달해 줬다. 현장에서 그동안 발견한 갖가지 증거를 보고 나름대로 검증해 본 결과 이곳에 땅굴이 반드시 있다는 판단이 서게 됐다. 일단 그런 판단이 선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만일 이곳에서 땅굴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끝까지 찾기로 했다. 땅굴이란 증거가 여러 가지 나왔지 않은가. 많은 예산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발견할 때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현재의 한국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6·25는 극복한 위기였지만 지금은 그 때보다 더 심각하다. 우리 안보의 근거가 모두 무너지고 있다. 우선 韓美 상호방위조약이 근본에서 흔들리고 있다. 북한이 그동안 남침하지 못한 것은 주한미군의 존재 때문이었다. 한국이 북한과 미국의 중간에 서서 조정을 하겠다니 정부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 북한도 이제는 한국을 제쳐 놓고 미국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자세이고 미국도 한국을 못 믿는 실정이다. 요즘은 모두 金正日의 의도대로 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對北 지원금이 어디로 갔겠는가. 그건 분명한 利敵행위다』

―한사랑선교회에서 관심이 많은데 다른 교계도 땅굴에 관심이 있나.

『한국교회지도자협의회에서 두 차례 방문했고 수원지역 교회 관계자들이 방문했다. 기독교 목회자들이 수시로 이곳을 방문해 공감하는 분위기다』


역사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민간인 땅굴 찾기 작업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다. 10년 전 전방에서 군복무할 때 지하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후 땅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가 지난해 말부터 화성 현장에서 살다시피하며 온갖 궂은일을 하는 홍강락(36)씨, 현장을 지켜보다 관심을 가졌다는 일부 옥산마을 주민, 지난 1월26일 저녁 현장에서 600~700m 떨어진 자신의 집에서 네 시간 동안 갱차음 등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車昭奎(43)씨 부부, 다른 일을 보러 가던 중 현장에 구경삼아 들렀다가 각종 증거에 놀라 기자를 찾아왔던 우영부씨 등 남굴사 지지자들은 적지 않은 실정이다.

역사는 이들 민간인 땅굴 탐사자를 어떻게 평가할지 의문이다. 만일 화성 같은 군사적으로 예민한 지역에서 북한 땅굴이 발견된다면 이는 한국의 비극이 된다. 한국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은 격이 되는 만큼 그 반향은 상상을 넘어설 것이다.

반면 북한 땅굴이 없다면 일생일대의 승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 가뜩이나 민심이 뒤숭숭한데 꿈자리 사나운 일을 거듭한 그들에게 비난도 쏟아질 것이다. 그들의 국가에 대한 충정, 집념은 높이 사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땅굴을 못 찾는다고 하더라도 비난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땅굴 찾기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격으로 극히 힘들 일인데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의 미약한 힘으로 결과를 이루지 못했다고 매도만 할 수는 없다.

기자 역시 취재를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들이 비난을 받더라도 땅굴은 없어야 한다」는 「희망적 낙관」과 「과연 그들이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왜 그 짓을 하겠는가」 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수도 없이 교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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