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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무신론 짐승들의 또라이 역사관

운영자 2004.09.13 20:28 조회 수 : 1094 추천: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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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영장군은 애국자, 이성계는 배신자"

2004/09/13 06:15 송고

    (서울=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최영은 고려 말기 왜적을  물리치고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백전노장이었다."

북한 평양방송은 12일 고려말 최영(1316-1388) 장군을 "고려시기 왜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이름을 떨친 애국명장"이라고 평가하면서 그의 치적을 자세히 소개했다. 방송은 최영의 생애와 무공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그는 대신 관료로서 부패  타락한 봉건 귀족들을 고려 왕정에서 몰아내는 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며 그를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자 "청렴결백해 아부아첨과 뇌물을 몰랐고 싸움터에선 두려움을 모르는 무적필승의 용장"이라고 칭송했다.

최영 장군의 몰락도 부장(副將) 이성계(1335-1408)의 배신으로 인한 애석한  결과로 그려졌다.

"전국 도통사 최영이 총지휘한 요동공격은 원정군의 부사령관격으로 있던  우군 도통사 이성계의 배신적인 행위로 실패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세워 개경으로 쳐들어와 정권을 잡고, 최영을 충주로 유배 보냈다가 살해했다."

북한의 이러한 평가는 최영을 보수적 무장세력과 권문세족의  이익을  대변하고 고려 왕실을 지지세력으로 둔 구신(舊臣)으로, 이성계를 개혁적 무인들과  사대부의 대표격이자 지방 지주를 지지기반으로 한 신흥세력으로 보는 남한 사학계의  견해와 사뭇 다르다. 북한 사학계에 따르면 최영이 '고려시대의  애국명장'이었다면 이성계는  '매국 배족의 역적'이다. 이성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1999년판)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기의 지위가 높아지자 고려정권을 빼앗을 음흉한 계책실현의 유리한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이성계는 1388년 4월 요동원정의 기회를 타서...고려의 정권을 가로챘다. 위화도회군은 음흉한 정권탈취야망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엄중한  매국배족 행위였다."

대백과사전은 친명(親明) 노선에 대해서도 "자기를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던  전제권을 강화하는 한편 새 정권의 대외적 지위를 높일 목적 밑에 명나라에 사대한 비굴한 정책"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인민의 증오와 저주의 대상"으로 묘사된 이성계는 "참형을 당하자 사람들이 장(場)을 보지 않고 거리의 어린이들부터 부녀자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던" 최영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는 북한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 찾기와 무관하지 않다. 북한은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북방 정권을 민족사의 적통(嫡統) 국가로, 신라와 조선은  외세에 의존한 사대주의 정권으로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에 대한 소개도 "우리 나라에서 첫 통일국가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나라"와 "역사상 마지막 봉건국가"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북한은 그러나 두 정권 모두 하층계급을 착취하고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한 봉건국가였다는 공통적인 '한계'는 인정한다. 평양방송이 "최영이 발휘한 모든 행동은 어디까지나 봉건적 충군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계급적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북한의 통사 '조선전사'는 명장 이순신(1545-1598)에 대해서도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켜 잘 싸웠지만 양반 지주 계급이었고 무관이었으므로,  어디까지나 봉건 왕권에 충성하며 양반 지주 계급을 위해 싸웠다"고 평가하고 있다.

   
hanarmdri@yna.co.kr (끝)


무신론 짐승들의 어처구니 없는 역사관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을 보아도 <공상주의 원리>를 보아도 저들의 역사관은 '계급간의 투쟁'의 '억울한 한풀이'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