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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에 개구리를 넣으면, 개구리는 놀라서 금방 뛰어 오른다.

그러나, 개구리를 차가운 물속에 가만히 놔둔 상태에로 냄비를 서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뜨거운 물속에서 얌전히 그리고 서서히 죽게 된다.

그 이유는 개구리는 변온동물이므로

개구리의 신경이 서서히 뜨거워 지는 물속에서 감각을 잃기 때문이다.

개구리는 뜨거워 지는 물에서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뜨거운 물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은 신경이 무뎌지고 파괴되어 완전히 삶아져서 죽어 버리게 된다.


우리는 이 교훈을 통해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를 비웃을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개구리화 되어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닥치고 있는 위험이나 위기를 감지하는데 민감하지 않다.

뿐만아니라, 어떤 위기가 닥치면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그 위기에 동화 되는데 더 빨리 순응하게 된다.


사단은 우리를 서서히 공격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서히 죽어가는지도 모르게 죽고 있다.

사단은 우리에게 침투하여 온도를 급상승 시키지 않는다.

서서히 온도를 높인다.

그러면 우리는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보다는 그곳에서 안주하려는 노력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사단은 성도들을 삼키려고 이 편한 세상을 만들어 간다.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위기의식에 민감하고 깨어있는 성도들을

하나 하나 서서히 잠들게 하고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웰빙은 좋은 것이며 필요한 것이다.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며, 더 좋은 미장원에서 품격있게 머리를 하며

문화센타에 들려, 고상한 취미활동을 하며

그리고 나서는 헬스클럽에 들려 몸과 정신을 단련하는 것은

현대 문명 사회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뿐만아니라, 현대사회는 물질문명 사회이다.

돈이 가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은 돈이 있어야 현대사회에서는 살아 갈수가 있다.

그러므로 많은 돈을 추구함이 죄일수는 없다.

다만 "돈을 사랑하여 돈에 종이 됨이 악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것은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냄비에 불과 한것이다.

아무리, 무슨 말로 설명하여도 그것은 육이며

우리가 추구해야할 궁극적인 목적도 아니다.

영(구원,충만..)을 위해, 육(물질,취미생활,미장원,운동...)이

필요없다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육의 정체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헤집고 싶은 것이다.

그 육이라는 냄비는

우리를 서서히 죽일수 있는 개구리의 냄비로 사용될수 있다는데

그 위험성이 상존해 있다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


점점,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은 소수에 머물고 있으며

다수는 위기의식을 감지 하지 못한채로 살고 있다.

그만큼 이미 따뜻한 냄비(?)에 깊숙히 머물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냄비에 들어 있는 개구리가 죽는 줄도 모르고, 그 안에 머물듯이 말이다.

위기의식의 센서가 고장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로 살며 은혜로 살며 말씀을 먹고 산다.

그렇지 못할때는 우리 안에서 성령님의 센서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정상이다.

성령님은 위기의식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다시 기도의 자리로, 말씀의 자리로, 은혜의 강가로, 나아오게 한다.

그러나, 사단의 공격이 만만치가 않다.

사단은 우리를 먹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아름다운 선악과를 가지고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한다.

"떡 하나주면 안 잡아 먹는다"고 말이다.

우리는 결국 떡 하나를 사단에게 빼앗기고 만다.

한 번의 유혹, 한번의 범죄, 한 번의 시험은

우리를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만들수 있다.

사단이 사용하는 냄비는 안락하고, 안주하고, 머물고 싶어 하는

우리의 약한 본능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적 부터 아니, 모태에서 부터 편한것을 추구하며, 배부르고, 안주하고,

이기적인 것에 익숙하게 학습되어 왔다.

그래서 불편함보다 편안함을 추구한다.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갈망하고, 고난보다 형통을

희생보다 성취함을, 포기보다 소유에, 더 빨리 반응하며 익숙하여 살게 된다.

어느누가 TV시청하는데 금식기도 하는가?

어느누가 찜질방 가서 2-3시간 목욕하는데

그 시간을 아까워하며 힘들어 하는가?

그러나 우리의 영이 잠들면

성경을 묵상하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며, 손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지루해 할수가 없다.

우리의 육이 강성하기에 그렇다.

그만큼 우리는 편하고 안주하고 안락한데 익숙하여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이 냄비를 이용하여 성도들과,

교회들과 주의 종들을 서서히 조금씩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잠들게 하고 무디게 한다.

서서히 기도를 못하게 한다.

서서히 말씀을 묵상하지 못하게 한다.

서서히 교회와 멀어지게 한다.

서서히 은혜를 떠나게 한다.

서서히 예배를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어제까지는 그렇게도 시퍼렇게 살아 있던 성도가, 오늘은 풀이 죽어

서서히 주님과의 교제에서 힘을 잃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어제까지는 삼손같았던 성도가, 오늘은 야성을 잃어 버린 맹수처럼

그냥 교회에서 어슬렁 거릴 뿐이다.

어제까지는 그렇게 콸~콸 쏟아지는 생수 같던 성도가

오늘은 단수된 수도꼭지에서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떨어지는 물방울 같이 되어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뜨거운 냄비에서 뛰어 나오려는 성도들 보다

그 냄비안에서 서서히 변온되어 죽음에 이르는 성도들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다.


사단은 우리를 뜨거운 물에 담그지 않는다.

차가운 물에 시원한 물(?)에 우선 담근다.

그 다음에 서서히 온도를 높여 우리를 잠들게하고,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시원한 물을 조심해야 한다.

그 물이 나를 잠들게 하는 개구리의 냄비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편하게 예수 믿으라고 말한다.

한번쯤은 기도를 쉬라고 말한다.

한번쯤은 적당하게 타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한번의 시원함이(?) 우리를 오래동안 깨어 나지 못하게 하는

영적 식물인간 되게 할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느누가 이 부분에서 자유할수 있으며, 예외 될수 있는가?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냄비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실수 없어서

허락하신 것이 있다.

"고난"이다.

그래서 성도의 "고난은 불행이 아니라, 유익이며 특권"이다.

실제로 편안하고 따뜻한(?) 환경 때문에 서서히 잠들고, 죽어 가는 성도들이

점점 많아 지고 있음에 위기의식을 느낀다.


편안하고 따뜻한 냄비에서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개구리가 무엇이 행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