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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룹바벨선교회

창조론 창조와 홍수의 기록

운영자 2004.04.14 07:33 조회 수 : 1094 추천: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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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와 홍수의 기록


1. 창세기의 도시 갈라(창 11:10)

영국인 레이어드(Henry Layar)는 1845년 메소포타미야 북부지방에 있는 니므롯 언덕(The Mound of Nimrud)을 파헤쳐 창세기 11장 10절의 도시 갈라를 찾아내었다. 이 도시는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창 10:8)이 건설한 도시이다.

그곳에서 레이어드는 지금의 앗시리아의 유명한 왕이었던 아슈르나서르팔(Ashurnasirpal; 884-859 BC)의 궁전 및 살만에셀 Ⅲ세(Shalmaneser Ⅲ)와 에살핫돈(Esarhaddon) 왕의 궁전을 발굴했다. 살만에셀 Ⅲ세는 이스라엘 왕 예후와 접촉했고 에살핫돈은 성경 여러 곳(왕하 19:36, 37; 대하 32:21; 사 37:37, 38)에 등장하고 있다. 앗시리아의 잔인한 왕인 아슈르나서르팔이 니므롯(창세기의 갈라)에 있는 그의 궁전 입구에 세워 두었던 154줄로 된 기념비가 발굴되었다. 이 비문에는 그의 정복 활동 및 건축 활동이 적혀 있다. 그의 새 궁전을 헌당할 때 69, 574명의 손님에게 10일간 베푼 큰 잔치의 식단도 쓰여 있어 다니엘 5장의 벨사살 및 에서더 1장의 아하수에르 왕의 잔치 기록의 신빙성을 보여주고 있다(신계훈, 조대연, 고고학과 성서 배경, 37 참조).


2.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발굴

영국인 홀므즈 랏삼(Hormuzd Rassam)은 1853년 12월 22일 메소포타미아의 "텔"인 쿠윤직에서 앗시리아 말기의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669-629)의 왕립 도서관을 발굴하였다. 그곳에서 부조와 약 25,000개의 점토판을 파내었다. 그전에 레이어드가 발굴한 곳은 니느웨의 느보(Nebo) 신전이었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고대 최초로 최대의 도서관을 세우고 그의 서기관들과 관리들을 고대의 여러 도시와 나라들, 즉 앗시리아, 바벨론, 구다, 니플, 악카드, 에렉 등지에 파견하여 기록들을 수집하여 보관하였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성경 창세기와 흡사한 창조와 홍수의 사실을 태고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상동).


3. 고대 바벨로니아의 홍수 설화

영국인 홀므즈 랏삼(Hormuzd Rassam)이 니느웨에서 발굴한 25,000개의 점토판은 영국의 대영 제국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 박물관에서 독학으로 구약 성경을 공부하던 소년 조지 스미스(George Smith)가 깨어진 수 많은 점토판을 맞추고 스스로 깨달은 설형문자를 판독하다가 1872년 그 점토판 중에 하나에서 고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의 홍수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다.

이것은 길가메슈의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라는 12판으로 된 것 중 11번째 판에 기록되었다. 고대 우룩(성경의 에렉 - 창 10:10)의 왕이요 영웅인 길가메슈가 고생을 무릅쓰고 조상 우트나피쉬팀(Utnapishitim)을 찾아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답할 때 우트나피쉬팀이 들려 준 이야기를 서사시로 쓴 것이다. 우트나피쉬팀은 바로 성경에서 노아가 겪었던 홍수 이야기를 거의 비슷하게 진술하고 있다.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의 홍수 이야기도 자기들의 스스로 기록이 아니요 아슈르바니팔 왕이 그들보다 먼저 메소포타미야 하부에 들어와 살던 세계 역사의 최고 민족인 수멜 사람들의 기록을 전래한 것이다. 기원전 1967년 또는 기원전 21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 홍수 기록(니플의 문서)이 발굴되었다. 결국 고대 메소포타미아 여러 지방 사람들에 의해 와전되기는 했으나 태고로부터 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전래되었음이 확증된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인 키슈(Kish)에서 파낸 점토 기록은 거의 기원전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홍수전에 살았던 통치자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런 후에 홍수가 세상을 흽쓸었다. 홍수가 흽쓴 후에 왕권이 다시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는데 첫째로 키슈에 왕권이 임했다"고 적혀있다.

노아의 대홍수가 참으로 있었다는 사실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 여러 곳에서 저들의 다신교적인 정치 색채로 와전되고 왜곡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그대로 조상의 전승을 따라 보전되어 내려와서 오늘날 우리로 성경의 노아 대홍수를 확신하는데 문자적인 뒷받침을 하게 되었다(상동 37-39).


4. 고대 바빌로니아의 창조 설화 발견

홍수 설화 점토판을 발견한 스미스는 1876년 그가 수집한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의 점토판으로부터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기사와 흡사한 고대 바빌로니아 설화를 찾아내었다. 이 점토판은 기원전 1700여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하무라비 대왕(1728-1686 BC)이 자기 나라와 자기들의 신인 말둑(Marduk)을 높이기 위하여 그 이전부터 니플, 앗시리아 등 여러 곳에 있던 기록을 개편하여 쓴 것을 아슈르바니팔 왕이 자기 도서관에 보관하여 둔 것이다. 이 서사시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 뜻은 "태초에"(When above)라는 것으로서 7개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어 창조의 7일을 나타낸듯이 보인다. 성경 외에도 고대 여러 나라들이 저들의 조상들이 전해 준 창조의 이야기를 불완전하고 왜곡되게 간직하고 있다. 성경의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사실이 객관성이 있는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되었다(상동, 39-40).


5. 아다파의 전설 - 타락의 역사, 유혹의 장면

니느웨에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의 도서관에서 창세기 3장의 아담의 타락과 유사한 아다파의 신화(The Myth of Adapa)가 발견되었다. 모두 4개의 점토판에 씌여 있는데 3판은 니느웨 도서관에서, 4판은 이집트의 아마르나 왕궁 보관소에서 나왔다. 아다파는 신에게서 지혜를 받아 그 신(Ea)의 성전을 다스리는 자로 임명을 받았으나 실수하여 나중에는 생명의 물과 빵을 먹는 특권을 거절함으로써 내어 쫓겨 영생을 빼앗기고 질병과 불행을 겪게 된다. 아담의 타락 이야기를 반영하는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야 지방 사람들이 쓰던 원주형 도장에 눌려 찍혀진 부각에는 창세기 2장의 유혹의 장면을 보여주는 암시가 있다. 그 그림에는 거룩한 나무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데 하와로 보이는 왼편 사람의 뒤에는 뱀이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창세기 2장의 사실을 묘사한 바벨론의 고대 전설로 여겨지는데 이를 "하와의 유혹"이라 부르고 있다(상동, 40).


6. 창세기의 안식일과 바벨론의 안식일

창세기 2장 1~3절에는 안식일의 기사가 나온다. 안식일은 큰 복의 날이다. 그런데 로린슨이 판독한 고대 바벨론의 한 점토판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제7일은 마르둑과 자르파니트의 축제일이다. 그 날은 악한 날이다. 위대한 백성의 목자는 연기나는 숯불 위에 구운 고기를 먹지 말 것이니라. 그 몸에 겉옷을 갈아 입지 말 것이요 깨끗한 것을 입지 말지니라. 그는 희생 제물을 드리지 말지니라. 병거를 탄 왕은 달리지 말 것이요. 그는 승리를 말하지 말 것이라. 선견자는 거룩한 곳에서 신탁을 말하지 말라. 의사는 환자 위에 그 손을 얹지 말 것이요, 악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느니라. 밤에 왕은 마르둑과 이슈타 앞에 그의 제물을 드릴 것이며 관제(灌際)를 부을지니라. 그의 손을 쳐드는 것은 그 때에 그 신들에게 기뻐함이 될 것이라" (Rawlinson's Cuneiform Inscription of Western Asia Ⅵ, 2nd ed., pl. 32, lines 28-38).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창 2:1-3; 출 20:8-11; 신 5:12-15) 성별하신 안식일에 대한 사단의 훼방을 엿볼 수 있는 흥미 있는 자료가 된다(상동, 41).


7. 성경 예언을 성취한 니느웨

고대 최대 강국의 하나였던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612 BC에 함락)가 1853년 영국인 랏삼에 의해 발굴 확인되기까지 2000년간이나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훔 선지자가 나훔서를 기록할 당시에도(나 3:1-3) 앗시리아는 망할 수 없는 나라처럼 강하고 흥왕했다. 당시 니느웨는 세계의 중심지로서 수 많은 치리자들을 세계 사방으로 보내어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에티오피아까지 북으로는 흑해, 동으로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일대를 다스린 대제국의 수도였다.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나 3:7)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 예언은 졸지에 성취되었다. 기원전 612년 앗시리아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던 신바빌로니아 메대와 스키디아의 연합군에 의해 니느웨가 함락되었다. 그 후 2300여년을 바로 모술 건너편 티그리스 강 동편의 쿠윤직과 요나의 무덤으로 알려진 두 폐허의 흙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 니느웨의 발굴로 아슈르바니팔 도서관과 느보 신전을 발견하여 엄청난 창조와 홍수 기록을 찾아냈다. 또한 발굴 결과 니느웨 성은 둘레가 7.5마일이었다. 당시로는 최고의 성읍이었다(요 3:3, 4). 니느웨 발굴로 성경의 진실성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