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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의 주역 `프리메이슨`과 기독교 탄압

운영자 2007.01.09 01:00 조회 수 : 2992 추천: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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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의 주역 `프리메이슨`과 기독교 탄압
인류를 파괴해온 악마적 사상들-2-2    
<사진자료>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계몽주의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J.J. 루소’의 화상이 담겨있는 그림. 프리메이슨의 상징인 ‘전시안’(全視眼*이집트의 호루스신을 상징)과 ‘오벨리스크’가 그려져 있다.  

[인류를 파괴해온 악마적 사상들-2-2]
-프랑스 혁명과 프리메이슨-

지상에서 낙원을 만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회를 강압적으로 개조하려했던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을 포함해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배후에는 악마를 숭배하는 비밀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기독교 말살과 시민정부의 전복을 목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하나의 맥을 이으면서 은밀하고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에 본지는 20세기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을 배후에서 조종한 비밀조직의 실체를 밝힌다.<편집자주>

프랑스 혁명과 기독교 박해

“앙시앵 레짐(구체제) 말기에 신도회의 열정은 사라졌고, 그들의 활동도 세속화해 고행신도회(Confrerie de Penitents)가 아예 마을의 소방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770년 이후에는 귀족, 부르주아 등의 엘리트 회원들이 신도회에서 이탈해 프리메이슨 지부에 대거 가입했다. (모리스 아귈롱 著, ‘프로방스 지역의 고행신도회원과 프리메이슨’에서)

그동안 일반 역사가들은 프랑스 혁명을 1789년 7월 14일부터 1899년 11월 9일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정과 구제도를 타파하고 자유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배후에는 악마를 숭배하며 기독교 세계의 파괴를 주장했던 ‘일루미나티’(Illuminati Freemason)종단을 포함해 ‘파리총종단’의 통제하에 2천여 개가 넘는 프리메이슨 종단들이 있었다. 혁명 당시 이들이 어떤 수법으로 사회의 분쟁을 조장하고 기독교를 박해했는지 살펴본다.

18세기 중반 비기독교화 현상이 두드러지기 직전까지 절대왕정의 보호 아래 교회는 프랑스 사회에서 절대적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60~80만 명의 프로테스탄트와 4만 명의 유대교와 같은 종교적 소수파를 제외하면 혁명 직전까지 프랑스는 전체 인구 2,800만(1789년 현재)명이 가톨릭 신자인 가톨릭 국가였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계몽주의와 프리메이슨운동과 같은 외부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실제로 1830년대 말 혁명을 일으켰던 유럽 내 비밀조직인 ‘일루미나티’(Illuminati)는 프리메이슨의 한 지파로서 18세기 후반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의 한 대학에서 창설됐다. 이 조직의 창시자인 아담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upt)는 1748년 유대인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학 재학 중 많은 책을 읽었으며,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철학에 심취했는데, 그때 그는 기독교교리에 대해 회의적인 사상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루미나티’종단, 기독교 전통에 따른 모든 제도에 반항

그는 1772년부터 모교인 잉골슈타트(Ingolstadt)대학에서 종교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면서부터 색다른 사상을 주창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은 후 프리메이슨의 조직법을 모방, 발전시켜서 ‘일루미나티’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일루미나티는 기독교 전통에 따른 모든 제도에 반항하면서 자유사상을 불러일으킨 철학적 비밀 단체로서, 특히 예수회와 수  천년을 이어온 비밀조직인 프리메이슨(Freemason)을 모방해 엄격한 동지애와 비밀 엄수를 강조했다.

잉골슈타트에서부터 시작된 이 조직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1779년에는 바바리아 (Bavaria)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때 단원으로 가입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괴테, 쉴러, 모차르트 같은 유명인사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바바리아의 왕 요셉2세 까지도 단원이 될 정도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왕정이 아닌 공화국 정부 제도에 대한 토론이 활발한 상황이어서 이들은 모임에서 주로 종교철학과 일반 철학에 대해 토론했다.

이들은 주로 루소, 볼테르, 모렐리, 마블리의 계몽사상을 논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일루미나티는 평등주의와 합리주의를 근본 사상으로 내세워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혁명기간 동안 일루미나티 종단과 함께 대다수의 프리메이스들이 내세웠던 모토(Motto)가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였다.

정치와 종교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으로 포장한 이들의 사조는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기독교와 대립이 생기면서 쌍방은 사회 전반에 걸쳐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 일루미나티라는 비밀조직의 존재를 몰랐던 대중들은 점점 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편 일루미나티의 중심세력은 프랑스에 이미 세워진 프리메이슨 총종단에 침투해 패권을 장악했고, 1786년에 미라보 후작(Marquis de Mirabeau)은 자코뱅 파리대학에 프리메이슨 종단을 세우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자코뱅파가 된다.

국민의회, 교회의 파괴위해 ‘성직자민사기본법’ 제정

프랑스 혁명당시 국민의회(1789년 6월 13일 결성)가 집권초기에 단행한 정책 중에는 교회폐쇄 및 재산의 국유화, 그리고 교회 파괴를 목표로 한 ‘성직자민사기본법’의 제정과 ‘비기독교화운동’ 등이 있다. 이 가운데 1790년 7월 12일 공포된 ‘성직자민사기본법’은 프랑스 교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편했다. 특히 1790년 11월 27일 신부들에게 요구된 민사기본법에 대한 충성 서약 강요는 성직자 집단을 ‘선서파’ 사제와 ‘거부파’ 사제로 양분했으며 프랑스 전체를 혁명과 반혁명이라는 두 개의 프랑스로 분열시켰다.

당시 거부파 사제가 교회의 정통적 역할을 강조한 반면 선서파 사제들의 경우 전통적인 카톨릭 교회의 교의를 부인하고 루소의 계몽주의와 ‘공화파기독교’가톨릭 교리를 절충한 (Christianisme republicain)라는 새로운 교회론을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민사기본법은 초대 교회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가장 존경할 만한 법이다. 따라서 혁명은 ‘하나님의 뜻’이며 민사기본법은 제헌의회를 통한 ‘하나님의 기적’이고 제2의 종교이다.”

1791년 8월 제헌의회는 일부 급진성향의 의원들에게 거부파 사제들에 대해 억압 조처를 취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전통적 카톨릭 교리를 지지했던 의원들은 대부분 사려졌으며 입법의원들의 다수가 거부파 사제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브리소(Brissot), 베르니오(Vergniud), 구아데(Guadet)등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의원들은 가톨릭에 매우 적대적이었고, 심지어 무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의 선전선동으로 인해 드디어 1791년 11월 29일 거부파 사제를 억압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이 법령에 따라 거부파 사제는 선서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폭동혐의자’가 되었으며 국가에서 지급하는 연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이들이 봉직했던 교회에서 소요가 발생했을 경우 도(道) 행정부의 행정 지시만으로 거부파 사제를 추방할 수 있게 됐다. 다른 종교 예배를 위해서는 장소를 빌릴 수 있었지만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는 어떤 경우에도 예배 장소를 빌릴 수 없게 됐다. 이로 인해 거부파 사제들은 지하에서 비밀리에 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교회 성물(聖物)과 종(鐘), 대포 제작에 사용

1792년 8월 10일 이후부터 입법의회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으로 프리메이슨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파리코뮨`(The Paris Commune)의 압력을 받아 일련의 반교권적 조치들을 취했다. 같은 해 8월 16일 파리코뮨은 야외 종교 행사와 함께 야외 예배를 금지시켰으며 8월 18일 의회는 남아있던 수도회와 신도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외에도 의회는 교회 밖에서 사제복 착용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하는 한편 교회의 성물과 교회 종을 주물소로 보내 전쟁에 필요한 대포를 생산하는데 사용하도록 했다.  

1792년 8월 26일 법령에 따라 거부파 사제들은 2주 안에 프랑스를 떠나지 않으면 유형에 처하게 되었고, 60세 이상인 사제들은 감금될 위기에 처했다. 이 법령으로 말미암아 최소 3만 명의 신부들이 망명길에 올랐다. 9월 20일 입법의회는 교회가 관리해오던 호적대장을 세속 행정부로 이관했다. 이에 따라 이혼이 허용됐다. 이러한 호적대장의 세속화는 교회 입장에서는 성사와 관련된 교회 고유의 영적 영역을 침범당하는 조처였다. 이 개혁은 거부파 사제와 선서파 사제 모두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이혼이 용인됨에 따라 혁명정부와 선서파 사제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거부파와 선서파 사제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됐다.

1792년 말 1793년 초에 선출된 국민공회는 입법의회와 마찬가지로 반기독교적 이었다. 국민공회는 1793년 3월 13일 징집령과 관련된 소요 사태에 참여한 신부들에 대해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었다. 3월 18일 제정된 법령의 경우 프랑스로 복귀하려는 사제들에 대해서도 사형을 언도할 수 있도록 했으며 4월 23일자 법령은 유형에 처해진 사제가 프랑스 국내에서 발각되면 24시간 안에 처형되며 ‘자유-평등 선서’를 거부한 모든 사제들이 유형에 처해질 것이며 선서를 했더라도 6명의 시민들로부터 반혁명적이라고 고발을 당하면 마찬가지로
유형에 처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혁명 기간 중 처형당한 인원의 6.5%가 성직자

역사학자인 도날드 그리어(Donald Greer)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 기간 중 혁명재판소와 인민위원회에서 처형당한 신원이 알려진 1만 4천여 명의 인원 가운데 920명, 즉 6.5%가 성직자였다. 이 숫자는 1789년 인구 가운데 성직자의 비율이 전체 인구 중 1%가 채 안되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비중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총재정부 시기 탄압으로 인해 처형된 사제들까지 포함한다면 최소 2천에서 3천여 명의 성직자(1791년 기준 전체 성직자수 50,876명)가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792년 9월 2일과 4일 사이 파리 감옥에 구금되어 있던 1,4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즉결 처형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아를의 대주교인 뒤로(Dulau)추기경, 보베 교구의 라로쉬푸코 주교를 비롯해 270여명의 사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국외로 망명한 성직자는 대략 3만~4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의 대부분은 영국, 스위스, 독일, 스페인 그리고 이태리 등지로 망명했다.

한편 혁명력 2년(1793~1794년 겨울)의 `비기독교화운동`(dechristianisation negative)은 짧은 기간동안 매우 격렬한 폭력 수단을 통해 성직자 집단에 회복불가능 한 결정타를 날렸다. 이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5만개의 성당이 폐쇄되고 미사가 금지되었으며 성직자가 신부직을 사임하거나 억지로 결혼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특히 억압에 이하거나 자발적으로 이혼한 성직자는 전국적으로 6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사제직 포기신부의 1/4에 달했다.

이처럼 기독교가 금지된 바탕에서 프리메이슨들을 주축으로한 ‘경신박애교’(culte theophilanthropique)등의 새로운 종교가 생겨났다. 특히 경신박애교의 경우 국가차원의 후원을 받아 한때 노트르담 대성당이 이들로 채워지기도 했다. 이외에도 기독교를 대체하는 혁명종교의 대표격으로 이성을 숭배하는 ‘이성숭배’(Culte de la Raison)와 ‘최고존재숭배’(Culte de l`Etre Supreme) 그리고 혁명 영웅 숭배 등이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한편 수많은 신부들이 사제직을 포기했다. 역사학자 보벨(Vovelle)은 ‘비기독교화운동’ 시기 사제직을 포기한 신부들의 수를 1만 8,500~2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특히 사제직을 포기한 신부들의 절반 이상(50~57%)이 1791년 선서에 서약한 선서파 신부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제직 포기는 교회 조직을 재기 불능 상태로 와해 시켰다.

프랑코스코피(Francoscopie)의 통계(2001년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78%(전체인구의 10%는 무슬림)가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지만 매주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은 전체 인구의 7.2%로 나타났다. 특히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라고 하지만 미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는 이들은 44.2%에 달한다. 한 앙케이트 조사에 의하면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카톨릭 신자의 69%가 혼전 성관계가 무방하다고 답했고, 낙태에 찬성하는 비율도 38%나 되었다.

혁명이후 교회의 권위는 약화됐으며 개인적 사고의 영역은 그만큼 커졌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볼 때 프랑스 혁명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

프리메이슨, 계몽사상가들이 기독교와 관련해 했던 발언

-볼테르 : "기독교는 노예출신민족, 식민지 사상이 긷든 민족만이 수용 및 발전이 가능하다. 정상적인 역사와 사상을 보유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를 공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 B.베리 著, 양병우 譯 <사상과 자유의 역사> p127 ]

-루소 : "구원받기 위해서 신을 믿어야 한다. 이 그릇된 교리는 잔인한 不관용의 원리이다.", "나는 스위스에서 아들에게 종교(기독교)를 가르치지 않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 까닭은 이 조잡한 가르침에 감사 하며 만족해 버리고 이성에 깃들 나이에 이르렀을 때 보다 나은 가르침을 경멸하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 루소著, 정봉구 역 <에밀> p348~411 ]

-일루미나티의 창시자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 "우리의 비밀을 밝힌다. 우리가 유일무이한 종교를 가진 척 했던 것은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악한 자가 악한 일을 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않듯 현자도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는 비밀결사에 의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다. 이 교단의 특별한 목표는 기독교를 말살하는 것이고 모든 시민정부를 전복하는 것이다. [존 콜먼 著, 음모의 지배계급 300인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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