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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정도전의 불교비판

운영자 2004.03.05 15:28 조회 수 : 2841 추천: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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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잡변>을 통해서 본 정도전의 불교비판론


. 서설

불교는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파된 후 고려말기까지 국교가 되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고, 정치 사회 문화의 여러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한국의 고대?중세 사회는 곧 불교사회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불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고, 철학, 문학, 미술 등 민족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를 지나면서 불교의 지나친 융성은 사회적 폐단도 적지 않게 남기게 되었다. 전국 각처에 수많은 불교 사찰이 세워지고 출가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사찰은 왕실이나 귀족들의 보호를 받아 막대한 농장과 노비들을 소유하여 영리를 추구하였고, 여러 가지 불사(佛事)를 일으켜 엄청난 재물을 소비하였다. 사찰의 면세와 특혜는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였고, 백성들이 지나치게 많이 승려가 되는 것은 노동 인력을 고갈시키고 군역이나 부역 자원을 소진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교 사찰의 폐단은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유학자들은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거나 호의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비판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비판도 대체로 사찰의 사회적 폐단에 국한되었다. 그 중 이색(李穡, 1328~1396)은 대표적인 온건 비판론자였다.
고려말기에 이르러 원(元)나라로부터 신유학인 성리학이 전래하고 신흥사대부 계층에서 이를 신봉하면서 불교에 대한 비판도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불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성리학이 당대의 유학에 비하여 보다 정교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성리학은 명분과 의리를 강조하고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여 배척하는 의식이 강하였다. 따라서 고려말기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유학을 정통 학문으로 받들고, 불교나 도교를 이단이라 하여 배척하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최해(崔?, 1287~1340), 백문보(白文寶, 1303~1374), 정몽주(鄭夢周, 1337~1397)와 같은 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불교 비판은 강경하였고 조정에 시정책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단편적인 자료 밖에는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없다.
고려말 유학자들의 불교 비판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37~1398)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등의 저술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 배척하고 유교의 우위를 선양하고자 하였다. 그의 불교 비판은 본격적이고 종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씨잡변》에는 모두 19편의 불교 비판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비판서의 물량적 규모는 일찍이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양적 측면뿐만 아니라 비판의 강도나 논리적인 면에서도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비판은 단순히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불교 교리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비판을 제기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삼봉의 불교 비판이 중시되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학문적 견해나 불교에 대한 혐오감의 차원을 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는 조선왕조 개국의 일등공신일 뿐만 아니라, 신왕조의 통치 이념과 행정체계를 정립하고 국가 운영의 기초를 닦은 정치가였다. 따라서 그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곧 조선왕조의 불교정책이 되었고, 그것이 500여 년이 넘게 항구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불교 비판은 조선왕조의 유교적 통치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 중심의 사회에서 유교 중심의 사회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이정표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불교 비판론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불교 비판의 배경과 성격

고려시대는 불교 중심의 사회였지만 국가 통치나 지배계층의 교육에는 유교가 상당히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관료의 선발은 주로 유교 경전과 문예를 시험하는 과거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유학자 출신 관료들은 불교를 공부하고 숭상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불교와 유교가 잘 조화된 사회를 형성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고려초기 통치이념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최승로는 “불도(佛道)를 행하는 것은 수신의 근본이고, 유교를 행하는 것은 치국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고, 고려후기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이제현(1287~1367)도 “불교의 도는 자비와 희사로써 근본을 삼는다. 자비는 인(仁)의 가운데 있는 것이고 희사는 의(義)를 행하는 일이다.”고 하여 균형된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이곡(李穀, 1298~1351)은 불교를 독실히 믿은 유학자로서 “유자(儒者)는 정(正)을 주로 하니 그것으로 수신하여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른다. 불자는 관(觀)을 중시하니 그것으로 수행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이른다.” 하여 양교(兩敎)의 핵심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 원나라의 간섭기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불교의 교리를 비판하는 유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불교에 대하여 이단이라고 표현한 것은 최해(崔?, 1287~1340)가 처음이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천하 사람들이 부처를 받드는 것이 지나쳐서 배와 수레가 닿는 곳마다 탑과 사당이 서로 바라보게 되었고, 승려들이 모두 권세가들에게 붙어서 부(富)를 오로지 일삼아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사대부를 종처럼 보기 때문에 우리 유학자들로부터 용납되지 못한다[졸고천백(拙稿千百)].”고 하였다. 그는 또 불교에서의 어버이에 대한 친애를 끊는 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백문보(白文寶, 1303~1374)의 비판을 보면, “근년에 불교의 폐해가 더욱 심해졌다. 왕실에 밀착하여 백성을 해치고, 세상을 미혹시키고 재물을 좀먹는다. ……조정의 신하들이 한 사람도 이를 비판하지 않고 도리어 이단의 교를 창도하니 나라가 망할 징조이다[담암일집 13 12(淡庵逸集)].” 하여 매우 과격한 면을 보이고 있다. 또 온건한 비판론자였던 이색(李穡, 1328~1396)도 “중세 이후로 신도가 더욱 성하여 5교 양종이 이익을 추구하는 소굴이 되어 냇가와 산 구비가 절이 아닌 곳이 없게 되었다. 다만 승려의 무리가 비루함에 물들 뿐 아니라, 백성들도 놀고먹는 자가 많으므로 식자들이 매번 통분한다. 도첩제를 시행하여 이를 받지 않은 자는 군역(軍役)에 충당하고 새로 창건한 절은 모두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비판은 대체로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포은 정몽주와 같은 사람은 더욱 과격하게 불교를 비판하였다. 정도전은 정몽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고 그의 이단 배척론을 계승하였다. 그는 불교의 타도를 그의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를 비판하고 배척하는 많은 논설을 짓고 학자들을 선동하여 동참토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불씨잡변》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19편의 비판 논설이 수록되어 있다. 즉 《불씨윤회지변(佛氏輪廻之辨)》, 《불씨인과지변(佛氏因果之辨)》,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 《불씨작용시성지변(佛氏作用是性之辨)》, 《불씨심적지변(佛氏心跡之辨)》, 《불씨매어도기지변(佛氏 於道器之辨)》, 《불씨훼기인륜지변(佛氏毁棄人倫之辨)》, 《불씨자비지변(佛氏慈悲之辨)》, 《불씨진가지변(佛氏眞假之辨)》, 《불씨지옥지변(佛氏地獄之辨)》, 《불씨화복지변(佛氏禍福之辨)》, 《불씨걸식지변(佛氏乞食之辨)》, 《불씨선교지변(佛氏禪敎之辨)》, 《유석동이지변(儒釋同異之辨)》, 《불법입중국(佛法入中國)》, 《사불득화(事佛得禍)》, 《사천도이담불과(舍天道而談佛果)》, 《사불심근년대우촉(事佛甚謹年代尤促)》, 《벽이단지변(闢異端之辨)》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별도의 《심기이편(心氣理篇)》을 더하면 모두 20편이 된다. 이러한 삼봉의 불교 비판론은 유학자들의 불교 비판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중국의 학자들 중에서도 이렇게 방대한 저서를 통해 불교의 교리나 사회적 폐단을 비판한 사람은 드물었다. 삼봉의 불교 비판은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불씨잡변》은 조선시대 불교배척론의 원조와 같은 것이며, 조선을 유교 국가로 만든 기초 이론이 되었다.
삼봉의 불교 비판에서 나타나는 큰 특성을 들어 보면, 그것이 단순히 불교의 말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비판한 점이다. 그가 불교의 교리를 비판할 때 주로 사용한 원리는 물론 유교철학, 특히 성리학적 형이상학이었다. 그것은 주로 《주역》의 자연철학적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의 비판에는 유교적 현실주의 혹은 합리주의적 사물 인식과 논리가 많이 동원되고 있다.
삼봉의 불교 비판은 또한 벽이단(闢異端)의 사명감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의 말을 보면, “이단이 날로 성하고 우리 도는 날로 쇄잔해져서, 백성들을 금수와 같은 지경에 몰아넣고 도탄에 빠뜨렸다. 온 천하가 그 풍조에 휘말려 끝이 없으니 아아 통탄할 일이다.”고 하여 매우 비분강개한 뜻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과격한 이단 배척론은 당시의 불교가 안고 있던 사회적 폐단에 대한 그 자신의 인식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윤리를 훼멸시키고 풍속을 패퇴시키며, 가산을 기울여 파산시키고, 가족[父子]이 이산하게 된다. 사람들이 금수로 돌아가고 도탄에 빠져 고생을 받는 것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지적은 지나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불교가 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삼봉은 불교 교리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상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불씨잡변》에는 《원각경(圓覺經)》, 《금강경(金剛經)》, 《능엄경(楞嚴經)》, 《화엄경(華嚴經)》,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육조단경(六祖壇經)》 등에서 인용한 경전 구절들과 보조국사(普照國師)의 법어(法語)들이 보인다. 그도 당시의 일반 유학자들과 같이 기초적인 불교 경전들을 읽었고, 승려들과 일정한 교제를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봉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국외자로서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또 불교를 타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불교 비판이란 것도 피상적이고 독단적인 것이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삼봉의 불교 비판은 유학자의 철학적 인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하나의 지배적 이념을 타도하고 새로운 이념을 확립코자 하였던 일종의 혁명가로서의 사명감을 가졌던 유학자로서 불교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가 불교의 깊은 교리나 정신을 이해하고 거기에 빠져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불교를 비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관점에서 그의 불교 비판이 공정한 것이냐 하는 점을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것이 공정하지 않았던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철한 유학자였던 그에게서 그것을 기대하는 것도 어불성설일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의 비판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루어지고, 당시 사회나 후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점이다. 어떠한 시대적 요청과 사회적 배경이 이러한 극도의 비판을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시대의 불교가 어떠한 모순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학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3. 존재론(存在論)에 대한 비판

불교의 윤회설(輪廻說)과 인과설(因果說)은 천지 만물의 존재와 변화 그리고 생멸에 대한 기초적인 원리이다. 삼봉도 이것이 불교적 세계관 혹은 인생관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불교 교리 비판도 여기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윤회설은 인과설(因果說)이나 기타 많은 불교 교리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삼봉이 이해한 윤회설은 곧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의미하였다. 그것을 요약하면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죽지 않으니, 소생하는 데 따라 형체를 받는다.”는 것이다(《불씨잡변》에서 인용한 불경 구절들은 출전을 명시하지 않았다. `불씨왈(佛氏曰)……'로 시작되는 인용문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간혹 주석자인 권근이 출전을 밝힌 것도 있다).
삼봉은 정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과 죽은 것이 형체를 다시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주역》의 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사물의 생멸에 대한 그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천지의 조화는 낳고 낳아 무궁하지만, 그러나 모인 것은 반드시 흩어지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능히 그 시초를 궁리하여, (氣가) 모이는 것이 태어나는 것임을 알면, 그 후에는 반드시 흩어져 죽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태어나는 것이 기화(氣化)의 자연한 가운데서 얻어진 것으로서, 애당초 정신이 태허(太虛)한 가운데 깃들일 곳이 없음을 알게 된다면, 그 죽음도 기(氣)와 함께 흩어져 다시는 형상을 이룰 수 없으니, 아득하고 광막한 가운데 머무를 곳이 없다.”
그에 의하면 정신이란 것은 사람이 생길 때 기(氣)가 모이는 것과 함께 생기는 것으로 죽을 때 기와 함께 흩어지는 것이며, 육체와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한 번 흩어진 기는 다시는 원래의 모양으로 형상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과 사물의 개별적 정신의 절대성이나 독립 고유한 존재임을 믿지 않았다. 그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다.
“천지 음양의 기(氣)가 교합하여 사람과 만물을 이룬다. 혼기(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體魄)은 땅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은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정(精)은 백(魄)이 되고 기(氣)는 혼(魂)이 된다. 떠도는 혼이 변화된다는 것은 이 혼백이 서로 떨어져 떠돌아 흩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변하게 되면 굳은 것은 썩고 존재하는 것은 망실되어 다시 사물이 될 수 없다.”
그는 천지의 사이는 뜨거운 화로와 같아 비록 사물이 나더라도 모두 녹아 없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미 흩어진 것이 다시 합쳐지거나 이미 가버린 것이 다시 살아 올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불이 타는 원리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불이 나무를 매개로 하여 존재하는 것은 혼과 백이 합하여 사는 것과 같다. 불이 다 꺼지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재는 떨어져 땅으로 돌아가게 되니 이는 사람이 죽으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은 땅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불의 연기는 곧 사람의 혼기이며 불의 재는 곧 사람의 체백이다. 또 화기가 꺼져버리게 되면 연기와 재가 다시 합하여 불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사람이 죽은 후에 혼기와 체백이 또 다시 합하여 생물이 될 수 없다는 이치가 또한 명백하지 아니한가?” 하는 것이었다.
삼봉이 윤회설을 비판한 또 한가지 근거는 생물의 총수(總數)에 대한 불교적 관념이었다. 불교의 윤회설에는 “혈기가 있는 모든 것은 스스로 일정한 수가 있어, 오고 가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윤회 전생의 관념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인류가 되지 아니하면 새, 짐승, 곤충, 생선 등이 될 것이므로 그 수가 정해져 있게 된다. 이것이 번식하면 저것이 감소될 것이며, 이것이 감소되면 저것이 번성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생물은 한꺼번에 모두 번식하지도 않을 것이고 한꺼번에 모두 감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삼봉은 생물의 총수에 일정하게 정해진 수가 있어 증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 자연 현상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삼봉이 보기에는, 성대한 세상을 만나면 인류가 많아지고 새나 짐승 기타 동물들의 번식도 많아지며, 쇠약한 세상을 만나면 인물이 감소되고 다른 동물들 또한 감소된다. 유교적 자연관에 의하면 사람과 만물은 천지의 기운을 받아 나는 까닭에 기가 왕성하게 되면 일시에 번성하게 되고, 기가 쇠퇴하면 일시에 감소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인과설은 세상의 모든 일과 업이 인과관계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봉이 인과설이라고 생각한 것은 인과보응설을 의미하였다. 즉 그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였거나 악한 일을 한 것에 모두 보응이 있다.” 라든가,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였거나 악한 일을 하는 것을 인(因)이라고 하고, 다른 날에 보응을 받는 것을 과(果)라고 한다.”는 것 등을 말한다. 이것은 비단 삼봉의 인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승려들이나 일반인의 보편적인 인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인과설에 대하여는 유학자들도 대체로 인정하였고, 또한 그것이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이제현(李齊賢)의 말을 빌리면 “불교의 인과라는 것은 선을 닦으면 좋은 보응을 받는다는 것인데, 비유하면 뿌리에 물을 주면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그 효용이 능히 몽매한 무리를 공덕으로 인도한다[《익재란고(益齋亂藁)》 5 금서밀교대장서(今書密敎大藏序)].”고 하여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삼봉은 사물의 탄생이나 운명에 있어서 보응이란 것을 믿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자연의 현상은 천도에 따라 무심한 가운데 음양오행의 작용으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일 뿐, 일정한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는 그의 윤회설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보아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설명을 보면, “사람에게 있어서 그 기의 맑은 것을 얻은 사람은 지혜롭고 어질며, 흐린 것을 얻은 사람은 어리석고 불초하며, 후한 것을 얻은 사람은 부자가 되고 박한 것을 얻은 사람은 가난하고, 높은 것을 얻은 사람은 귀하게 되고, 낮은 것을 얻은 사람은 천하게 되고, 긴 것을 얻은 사람은 장수하게 되고, 짧은 것을 얻은 사람은 요절하게 되는 법이다.”

요컨대 어떤 사람의 운명이나 화복은 전생의 과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형성될 때 품부받는 기의 성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개별적 인간 정신의 고유성이나 불멸성을 인정하지 않는 성리학적 인간관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삼봉은 다른 유학자들과 달리 인과설의 교화적 효용에 대한 방편론에도 찬성하지 않았다. 정도(正道)로 사람을 교화하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인데, 방편으로 지어낸 설로써 교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삼봉은 또 현상적인 천지만물을 하나의 가합(假合) 혹은 환영(幻影)으로 보는 존재론적 시각에 대하여도 맹렬히 비판하였다. 불교는 대체로 마음과 성(性)을 진상(眞相)이라고 하고, 천지만물은 가합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원각경(圓覺經)》의 “일체 중생과 여러 가지의 환화가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나왔으니, 그것은 마치 허공에 나타나는 꽃이나 물에 비친 달과 같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불교적 깨달음의 경지에서 본다면 자연과 인간이 모두 가상(假相)에 불과하며 하나의 환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군신 부자 등의 인간 관계도 대수로운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초월적 인식은 당연히 유학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유교는 현상의 모든 것을 있는 상태 그대로 긍정한다. 그 유(有)의 궁극적인 근원은 태극과 음양오행이다. 우주 자연의 존재 자체는 물론이고 천체의 운행하는 도수나 역법(曆法)과 상수(象數)의 치밀함에는 호리의 차질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삼봉은 우주의 높음이나 천체의 거리 천년 후의 동지와 같은 것도 모두 자연의 법칙 안에 있으며, 그것은 수학적 계산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천지 자연의 모든 것은 존재의 실체 그 자체이며, 이것을 가상이나 환망이라고 보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가(假)라는 것은 잠시에 불과한 것으로 천만년 오래 갈 수는 없는 것이며, 환(幻)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천만 사람을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천지의 상존(常存)함이나 만물의 상생(常生)하는 것을 가라고 하고 환이라고 하니, 이는 어떻게 된 것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는 불교가 인륜을 저버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인륜을 일시적인 가합이라고 보는 관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4. 심성설(心性說)에 대한 비판

송대의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심성론이다. 이에 대하여는 학자들마다 설이 무성하지만, 일반적으로 성리학에서는 성(性)과 심(心)을 분리하여 본다. 즉 `심즉기(心卽氣)' `성즉리(性卽理)'의 관념이 그것이다. 삼봉의 설명에 의하면, “마음[心]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가지고 태어난 기(氣)로서 허령하여 어둡지 않아 한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이요, 성(性)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가지고 태어난 이(理)로서 순수하고 지극히 착하여 한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는 지각(知覺)과 유위(有爲)가 있으나 성에는 지각도 유위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마음[心]을 가지고 성(性)이라 본다. 그러나 심과 성의 두 가지 말을 혼동시키는 폐단이 있으므로 때로는 그 개념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래서 “혼미하면 심이요, 깨달으면 성이다.”라고도 하고, “마음과 성의 이름이 다른 것은 안(眼)과 목(目)의 명칭이 다른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삼봉은 이러한 불교의 심성관을 모두 일정한 주견이 없고 구차한 설명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능엄경》에서 말한 바, “원묘(圓妙)는 명심(明心)이요, 명묘(明妙)는 원성(圓性)이다.”라는 것은 명과 원을 심과 성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고, 보조국사(普照國師)의, “마음 밖에 부처가 없으며, 성 밖에 법이 없다.”라는 것은 불과 법을 심과 성으로 나누어 말한 것으로서, 깊이 통찰한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 모두가 방불한 가운데 상상으로 얻은 것이요, 활연하고 진실되게 본 것이 없으며, 그 설에 헛된 말이 많아 일정한 이론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또 불교에서 “마음을 관하면 성을 보나니, 마음이 곧 성이다.”라고 한 설명에 대하여도 삼봉은 이것이 논리적인 모순을 가졌다고 지적하였다. 즉 이는 따로 한 마음을 가지고 이 한 마음을 본다는 것이므로, 마음이 둘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제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마음으로 마음을 보는 것은 입으로 입을 씻는 것과 같으니, 관하지 않는 것으로써 관해야 하느니라.”는 식으로 설명을 하지만 유학자인 삼봉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또 삼봉은 불교의 심성론에 사람들을 방종케 하는 요소가 있음을 비판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적(空寂)한 영지(靈知)는 연(緣)을 따라 변하지 않는다.”라든가 “연을 따라 되는대로 하고, 성에 맡겨 자연스럽게 한다.”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는 그 사물의 하는대로 따를 뿐이요, 다시 그 사물에 대한 시비를 절제하여 주체적으로 처리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유교의 심성관은 마음이 모든 사물의 주재가 되어 사물을 접응할 때 모두 마땅하게 작용케 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모든 기관이 다 마음의 명령을 듣고 주체적으로 통제되기 때문에 방종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불교의 심성론을 “눈금 없는 저울을 가지고 천하 만물을 저울질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맹공하였다.
삼봉은 또 불교에서 말하는 `작용(作用)이 곧 성(性)'이라고 보는 관념에 대해서도 비판을 제기하였다.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에서 “먹을 물과 땔나무를 운반하는 것이 모두 묘용이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은 선불교의 진수를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삼봉은 주자(朱子)의 말을 빌려 이를 비판하였다. “만일 작용을 가지고 성(性)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칼을 잡고 함부로 휘둘러 인명을 살상하는 것도 성이라고 하겠는가?”라는 것이다. 삼봉은 `성즉리(性卽理)'는 형이상이요, `심즉기(心卽氣)'는 형이하인데, `작용(作用)이 곧 성(性)'이라는 것은 형이하를 말한 것으로서, 불교가 고묘무상한 것을 추구하면서도 도리어 형이하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삼봉은 또 불교에서 마음[心]과 형적[跡]을 분리하여 말하는 것도 비난하였다. 유교적 관점에서는 마음이란 것은 한 몸에 주가 되는 것이요, 적(跡)이라는 것은 마음이 사물에 접응하여 발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 자취가 있다.”고 하여,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마음만을 취하고 그 적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문수보살이 술집에서 놀았는데, 그 행적은 비록 그러나 그 마음은 옳다.”는 식의 사고가 그것이다. 삼봉은 이러한 관념이야말로 승려들의 방종을 조장하는 논리라고 비판하였다.
삼봉은 또 선종(禪宗)의 폐단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교종이 비록 인연설?과보설 등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허무를 종지(宗旨)로 삼아 인륜을 저버리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권선징악의 효과가 있어 사람들이 방자해지는 것은 막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달마에 의해 선종이 들어오면서 승려들이 계율에 맞추어 스스로 단속하는 풍조가 끊어졌다고 비판하였다. 그에 의해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기치가 내세워지고, 학습이나 계율에 의하지 않고도 성불할 수 있는 첩경이 열리게 되어 승려들을 방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선종에서 말하는, “선(善)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닦을 수 없으며, 악(惡)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끊을 수 없다.”는 논리는 권선징악의 도를 끊은 것이고, “음(淫)과 노(怒)와 치(癡)도 모두 범행(梵行)이다.”는 등의 말은 바로 계율로 몸가지는 도를 잃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삼봉이 선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언어 표현상의 형식적인 것에 대한 시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 불교의 풍조에는 실재로 그와 같은 폐단이 일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5. 반사회성에 대한 비판

삼봉이 불교의 사회적 폐단 중 가장 비판하였던 것은 인륜(人倫) 훼기(毁棄)에 대한 것이었다. 유교 윤리의 핵심은 바로 오륜(五倫)이며 이것은 인간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인간 관계에 대한 윤리는 그 친소 관계에 따라 후하고 박한 차별과 선후의 차례가 있게 된다. 이러한 관념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친족을 친히 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어질게 하며, 사람들에게 어질게 하고 나서 만물을 사랑하라[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孟子》 盡心 上).”는 명제이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인연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나와 남의 구별마저도 인정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관념에 기초한 보편적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 윤리관이 정통론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삼봉은 불교의 반인륜성을 아래와 같이 비판하였다.
“부처는 짐승에게 몸을 먹히면서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사람에게는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보시를 행하고자 한다. 그런데 부자와 같은 가까운 친속이나, 군신과 같이 지극히 공경할 데에 대하여는 반드시 인연을 끊어버리려 드니 이는 무슨 뜻인가?”
그는 이러한 불교의 이율배반적 행태가 바로 만물을 가합이라고 보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불교는 인륜을 가합이라 하여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신하는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 마침내 은혜와 의리가 강쇄되고 각박하여 지친을 보기를 길 가는 사람 같이 하고, 공경해야 할 어른을 어린 아이 대하듯이 하여 그 근본과 원류를 잃어버렸다고 비난하였다.
삼봉은 인간의 정상적인 윤리는 친한 사람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소원한 관계에까지 미쳐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말을 빌면, “대개 육친은 나와 더불어 기가 같은 것이요, 사람은 나와 더불어 생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진 마음의 베푸는 바는 육친에서부터 사람에게로, 사람에서부터 사물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흐르는 물이 첫째 구덩이에 가득한 후에 둘째와 셋째 구덩이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고 설파하였다.
이 밖에 삼봉이 불교가 대중을 미혹시키는 교리로서 비판한 것은 지옥설(地獄說), 자비설(慈悲說), 화복설(禍福說) 등이다. 이러한 교설들은 비록 중생을 선도하고 교화하기 위하여 일종의 방편으로 제기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교리 자체가 황당무계할 뿐만 아니라 방편적 효과도 별로 크지 않다고 보았다.
먼저 지옥설을 보면, 그는 이것이 불교에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이는 부처에게 공양하지 않고 중에게 밥을 주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에서 고초를 받는다고 협박하기 위함이란 것이다. 삼봉이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기가 분산되므로 형체나 정신을 가지고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옥에 떨어져 육체가 썰리고 찧이고, 갈리우는 갖가지 고초를 받는다고 하지만, 죽은 자는 형체가 썩어 없어지고 정신도 또한 흩어져 버려 비록 불태우고 찧고 갈려고 하여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불법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찌 한 사람도 지옥에 잘못 들어가 이른바 십왕(十王)이란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후에는 더러 그러한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따라서 그 지옥이란 것이 없기도 하려니와 믿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고 보았다.
그는 지옥설의 방편적 효과에 대하여도 인정하지 않았다. “지옥설은 다 낮은 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겁나는 지옥설을 만들어 착한 일을 하게 할 뿐이다.” 혹은 “만일 지옥이 없다면 사람이 무엇이 두려워 악한 짓을 안 하겠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러한 허황한 이야기로는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정자(程子)의 말을 빌려, “지극한 정성이 천지를 관통하여도 오히려 사람이 감화되지 못하는데, 어찌 거짓된 가르침에 사람이 감화되겠는가?” 하였다. 또한 군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서 모두 마음 속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지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안 하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화복(禍福)에 관한 불교적 관점에 대한 비판 논리도 역시 같은 것이었다. 대개 군자는 화복에 대하여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기 몸을 닦을 뿐이다. 그러면 복은 구태여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화는 구태여 피하지 않아도 저절로 멀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밖으로부터 화가 닥쳐오더라도 순순히 그것을 받을 뿐이니, 추위나 더위가 앞을 지나가는 것처럼 하여서 나 자신은 그것에 관여하지 아니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사정(邪正)이나 시비(是非)는 논하지 않고, “우리 부처에게로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당치 않다고 비판하였다. 그렇게 되면 비록 십악의 대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여 화를 면하게 되고, 아무리 도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 되어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모두 사심에서 나온 것이요, 공도가 아니므로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삼봉은 불교의 화복설과 관련하여 양무제와 당현종의 사례를 들어 그 효과가 없음을 실증하고자 하였다. 불교가 일어난 후 수천년 동안에 부처 섬기기를 극히 독실하게 하였던 양무제나 당현종과 같은 이도 모두 비참한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한퇴지의 이른바, “부처 섬기기를 더욱 공경히 할수록 생명은 더욱 단축되었다.”는 말을 자주 인용하기도 하였다.
불교의 사회적 폐단의 하나로 삼봉은 불교의 걸식하는 관행과 논리를 지적하였다. 그는 사람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것이 현실 사회에서 극히 중대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홍범》의 팔정(八政)에서 식(食)과 화(貨)를 앞에 두었고, 백성에게 오교(五敎)를 두면서 식을 처음에 두었으며, 공자도 “먹을 것부터 족하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떳떳하지 않게 얻어 먹는 것도 삼봉은 인정하지 않았다. 먹지 않으면 목숨을 해칠 것이지만, 떳떳하지 않게 먹으면 의리를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사람은 남녀가 같은 방에 사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인륜의 밖으로 나가버렸고, 또 농사를 포기하여 생활의 근본을 끊어버렸다. 이러한 도로써 천하를 교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참으로 그의 도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는 인류가 없어지게 될 것이며, 마침내는 빌어먹을 사람조차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 천하의 음식이 없어질 것이므로 빌어먹을 음식마저도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삼봉의 말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하루에 쌀 한 톨을 먹을지라도 모두 떳떳하지 않게 먹는 것이라고 하였다. 진실로 불교의 가르침과 같이 하려면 지렁이처럼 아예 먹지 않은 뒤에라야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빌어먹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지 삼봉은 반문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말에 이르면 걸식은 오히려 약과였다. 삼봉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에는 승려들이 화려한 전당과 큰 집에 사치스러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향락하기를 왕자 받들 듯이 하고, 넓은 정원과 많은 노복을 두어 문서가 구름처럼 많은 것이 공문서를 능가하였고, 분주하게 공급하기는 공무보다 더욱 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이른바 “번뇌를 끊고 세간을 떠나 청정하고 욕심없이 수행한다.”는 정신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승려들은 가만히 앉아서 옷과 음식을 소비할 뿐만 아니라, 좋은 불사라고 거짓 칭탁하여 갖가지 공양으로 음식이 낭자하고 비단을 찢어 불단을 장엄하게 꾸며서, 대개 평민 열 집의 재산을 하루 아침에 소비한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이 삼봉이 파악하고 있던 고려말 불교 사찰의 형편이었다.


6. 결어

삼봉 정도전이 《불씨잡변》에서 저술한 불교 비판론은 고려말, 조선초기 유학자들의 불교 비판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저술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 배척하고 유교의 우위를 선양하고자 하였다. 그의 불교 비판은 전대 학자들에 비하여 과격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이었다. 《불씨잡변》에는 모두 19편의 불교 비판 논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물량적 규모는 일찍이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불교 교리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비판을 제기하였다.
삼봉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주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통치 이념과 행정체계를 정립하고 국가 운영의 기초를 닦은 정치가였다. 따라서 그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곧 조선왕조의 불교정책이 되었고, 그것이 500여 년이 넘게 항구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불교 비판은 조선왕조의 유교적 통치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불교 중심의 사회를 벗어나 유교 중심의 사회로 전환하는 데 큰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鄭道傳, 1337 충숙왕 복위 6년~1398 태조 7년)

고려말 조선 초기의 정치가, 학자. 충청 단양 삼봉 출생.
이성계의 조선 태조 창업에 영향.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를 겸비. 귀족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이요 정학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여 유교입국의 사상적 기반을 다졌으며 《삼봉집》을 저술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이념을 종합적으로 제시하였다.
저서:《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불씨잡변》, 《경제의론》, 《고려국사》, 《삼봉집》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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