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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방곡령-최초의 경제적 항일운동

운영자 2004.04.16 18:25 조회 수 : 1501 추천:267

extra_vars1 http://www.chosun.co.kr/w21data/html/news/200404/2004041502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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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다큐 운명의 20년] 6. 방곡령-최초의 경제적 항일운동
여위고 힘 없던 조선이여,
제 들판의 쌀조차 지키지 못했구나!


- 1889년 10월 '방곡령 사건'은…

- 갑신정변서러일전쟁까지
1889년 10월, 마식령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함경도 원산의 장덕산(해발 111m) 기슭 일본인 거류지에 살을 찢는 듯한 북소리가 울린다. 칼을 쓰고 북을 등에 진 죄수에게 붙여진 죄목은 ‘왜놈에게 곡식을 판 역적’. 형리가 죄수의 등에 매달린 북을 칠 때마다, 이미 찢겨져 피투성이가 된 죄수의 몸 위로 군중의 돌팔매가 날아오고 여인들의 고함소리가 뒤를 잇는다. 찢어야할 것은 죄수의 북이 아니라 조선의 여윈 등을 파먹고 있는 일본이었다.

군중들의 분노가 피를 부르고 있는 이때, 함경관찰사 조병식은 관아에서 또다른 조치를 발표하고 있다. 도내의 각지방을 통과하는 일본 상인들에게 화물세와 통과세를 징수할 것이며, 일본인의 수출입 화물에 대해서는 엄중히 과세할 것이다. 일본인과의 미곡거래를 완전히 금지하며 이를 위반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그 물품을 압수할 것이며 투옥할 것이다.

▲ 1890년, 밥과 죽을 만들기 위해 잡곡을 키질하는 젊은 조선 아낙들. 흉년과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 겹쳐 조선인의 식량 사정은 악화돼 가고 있었다. /조선일보 DB사진

조치는 엄포로만 그치지 않았다. 원산항에서 출항을 서두르고 있던 일본 상선들을 향해 조선의 군사들이 몰아닥친다. 함남지방의 들판을 통째로 옮겨 실은 듯 대두와 곡식들로 가득차 있던 일본 상선의 선창에서 일본인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온다. 조·일 간의 무역협정을 위반하고 있다는 일본인들의 항의는 조선 군인들의 칼과 창과 총기 앞에서 힘을 잃는다. 보잘 것 없는 총기보다 더욱 위협적인 것은 굶주린 군사들의 벼랑 끝에 선 듯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일본 상인들이 부두에 떨어진 젖은 알곡들을 함부로 짓밟으며 몸을 피하는 동안, 조선의 군사들은 짖밟혀 뭉개진 쭉정이 알곡까지 거두었다.

그로부터 115년을 훌쩍 뛰어넘은 2004년 4월 서울, 뜨겁게 달구어진 총선 열기가 무색할 정도로 세계무역기구(WTO)의 쌀 재협상 문제는 국가적 중요 이슈다. 이번에는 안에서 밖으로가 아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쌀을 붙들고 있지만 이미 논쟁의 도착점은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흐름의 방향이 아니라 얼마나 국제적 저항력을 키웠는가가 관건이다.

함남지방의 대두수출을 전면 금지한다는 방곡령은 6년 전에 체결된 조·일통상조약에 의거해 9월 1일에 이미 예고가 되었고, 한 달 후인 10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조약의 요점은 ‘조선에 식량부족이 염려될 때 일본영사관에 알려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해 남쪽 지방을 휩쓴 한발은 북쪽까지 올라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말라붙였고, 메마른 들판 위에서는 굶어죽은 사람을, 역시 굶어죽어가는 개가 뜯어먹었다. 다른 곡식들에 비해 대두가 비교적 풍작이기는 했으나, 이것 역시 수확도 하기 전에 입도선매를 한 일본인 상인들에 의해, 아예 들판째로 일본으로 실려가버렸다.

굶주린 백성들의 모든 분노는 일본으로 향해 있었다. 배고팠던 모든 기억들, 탐관들에게 수탈되었던 뼈아픈 기억들은 일본을 향한 새로운 적의로 타올랐다. 1880년 원산항의 개항 이래로 일본은 함남지방을 독차지했다. 1887년에 이르러야 중국이 원산에 거류지를 만들고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이미 1884년에 원산에 총영사관을 세우며 함남지방으로의 빠른 진출을 시작했다. 서울을 장악한 위안스카이가 ‘국왕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동안 일본은 이권 장악에 전력을 기울였고, 이것은 주로 미곡을 쓸어가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조선은 쌀과 금덩어리와 소가죽 등을 일본에 넘기고는 일본이 영국에서 수입해들여온 면 제품이나 성냥 따위를 사들였다. 조선이 일본에 판 것은 쌀이 아니라 살이었고, 일본이 조선에 판 것은 기아였다.

1889년 조병식이 선포한 방곡령은 생존을 넘어 투쟁이 된다. 일본은 자국에 보고된 방곡령 예고 시기가 전달 과정상 한 달이 채 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방곡령의 해제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조병식의 해임을 요청하고 그 시기에 일본인 상인들이 손해를 본 것에 대한 배상요구까지 한다. 일본이 요구한 배상액은 14만7600원에 이르렀는데, 모든 손해의 이자가 합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곡령 해제를 교섭하기 위해 쓴 교통비, 통신비가 포함되었을 정도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권에 못 이겨 방곡령 해제를 명했다.

조병식은 타협을 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칼을 거꾸로 잡았다. 일본정부의 항의에 힘입어 대두를 실어나가려던 일본의 상선들은 상선째로 압류되었고, 거류지의 모든 미곡상에는 대두 판매를 감시하는 관원들이 배치되었으며, 조선인 협력자들에게는 칼을 씌우고 북을 매달았다.

한때는 탐학의 죄로 귀양을 갔던 경력이 있고, 몇 년 후 충청감사로 재임하던 1891년에는 동학교도들의 교조(敎祖) 최제우에 대한 신원청원을 묵살, 탄압을 강화함으로써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날 빌미를 제공한 조병식이다. 그러나 1889년 그의 전부를 일본과의 전쟁에 걸었던 이 방곡령 투쟁은, 비록 그와 유착된 원산 객주들의 원산상회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중요한 자리에 남길 역사적인 기록이 될 것이다.

굶주리고 분노하고, 그리하여 목숨까지 걸게 되는 이름 없는 백성들에게는 기록할 그 무엇도 없다. 장마에 짓무르고, 가뭄에 말라붙는 알곡들처럼, 그들은 들판에 떨어져 다 썩어 문드러진 후에야 거름이 된다.

일본인에게 곡식을 넘겼다는 이유로 돌팔매를 당했던 죄수의 등에 매달린 북은 이미 찢어졌고, 쓰러져 누운 자리에는 피가 고였다. 수북하게 쌓인 돌덩어리를 치우고 죄수의 피를 닦아주는 사람은 방금 전에 그를 향해 돌팔매질을 했던 굶주린 농부이다. 태어나 그때까지 한번도 굶주리지 않았던 적이 없는 이 이름 없는 백성은 이 이름 없는 죄수에게, ‘그래도 당신은 팔 것이 있었소?’라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피냄새를 쫓아 까마귀가 몰려드는 저녁,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터진다. 이 울음소리가 곧, 그 무엇보다도 더 치명적인 무기로 변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아직 알지 못한다.

1889년의 방곡령 사건은, 그것이 1776년 개항 이후 최초의 경제적 항일운동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에도 불구하고, 수출이 금지된 대두의 가격이 폭락함으로써 백성들의 기아를 더욱 부추키는, 성공하지 못한, 성공할 수 없던 투쟁의 가혹한 결과까지 안겨주었다. 조병식이 방곡령을 선포한 책임을 지고 함경관찰사 직위에서 해직되었지만, 후임 관찰사인 한장석 역시 이듬해 또다시 방곡령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해도 지방에서도 역시 방곡령이 선포되지만, 이것은 이후 거대한 배상의 책임으로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닥에서 지펴진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도 없을 때, 남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 뿐이다. 성공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멈출 수 없었던 항쟁은 이후 전국각지에 들불처럼 번지는 민란으로 이어진다. 1890년에는 안성과 함창에서, 그리고 1891년에는 제주 고성에서, 마침내 1894년에는 동학이 일어선다. 굶주림과 눈물로 시작했으나, 결국에는 피로 끝날 이 항쟁들은 역사의 여명 속에 그 기록을 남기게 될 것이다. 날이 밝기까지는 아직도 너무 많은 세월이 남아있었으나,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잠들어버릴 수도 없는 근대의 어둠이었다.

(소설가 김인숙)

입력 : 2004.04.15 17:2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