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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作曲의 여정 그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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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안익태 그 영광과 슬픔` 김경래 著/안익태기념재단 刊 (2006) |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의 일생 조명 ‘코리아환타지’의 애국가 합창 우리말로 부르도록 고집 “사랑하는 나의 조국 우리 정부가 채택한 애국가는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우리 동포에게 전달한 것 뿐입니다. 이 아름다운 선물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일을 하렵니다.”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로 정식 채택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안익태가 이승만 대통령 앞으로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김경래 씨가 쓴 ‘안익태 그 영광과 슬픔’이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말 재간행되었다. 우리 민족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많은 오해에 시달린 인물이기도 하다. 애국가를 작곡한 민족음악가의 면모와 동시에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며 당대 최고의 음악인으로 인정받았던 그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처음 들은 것은 13세 때 일제에 협력한 교사를 추방하기 위해 동맹휴학을 주동했다가 무기정학에 처해 있을 때였다. 이 애국가는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의 멜로디에다 우리말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그는 남의 나라 민요곡에 붙인 애국가를 부르며,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 안익태는 이미 8세 때부터 한 손에는 바이올린, 한 손에는 트럼펫을 들고 학예발표회에 나가서 연주를 할 만큼 음악에 천부적인 자질을 보이고 있었다. “애국운동을 음악을 통해서 하라”는 숭실전문학교 교장 마우리 박사의 충고에 따라 안익태는 일본유학길에 오른다. 그의 활동무대는 일본에서 미국으로, 다시 유럽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애국가 가사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안창호 선생이 이 가사를 지으면서 이틀씩 금식기도를 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때 그는 애국가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애국가가 작곡된 순간은 극적이기까지 하다. “1936년 6월 초, 베를린에 온 지 두 달이 되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안익태는 꿈결에 귓전을 스치며 다가오는 멜로디에 충동을 받고 잠에서 깨어났다. 벌떡 일어나 그 악상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자나깨나 고심해 온 악상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안익태는 서슴지 않고 만년필을 꺼내 들고 그 악상을 오선지 위에 옮겨 적었다.” 그는 악보에 반주곡을 붙여 샌프란시스코의 대한국민회 앞으로 보냈다. 안익태가 보낸 애국가의 악보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손을 거쳐 조선까지 전해졌다. 안익태는 애국가의 완성에 이어 역시 미완성으로 둔 교향곡 ‘코리아 환타지’의 끝 악장인 합창 부분에도 손질을 가했다. 애국가가 반복되는 마지막 악장의 합창은 로마자로 표기한 우리말이었다. “그 후 안익태는 어떤 나라에 가서도 이 합창 부분은 반드시 우리 나라 발음으로 부르게 했다. 간혹 반대하는 곳도 있었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세계무대를 누비며 ‘코리아 환타지’와 함께 조국을 알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수제자로서 베를린필, 런던심포니 등 유럽 정상의 교향악단을 지휘한 그의 연주 경력도 당시 동양인으로서는 탁월한 것이었다. 그는 유럽도시에서 애국가가 담긴 ‘코리아환타지’를 연주하는 동안 일본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아야 했다. 일본정부는 이탈리아 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이탈리아에서 쫓겨나 스페인으로 피신한다. 2차대전 후 그의 스승 슈트라우스가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을 때도 안익태는 항일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투신했던 경력을 인정받아 미국에서 순회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 스페인 외무성은 안익태의 항일운동 경력을 알리는 장문의 공한을 미국 국무성에 보내기도 한다. 독립 후 도쿄 공연을 마쳤을 때 한 일본 신문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일본은 한국을 한때 정치 및 경제적으로 지배했으나 안익태는 지휘봉 하나로 일본 음악계를 정복했다.” 김정은 기자 hyci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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