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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룹바벨선교회

[re] 사 4:1에 대하여.

스룹바벨 2004.01.18 09:00 조회 수 : 2405 추천: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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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님의 글에 대하여 답변을 드립니다.


1. 사 4:1-2에 대하여.

아름다운 소식 70.12.17.에 보면 1-2의 해석이 "이것은 현세의 남녀관계와 같은 것을 뜻한 것이 아니고 아름답고 영화롭게 되는 반열을 가르친 것이다"했습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답변) 맞습니다. 이 구절은 현세의 남녀관계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새 시대의 "싹"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새 시대의 "싹"이란 왕권이 아닌, 예비처를 통하여 들어간 흰무리의 후손을 뜻합니다. 이들은 아름답고 영화롭게 되는 반열이 맞습니다.



2. 이뢰자 목사님의 설교하신 내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선지서 강해 이사야 4:1에 대한 강해 입니다. "그날에 심판날에는 부자 망하고 남자의 이름 아니면 여자가 그 영광 못 누린다. 아하! 알았다. 전쟁때 남자가 많이 죽고 여자가 많으니 여자 일곱이 남자 하나 붙 잡는다. 그러면 안된다. 여자 일곱을 데리고 산다는 말이 아니고 남자의 이름 아래 여자가 영광을 누린다. 왕권을 누려도 남자의 이름 밑에 영광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때 부터 그렇게 만들었다. 인격도 그렇다. 금식은 여자가 많이해도 역사는 남자가 한다. 옛날 다윗왕국 시대에도 수 많은 여자가 다윗 밑에 가서 다윗왕의 영광이 되었다."

(답변) 이것이 이뢰자 목사님의 해석인 근거를 대주십시오. 몇년도 몇월에 강해하신 내용인지 관계자들께 문의하신 후, 답변주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에는 그 후계자들 중에서 '강해' 내용을 첨부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뢰자 목사님은 강해하실 때 이북 사투리를 쓰십니다. "아니야요" 등등... 그런데 위 해석의 문장은 바른 서울 말씨로서 뢰자 목사님의 강해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고 정리하시는 분이 자기의 소견을 첨부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어쨌든 1절의 해석이 '한 남자'로 표현된 변화성도 밑에 '의복'과 '양식' 해결의 조건을 들고 찾아가는 여변화성도도 아니고, 일반 백성들도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일곱 여자'는 분명 새 시대의 흰무리 중 '여자들'을 가리키며, '한 남자'는 변화체의 왕권자가 아니라, 생식을 할 수 있는 백성 중의 남자를 가리킵니다.


3. 우리 둘이 예수님앞에 섰다고 합시다. 1절의 해석에 대하여 물으신다면 나는 해석대로 영화롭게 되는 반열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믿었다고 할 것입니다.

(답변)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 역시 이사야 4:1절의 해석이 영화롭게 되는 반열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4장 전체는 새 시대의 "싹" 곧 백성에 대한 예언이라는 데에 대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고 이점으로 인하여 예수님께 책망받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뢰자 목사님의 책자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해석의 "싹"도 백성이요, "일곱 여자"도 생식하고 번성해야 할 백성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절대로 책망 받을 수 없는 것은 우리야 말로 대표종으로부터 이어지는 정통 새일의 족보를 걷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세계 유일로 성경 전체를 밝히고 있고, 해석과 변론의 기준을 오직 '성경'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취하는 해석과 노아님의 취하는 해석은 대표 종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의 차이가 아니고,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이며, 더 엄밀히 말하자면, 월간지를 해석과 변론의 기준으로 삼느냐, 성경 전체를 통하여 파악되는 성경 본문 자체를 기준으로 삼느냐의 차이입니다.

이뢰자 목사님의 월간지를 성경의 권위보다 우위에 두시렵니까? 저희는 그런 자세를 옳다 여기지 않습니다. 월간지뿐 아니라 그분의 설교에는 "나(이로자)는 죽지 않고 북진한다. 나는 변화성도의 대표다"라는 류의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었고 북진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변화성도의 대표가 아니라, 부활성도로 일어나게 됩니다.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해서 따지고 들면 '노아'님은 무어라 답변할 것이며, "월간지는 실수가 없는 100% 위로부터 온 말씀이냐?" 라는 질문에는 무어라 대답할 것입니까?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노아'님의 논리는, "대표 종의 책자 내용 전체는 종말의 다림줄이니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입니다. 이것의 위험함을 지적해 드리는 것입니다.

종이란 하나님 자체가 아니고, 그분이 들어 쓰는 도구일 뿐입니다. 뢰자 목사님이 자신이 죽을 줄 알고, 자신이 변화성도의 대표도 아니라는 걸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준다면, 동방역사의 기도의 향도 쌓일 수 없고, 예표가 걸어간 14년의 역사도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분의 입에서 나온 책자들은 새 일에 대해서 까막눈이던 이 지구 땅에 새 일을 고하고 일러주는 '예표'적 의미로서도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열매는 순에서 맺습니다. 순이 나와서 이뢰자 목사님의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그분이 밝히지 못한 나머지 예언서를 이 시대의 사명자들에게 먹이고 있어야 합니다.

이뢰자 목사님의 월간지는 새 일을 일러주고 심판과 새 시대를 알려준다는 예표적 의미로 받아 들이셔야 합니다. 그분이 일어나서 역사합니까? 그런 귀신소리를 받아들이실 분 같으면 이 홈페이지에 다시는 들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성경변론 대신 월간지로 설교하고, 모든 변론의 근거 역시 월간지 발행년도와 달수와 페이지수에서 찾는 모습으로서는 예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보수는 좋은 것이나 수구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이뢰자 목사님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울 사명을 가진 종말의 대표 보수신앙 노선을 걷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월간지로 설교하고 있는 모든 새일교단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수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월간지와 그분의 책자에만 메달리지 마시고 그분께 안수받고 그분이 외치지 못한 나머지 성경들을 밝혀 외치는 종을 만나는 일이 시급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확신합니다. 예표 종이 안수한 종에게로 말세 새일의 사명은 분명 이전되었고, 그렇다면 이제는 그가 이 시대의 대표 종이라는 것을... 그리고 순의 종은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결코 예표의 종과 다른 길을 갈 수 없는 자라는 것을...

훗날 예수님께 책망 받고 안 받고는 예수님의 몫이니 우리는 각자의 분량 안에서 겸손합시다.



4. '수치'에 대한 해석에 대해 끝까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문제는 '수치'를 올바로 정의하지 않고는 바른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님은 최후까지 '수치'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계십니다. 한 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새 시대는 붉은 용이 잡히고 죄가 사라진 거룩한 에덴동산입니다. 다 큰 성인이 벌거벗었다 한들 전혀 죄가 될 수도 없고, 전혀 수치스럽지도 않은 곳이 바로 새 일로 회복된 에덴동산입니다.

이곳에서 '일곱 여자'가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할 때에 그 '수치'란 무엇이겠습니까?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리라는 에덴의 원리가 결실되는 그 땅에서 '생육, 번성'하여 창조의 원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그것 이외에는 새 시대에서 그 어느 것도 '수치'가 될 수 없습니다. 이사야 4장에 기록된 '수치'는 어떤 '죄'가 아니라, 에덴의 원리가 실현되는데 있어서 여자로서 '생산'의 사명을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이 필요합니다. 혼선이 올 때, 그것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대표 말입니다. 노아 님이 제시하신 강해구절이 이뢰자 목사님의 것인지,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정리한 것인지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5. 부탁의 말씀

새 시대에서 성취될 영화롭고 거룩한 일에 대해 '일부다처제'라는 표현을 쓰면 그 의미가 많이 격하됩니다. 성경은 한 남자가 일곱 여자를 데리고 산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양식과 의복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그 이름만 빌려 달라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노아님의 글을 보면 새 시대가 꼭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사는 곳처럼 묘사됩니다. 독자에게 새 시대 전체가 마치 그러한 듯 느낌을 주는 일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죄 없는 새 시대의 아름다운 일을 타락한 이 시대의 사고로 저울질하는 것도 우습고, 특히 독자들의 뇌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단어 사용으로 성산의 축복된 일에 대해 의심을 갖게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새 시대가 300~500년쯤 진행되어 자기의 족보와 반열 문제를 따지는 일을 상상해 보더라도 이 해석은 큰 무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의 수가 적어서 초기에 적은 수의 남자로 번성이 시작되었다 한들 그 일은 후손들에게는 여전히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 그대로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말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이 예언이 마치 새 시대 천년간 될 일처럼 말해서도 안 되고, 이 해석이 마치 비도적적인 해석인 듯 매도하는 태도도 옳지 않습니다. 예언이란 어느 특정 시점에 될 일에 대해 예언한 것도 있고, 상당 기간동안 이루어질 일을 예언한 것도 있고, 영원히 되어질 일을 예언한 것도 있습니다.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자신들의 수치를 제하게 해달라 말하는 상황은 새 시대에서 천년동안 성취될 예언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묵시 중에 본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부탁하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남녀관계의 모습이므로 이사야는 그것을 받아서 기록한 것뿐입니다. 이 묵시는 특정 시점에 대한 영상으로 새 시대에 들어가 초기에 있을 일이 묵시로 내려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새 시대에서 천년동안 계속될 일은 절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6. 정말 해결해야 할 문제

이 문제는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유익하지 않고, 어찌보면 조금 유치한 변론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문제의 핵심은 이사야 4장의 해석이 어떠하냐라기보다도, 이뢰자 목사님을 말세 사명자로 보느냐? 예표의 사명자로 보느냐? 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아님! 필요하시다면 이뢰자 목사님의 월간지 및 문서에서 잘못된 내용들을 찾아드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하나님의 인도와 영감으로 충성을 다한 종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1958년~1972년까지의 강해를 살펴보면 중간에 추가되는 내용도 있고, 또 사라지는 내용도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그 때 좋았던 그 말씀들도 시대가 지나서 돌아볼 때에는 수박의 겉껍질을 핥은 정도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정도로도 만족하고 기뻐하기에는 너무나 많이 일들이 발생했고,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살아있는 종의 입에서 이 시대의 올바른 '다림줄'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목사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사야 4장의 해석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기 보다는 그분의 뒤를 이어 이 막중한 '동방역사'의 멍에를 지고 갈 '소'가 누구인가를 놓고 분별하는 일이 훨씬 시급한 일일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이 문제로 인해서는 더이상의 논쟁이 없었으면 합니다. 굳이 내용을 이어가시려거든 사 4:1 '수치'에 대한 노아님의 의견을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2004.1.18. <스룹바벨선교회> 최대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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