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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룹바벨선교회

[re] 예정과 자유의지는 공존합니다.

스룹바벨 2004.01.29 09:00 조회 수 : 2640 추천: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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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과 자유의지는 공존합니다.(답변드립니다)


먼저 이 글은 김귀선 자매님께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진리의 책으로 믿으시는 분"으로 가정하고 드리는 글임을 말씀드립니다.

많은 철학의 대가들이 자유의지와 예정론(결정론)을 논했고, 기독교 신학자들도 이 주제를 놓고 갈라져 있는 현실입니다. 이 사람 말을 들어보면 그말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어보면 그 말 또한 맞는 것 같기만한 것이 바로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한 대립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논쟁일 뿐 하나님께는 그러한 대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는 구원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을 것입니다. 철학에는 일평생을 바쳐도 항구불변한 진리의 답은 나오질 않습니다. 철학을 잘 뜯어보면 "내가 너보다 잘났다"는 인간 교만의 대립역사임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지식으로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철학계의 생리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인간의 지력을 발달시켜 물질계의 발전을 가져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탄은 오늘도 '철학'과 각종 문화'와 '거짓 종교'에 인간을 묶어 두고 참 생명을 주는 영적인 진리(성경)로 다가갈 수 없도록 보이지 않게 조종하고 있습니다.

이제 김귀선 님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께서는 다음 말씀들을 상고해보시고 철학에 묶여 고뇌하는 주변 형제가 있다면 좋은 전도자료로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아비멜렉과 사라의 문제에서


창 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2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 아비멜렉은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하며 자기의 의로움을 강조하였으나 그를 막아 범죄치 않게 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성경이 증거합니다. 왕이 사라를 취해 갔으면 충분히 동침할 수 있었음에도 그 밤에 동침치 않고 자다가 그 꿈에 여호와의 음성을 들은 것은 그가 한 일이 아니고 오직 아브라함의 하나님 되시는 '여호와의 주권'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시행되는 것처럼 보이나 이면에 자유의지를 초월해있는 '예정론이 선재'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의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행하셨으므로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무력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5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하신 말씀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자유의지는 인간세계의 일이고 예정은 하늘의 섭리이므로 이둘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양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 말씀은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자쥬의지'와 '예정론'이 각각 다른 차원에서 고유 영역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비멜렉과 하나님과의 대화를 설명할 방도를 잃게 됩니다.

각각이 다른 차원에서 고유 영역을 지키더라도 '선후문제'를 따질 때에는 당연히 '창조주의 예정'이 '피조물의 자유의지'를 웃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6,000년 인류역사는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영적 교류와 섭리속에서 만들어져 가는 역사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회개를 외치게 할 필요도 없고, 너희 앞에 '생사화복'이 있으니 순종하여 복받고 불순종하여 화를 당하지 말라 교훈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이들의 의심처럼 '하나님의 예정'이 불택자를 속여가면서까지 하나님의 모순을 감추기 위한 단순기계적 작용이라면, 하나님은 가룟 유다가 "주님 내가 아니면 당신은 십자가에 달릴 수 없었으니 나에게도 내 역할에 대한 상급을 주시오"라고 했을 때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의 항변에 머리를 긁적이실 정도로 어리석게 일하실 분이시겠습니까? 가당치 않은 상상일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가룟 유다가 없을 때만 몰래 몰래 설교하셨다거나 유다가 구원받을까봐 노심초사 걱정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신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유다의 항변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고 혹자들의 의심대로 하나님의 예정이 '절대자의 횡포'일 수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다 앞에서도 공평하게 설교하셨고, 오히려 유다가 자신을 팔 것임을 알려주기까지 하셨습니다.

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만일 하나님의 예정에 인간이 항변할 만한 약점이 있다면 예수님은 지금 24절에서 너무도 가증한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자들과, 예수님을 사모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저 말씀이 진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는 저렇게 알려주어도 마치 자신은 아닌듯 '천연덕스럽게'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불택자'들의 마음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불택'은 하나님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장치해놓고 꼼짝못하게 하는 저주의 틀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상벌'의 의미는 무효할 것입니다. 상벌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의 자유의지대로 행하고 너의 열매대로 받아라"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신이시므로 모든 피조물의 자유의지까지 미리 알고 계시므로 "너는 이렇게 되리라" "너는 저렇게 되리라"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지, 피조물은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고픈데, 하나님이 저주받게 하여서 어쩔 수 없이 망하는 그러한 말도 안되는 경우는 역사이래로 이 지구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은 나서시어 막으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불법입니다. 공의라는 것은 살 길을 알려주고 미혹이 와도 주의 말씀대로 싸워 이기는 자에게는 '승리의 상급'을 주고, 주의 말씀을 배반하고 마귀의 말을 따라가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신이므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창 4:7).




2)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요 19:10∼11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빌라도는 철저히 '자유의지'의 범위에서 사고하며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실제로 그는 세상에서 놓아줄 권세도 풀어줄 권세도 갖고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자유의지 이면에 그보다 한 수 앞서는 절대자의 경륜과 예정이 이미 시행되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요한복음 18:1~13절과 마태복음 26:45~56절의 내용도 참조해 보십시오. 이를 잘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다도 자기의 자유의지로 예수를 팔았으며, 베드로도 자유의지로 검을 뽑아 군인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또한 겁이 나서 약해져서 주님을 부인하기도 하였습니다. 큰 소리 칠 때는 언제고 말입니다(마 26:33).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앞질러 알고 계셨으며, 잡히시던 그날에도 통일교에서 말하듯 의롭지만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이렇게 예비된(예비하신) 길에 자신을 내어주고 계셨던 것입니다(요 10:18). 예수께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성경대로 잘 되어만 가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요 18: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 18: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미리 예정된 예언을 당신은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하나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예정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요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아버지가 주신 잔'이란 이미 잡히시던 날로부터 약 750년 전 이사야 예언자의 책 53장에 '기록된 잔'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예정이고 주님은 당신의 예정을 실행하신 예언성취자셨던 것입니다.

죽음의 길에 붙들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히 걸어가시는 이 모습! 예수의 이 모습이야 말로 참 자유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충돌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 것은, 예정하신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저렇게 자유롭게 걸어가셨다는 사실이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에게 접붙어 성령과 동행하는 포도나무 가지들도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예정론이 선재하는 상태에서....)

누구나 살리기 위하여 저 길을 가신 그분은 사람을 속이고, 잘해보려는 사람을 나쁜 그릇으로 택하여 저주받게 하는 그러한 잘못된 횡포자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예수는 얼마나 자유로우신 분입니까? 모든 이가 피하려는 죽음을 그분은 당당하기 자기 의지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을 자유의지의 대표적 경우입니다. 바울도 이 길을 갔고(도끼에 목잘려 순교), 베드로도 이 길을 갔습니다(십자가에 거꾸로 순교). 억지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기쁘게 갔습니다.

자유의지가 있기에 베드로도, 바울도 새 시대에 영원무궁세계에서 상급이 큰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유의지 이면에는 하나님의 예정이 웃돕니다.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바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인간의 자유의지(혹은 예정)는 각자가 하나님께 불의하다고 고소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인간은 주님께 대하여 의심을 품거나 따져보기 이전에 받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생명부터 시작하여 삶을 통해 누리는 모든 기쁨과 만족은 인생을 허락하신 그분께로 받은 완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은 영역에서 사는 자는 거저 주신 그분에게 아무 것도 따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감사! 오직 예수! 오직 순종! 그것이 성도에게 합당한 자세일 것입니다.


예정과 자유의지를 어떻게 설정하시건, 그 설정 자체는 주님의 주권 안에서 되어지므로 인간은 자기 범위내에서만 자유롭게 행동하고 주님이 물으실 때 책임을 지면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 따위가 자기의 범위 밖을 넘어 창조주의 영역까지 간섭하며 "당신이 옳으냐 마냐"를 간섭한다는 것은 망령된 일이라고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사실 간섭해보았자 인간의 사고 범위 밖에서 하시는 그분의 일 중에는 그릇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에 의롭다고 소문난 동방의 의인 '욥'도 주님 앞에 거꾸러졌건만, 왜 인간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철학적인 논쟁으로 서로 싸우며 '장로교'가 옳으니,'감리교'가 옳으니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이러한 모습까지 감싸시고 그들을 올바른 '믿음'에 이르도록 인도하시어 구원받게 하시니 또한 감사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주님이 설정해 놓으신 선하신 예지예정 안에서 자기의 자유의지로 주님의 예정속에 준비된 무대에 찾아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따질 것이 없는 것은 주님은 어찌하면 살고 어찌하면 죽는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다 고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나머지 11 제자와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설교를 듣던 수제자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자유의지를 (욕심에 이끌려) 백분 악하게 사용할 때 마귀는 그를 잡아가 주님을 팔도록 예비된 성경의 악역 자리에 그를 끌어다 앉힐 권한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존재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자유의지를 순종에 사용하는 사람을 마귀는 훼방할 수는 있어도, 잡아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합법적인 공의의 게임입니다.




3)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느부갓네살의 경우


렘 25:9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렘 27:6∼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부리게 하였나니 열방이 그와 그 아들과 손자를 섬기리라 그의 땅의 기한이 이르면 여러 나라와 큰 왕이 그로 자기를 섬기게 하리라마는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악한 종, 영웅호걸들도 그 눈이 가리워진 채 오롯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성경역사에 쓰임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자유의지대로 활동하며 자기의 정복욕과 정치야욕을 위하여 활동하지만 그를 초월해 계시는 절대 주권자의 작정 안에서 철저히 쓰임받고 있습니다. "내 종 느부갓네살"이란 표현이 이를 증거해 줍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웅호걸은 세상에서 임시적으로 자기 분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다 누린 후에는 지옥 가 받는 고통 속에서 평생 이를 갈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생 얻을 자들이 이 땅에서 행한 실수에 대한 징계를 받을 때 그들을 때리는 몽둥이, 혹은 그들을 세탁하는 악의 수세미 정도로 활용될 뿐임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 경우를 정확히 보았습니다.

미 7:8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되실 것임이로다 9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10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일례로, 사울을 들자면 다윗을 괴롭혀 다윗을 기도하게 만들고 다윗의 입에서 시편이 흘러나오게 하는데 쓰임 받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악신에 눌려 괴로워하고 다윗을 시기 질투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이라는 존재를 빚어내기 위하여 사울이라는 생명을 창조해놓고 그을 속이시면서 잘 써먹고 지옥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여호와의 명을 어겼습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말이죠. 그리고는 그것을 책망하는 사무엘의 견책에 거짓말로 둘러대었습니다(삼상 15:18~23). 그러나 사울보다 더 큰 죄인인 다윗은 사무엘 같은 대선지자도 아닌 작은 선지자 나단이 와서 견책할 때 곧바로 주 앞에 엎드려 회개하였더랬습니다.

택자와 불택자의 행동은 이와 같이 다른 것입니다. 택자는 자기가 여호와 앞에 범죄한 사실을 두려워하나(경외할 줄 앎), 불택자는 자기의 죄가 여호와 앞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경외할 줄 모르고 거짓말까지 하게 됨).

우리 인간들이 중대한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가능성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욕심을 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애써 논의의 내용에서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선악과를 왜 만들었느냐?" "따먹을 줄 미리 아셨을 텐데, 어찌하여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하셨느냐...? 와 같은 류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다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에 해당할 것입니다.

인간이 의심을 하지 않을 수는 없어도, 분명한 건, 의심은 성령의 열매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마도 김귀선 자매님을 비롯하여 많은 성도들이 한 번쯤은 '자유의지'와 '예정론'에 대해 고민해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을 하시기에 앞서 '이 모든 아름다운 에덴을 아담에게 선물로 주시고 그를 그 동산의 왕으로까지 세우셨도다' 할렐루야"

같은 성경을 놓고,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아담은 그 좋을 것을 다 받아놓고도 왜 지키지 못하고 그렇게 하였을까? 저 아담이 바로 나구나! 아이구 망하게 되었도다! 주여, 나약한 저를 붙잡아 주옵소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생각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자기 자유로 결정한 믿음이나 노력물을 타인이 그의 자유로 빚어낸 믿음과 노력물보다 우월한지 열등한지를 끊임없이 비교해보는 것 또한 인간의 생리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훌륭한 사람의 생애를 다룬 위인전기를 읽기도 하고, 성경의 수많은 인물의 과거사를 상고하며 교훈도 얻고 거울로 삼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정직하심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는 것이 가장 크나큰 축복임을 깨닫고 생활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예정 속에 되어지는 일입니다. 받은 자는 감사하여 더욱 겸손하여지며 주를 위해 몸바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예정 밖에 있는 자는 무릇 그 있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빼앗기는 것이 세상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그렇다면 거듭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음이 이미 결론나 있는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만일 내가 있는 것마저 빼앗기는 자가 되면 어찌할꼬!... 주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지금껏은 게으르고 나태하였어도 제게 새 힘을 주시어 주께 받은 달란트를 두배로 불리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예정 안에 있는 자는 위와 같은 탄식이 나오게 되고, 예정 밖에 있는 자는 끊이없이 의심하며 따지고 덤벼들고 빈정거리고, 걸리고,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너무도 무섭고 두려운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저 예정은 공의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예정이므로 아마도 구원받고 싶어 최선을 다하는 그들을 '최고권위자의 횡포'로 압제하며 버리는 수준의 질낮은 프로그램이 '예정'은 아닐 것입니다.




4) 이스라엘을 괴롭힌 앗수르 왕들


대상 5:25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26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하숫가에 옮긴지라 저희가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

'불'도 '디글랏 빌레셀'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정치꾼들이나 여전히 자기가 믿지도 않는 분의 충신으로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다 나라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는 사실이지 대 제국 앗수르 왕이 출동한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강대국을 의지하기에 여러 가지 조약과 협약을 그들과 더불어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만 바라보고 새 힘 받고 돌진하는 신앙의 용사들임을 한 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5) 파라오


롬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우리는 이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선하신 절대주권 속에서 흘러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무릎꿇게 됩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그분이 정해놓으신 절대 선(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악한 종이 자기의 영토록 확장하기 위하여 세상을 휩쓰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실행시키고 계심을 볼 때, 오늘날 예수님의 피로 산 성도들의 삶에서야 더더욱 하나님의 모략과 예지 예정이 작용하고 있을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예정론과 자유의지라는 누군가가 공박하며 또다른 누군가가 답변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이해되어져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예정론은 말씀들을 읽고 묵상할 때 느껴지는 하니님의 절대권력과 초월성 앞에 무릎꿇는 일!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6) 토기장이 비유


예레미야 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자유의지)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자유의지)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위 말씀 안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호소하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담겨 있고, 또한 그 모든 것을 뜻대로 처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도 담겨 있습니다.




7) 인간은 인간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겔 29:1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애굽 땅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붙이리니 그가 그 무리를 옮겨가며 물건을 노략하며 빼앗아 갈 것이라 이것이 그 군대의 보수가 되리라 20 그들의 수고는 나를 위하여 함인즉 그 보수로 내가 애굽 땅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벨론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던 나라이니 하나님을 뜻을 위해 애굽을 침공했을 리 만무합니다. 자기를 위해서죠. 인간은 이처럼 '인간대로'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서 미리 작정하시고 바벨론을 당신의 작정 안에서 적절히 들어 쓰고 계신다는 점을 우리 성도는 보아야 합니다.

아니 도대체 만들 수도, 부술 수도 있으신 그분이 만일 파괴치 않으시고 길이 참으신다면 우리 파괴될 것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 머리 조아려 황공할 뿐이죠...

고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자유의지'를 생명을 얻는 데에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앞으로 달려나가는 데에만 자유의지는 사용돼야 한다는 것의 우리 믿는 이들의 소신이자 믿음입니다.

멸망받을 자유의지! 하나님의 예정을 의심하는 자유의지는 가라!

성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응답하여 녹아져 내리는 데 쓰이는 순종일 때만 가치 있음을 깨닫고 우리 모두 복 받읍시다.

천지의 대주재시요 운행자이신 하나님은 찬미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나이다. 아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요, 만대를 명정하신 그분의 계획대로 흘러가나이다(사 43:13). 할렐루야!




결 론


예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작은 머리로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자유의지 역시 인간의 지력을 자랑하는 수준에서 쓰여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자매님께서 어떤 의도에서 위 질문을 주셨는지 답변자는 다 알 수 없지만, 성경적인 상고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좀더 올바른 '예정론' 올바른 '자유의지' 관을 갖게 되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자매님의 질문이나 응답자의 답변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신 예지 예정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믿으며 이 믿음대로 우리의 행한 바가 롬 8:28절의 축복으로 변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만든 세상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꽃보다 더 고운 백합화..."
"아름답고 찬란한 주 만드신 이 세상! 지혜로운 창조주 그 솜씨 놀라워. 우리 모두 주 찬양 그 놀라운 솜씨를! 우리 주가 만든 솜씨 잘 드러내도다. 피어나는 꽃들과, 노래하는 작은 새, 우리 주가 만든 솜씨 참 아름답도다. 할렐루야"

사실 운영자는 자유의지와 예정론을 두고 논쟁하는 일은 세상 불신자들의 몫, 혹은 진보주의 신학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몫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지으심을 받았다는 진리(계 4:11)


그리고


주님은 빛도 어둠도, 평안도 환난도 창조하시는 분(사 45:7)


이라는 진리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절대 예정 앞에 무릎을 꿇기만 했으며 좋겠다는 것이 운영자의 생각입니다.


예정이란 우리가 따질만한 구석이 절대 없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예정론이나 미정론에 관한 어떤 신학적 변론보다도

"내가 만대를 명정하였노라"(사 41:4)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3)

하신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데만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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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말씀들은 근원(알파)이시며 결론(오메가)이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드러내주는 구절들입니다. 십자가 피와 성령의 임재와 다시 오실 재림주의 역사가 전혀 전파되지 않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을 위해 공동번역 성구도 함게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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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10: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공동번역) "23 야훼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이 산다는 것이 제 마음대로 됩니까? 사람이 한 발짝인들 제 힘으로 내디딜 수 있습니까?"


• 잠언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공동번역) "계획은 사람이 세우고 결정은 야훼께서 하신다."


•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공동번역) "야훼께서는 모든 것을 각각 쓰임에 맞게 만드셨으니 불의한 사람은 재앙이 내리는 날에 재앙받을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공동번역) "사람은 속으로 제 할 일을 계획해도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시는 분은 야훼시다."


• 잠언 16:9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공동번역) "33 주사위는 사람이, 결정은 야훼께서."


• 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서리라"

(공동번역) "21 사람이 많은 계획을 세워도 성사는 야훼의 뜻에 달렸다."


• 잠언 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공동번역) "사람이 하는 일은 야훼께 달렸으니 사람이 어찌 스스로 이루랴."


• 잠언 21: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공동번역) "전시에 대비해서 병마를 준비하더라도 승리는 야훼께 달려 있다."


• 잠언 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공동번역)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사이에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른다."


• 잠언 29: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공동번역)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마음을 사려 하지만 판결은 야훼께서 내리신다."


•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공동번역) "야훼여, 승리는 당신께 있사오니 당신 백성에게 복을 내리소서."


• 야고보 4: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공동번역) "그러나 율법을 정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13 "오늘이나 내일쯤 아무 아무 도시로 가서 일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 보겠다" 고 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합니다. 14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 그러므로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 보겠다" 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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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세대주의 종말론의 오류 (3月 30日) 운영자 2005.04.01 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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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귀 교회는 기독교의 무슨 종파인가요? 궁금증 사나이 2004.01.19 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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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re] 이교들의 우상숭배 행태는 천주교 안에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스룹바벨 2004.01.19 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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